최근 수정 시각 : 2024-03-08 09:42:52

3.8 민주의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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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호를 외치며 시위 중인 대전고 학생들 시위 중인 학생들과 시위 참가자를 구타하는 경찰
파일:3.8민주의거기념탑.jpg 파일:38민주의거기념비1.png
3.8 민주의거 기념탑 3.8 민주의거 기념비
1. 개요2. 상세3. 결의문4. 기타5. 관련 문서

1. 개요

3·8 민주의거는 1960년 3월 8일부터 3월 10일까지 자유당 정권의 부정부패, 불법적 인권침해에 대항하여 대전지역 고등학생들이 자유와 정의, 민주화를 위한 순수한 열정과 용기로 불의에 항거한 민주화 운동이자 충청권 최초의 학생운동이며 지역민주화운동의 효시로 역사적 교훈과 가치가 크며 대구2·28, 마산3·15와 함께 4.19 혁명의 단초이자 기폭제로서 중대한 의의를 새겼다.

2. 상세

3·8민주의거는 1960년 3월 8일 대전시 공설운동장에서 개최되는 야당부통령후보인 장면 박사의 선거연설회와 때를 맞추어 일어났다. 경찰의 저지망을 뚫고 대전고등학교 1,000여 명의 학생이 독재 타도와 학원의 자유를 외치며 시민들의 환호 속에 격렬하게 시위를 전개하였다. 원래 대전시내 고교생들이 연대하여 시위에 참가할 계획이었지만 사전 발각되어 경찰의 극심한 저지를 받는 가운데 보문고등학교3월 9일부터, 대전공업고등학교3월 10일부터의 학기말시험[1]으로 시위를 봉쇄했으며 또 9일에 경찰에서 대전고, 대전상고, 대전공고, 보문고 등 4개 학교 학생대표 24명을 연행, 구속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일에는 다시 대전상업고등학교 학생 600여 명이 자유당의 정부통령 선거전략을 규탄하고 구속된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학원의 자유를 위한 시위를 감행했다. 대전여고, 대전사범학교, 호수돈여고 등은 경찰 감시 하에 교외진출이 저지되었다. 결국 당시 대전고등학교 교장과 학생들이 구속된 학생들을 석방하기 위해 경찰서장의 제안에 따라 다시는 시위를 하지 않겠다는 확약서를 쓰면서 시위는 끝나게 되었다. 이 과정을 통합하여 3·8민주의거로 규정하였다.

시위가 진행되면서 100여 명의 학생이 연행, 구속되어 고초를 겪었으며 수많은 학생이 경찰의 총개머리판과 방망이로 얻어맞았고 교복, 교모, 신발, 소지품 등 잃어버린 물건이 수없이 많았다. 또 논바닥에 가두어 놓은 인분통에 빠지고 넘어져 곤경에 처하거나 상처가 나는 경우도 허다했다. 한 달 이상을 피신했던 학도호국단 간부들도 있었고 부상으로 오랫동안 병원 신세를 지게 된 학생도 많았다. 교사가 수갑을 차고 곤봉 세례를 받으며 경찰서에 연행되기도 하였으며 경찰 방망이로 맞아 고막이 터지고 평생 불구의 몸으로 살아가게 된 학생도 있었다. 당시 이러한 사실은 동아#, 조선#, 한국, 대전, 중도일보서울신문 등 전국의 신문에 대서특필되었다.

그러나 3·8민주의거는 한동안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음은 물론 학계에서도 큰 관심을 끌지 못하다가 2000년대를 전후하여 3·8의거 주역들의 노력으로 그 역사적 의미가 점차 새롭게 인식되기 시작했다. 그러다 2009년 10월 9일, 대전광역시에서 「3·8민주의거」기념일 제정 조례(제3768호)가 공포되었고 2013년 4월 29일, 3·8대전민주의거의 민주화운동 인정 근거마련을 위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법 일부 개정 법률안’이 국회본회의에서 통과되었고 5월 22일 정부에서 개정 공포하였다. 2017년 12월 1일에는 3·8민주의거기념일의 국가기념일 지정촉구 결의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었고 2018년 11월 2일, 3·8민주의거기념일을 국가기념일로 지정 공포했다(대통령령 29271호). 이렇게 3·8민주의거는 2·28대구민주운동, 3.15 의거, 4.19 혁명과 함께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발전에 크게 공헌했음을 인정받고 있다.

3. 결의문

1960년 3월 8일, 대전고등학교 학생들이 의거를 앞두고 작성하여 연설한 결의문으로 전문을 포함해 7개조 항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의와 진리를 사랑하는 우리들 대고 건아는 최근 일어나는 여러 가지 우리의 뜻에 배치되는 충남도 당국과 학교의 처사에 대하여 그 잘못을 깨닫고 조속히 학원의 자유보장과 대고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도록 강력한 시정책을 강구할 것을 다음과 같이 결의한다.

학원의 정치도구화를 배격한다.
자유로운 학생동태를 감시말라.
서울신문 강제구독을 단호히 배격한다.[2]
진리를 탐구하는 신성한 학원에서 여하한 사회적 세력의 침투를 용납할 수 없다.
우리의 거사는 오로지 정의감과 자발적 의사에서 나온 것임을 밝힌다.
오늘을 기하여 거행함은 다만 학생들의 사기가 왕성한 때문이다.
결의문 작성자인 홍석곤(대고 40회)은 2012년 10월 4·19 유공자 포상을 받았다.

4. 기타

5. 관련 문서


[1] 당시에는 4월에 새학기가 시작되었다.[2] 수 년 전부터 대전고등학교 학생회는 관변언론이었던 서울신문의 강제 구독을 반대한다는 결의문을 채택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