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5-26 13:38:59

하카펠리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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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3. 대중문화에서

1. 개요

근세 스웨덴에서 운용했던 기병대.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운용한 것이 시초이며, 기병 운용의 패러다임을 바꾼 기병대로 유명하다.

주로 핀란드인으로 구성되었는데, 이는 당시 핀란드가 스웨덴의 통치 하에 있었으며[1], 스웨덴에서 운용되는 군마의 대다수가 핀란드 산이었던 것에서 기인한다. 하카펠리타트 외에 하카펠, 하카펠리트(Hackapelit, Haccapelit), 하카펠리테(Hackapelite, Haccapelite), 하카펠리타(Hakkapeliitta)라는 단어들로도 알려져 있다. 이들 명칭의 어원은 이들의 전투 구호가 "Hakka Palle!"(저놈들의 (모가지를) 썰어버리자!)인 것에서 유래했다. 이후 핀란드가 독립하면서 hakkapeliter라는 스웨덴어 대신, 현재의 핀란드어 표기법으로 변경 되었다.

2. 상세

근세 초기 기병대의 패러다임은 카라콜이라는 전술로 요약될 수 있었다. 카라콜은 기병대가 피스톨, 즉 권총을 들고 적에게 접근해 일제 사격을 가한 뒤, 물러나면 뒤에 준비된 예비 기병대가 똑같은 방법으로 사격을 행하고 물러나는 것이다. 이 방법은 원래 테르시오로 통용되는 파이크병과 화승총병의 조합으로 중무장 창기병들이 고전하게 되자, 이를 파훼하기 위해 고안된 전술로, 적의 파이크 방진을 카라콜 사격으로 약화시킨 뒤 창기병으로 돌격해 분쇄하겠다는 아이디어에서 고안된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 효과는 크지 않았고, 정작 카라콜은 같은 기병인 창기병과의 대결에서 더욱 효율적이라는 것이 알려진 뒤 16세기 후반부터 기병대=총기병으로 통일되고, 윙드 후사르 등을 운용했던 폴란드-리투아니아나 기타 동유럽을 빼면 유럽의 기병은 곧 카라콜을 사용하는 총기병으로 통일되었다고 알려졌었다. 그러나 최근 연구에서 카라콜은 대기병 전술이 아닌 대보병 전술임이 밝혀졌고 카라콜이 승리에 기여한 사례들도 속속들이 나오며 위의 주장은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다. 거기다 구스타브 2세는 카라콜의 점진적인 쇠퇴에는 기여했지만 카라콜 전술 자체를 없애진 않았다.[2]

그래도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즉위 이후 스웨덴의 군제를 대대적으로 개혁한 건 사실이고, 이 과정에서 서유럽식 카라콜 전술을 그대로 모방했던 스웨덴의 기병대 역시 크게 변화하게 된다. 기존의 스웨덴 기병대는 서유럽식 편제를 따라 피스톨을 들고 매우 중무장했던 퀴레시어와 비교적 경무장하고 마상용 화승총을 든 총기병으로 이원화되어 있었는데, 문제는 스웨덴은 기병을 키우기에 적합하지 않은 나라였다. 토지의 대부분이 산지에 춥고 척박한 곳이기 때문에 군마를 키우기가 어려웠고[3], 오랜 훈련이 필요한 기병의 전통도 없다보니 서유럽식 기병대의 열화판에 불과한 질 낮은 기병밖에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구스타프 아돌프는 이런 이원화된 기병의 전통을 버리고 모든 기병이 피스톨만을 장비하고, 또 무거운 중갑을 버리고 경무장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카라콜 전술을 포기하고, 적과 조우하게 되면 기병대가 일제 사격을 가한 뒤 적에게 그대로 돌격하는, 돌격기병의 역사를 부활시키게 되었다. 물론 워낙 질이 떨어지는 스웨덴 기병대가 이런다고 적보다 우수한 전투력을 갖출 수는 없기에, 여기에 머스킷을 든 보병대와 가죽포 등의 경량화된 대포로 요약되는 포병대가 이를 보조함으로서 부족한 전투력을 보완하는 것이 주 전술이 되었다.

이렇게 바뀐 하카펠리타트는 놀라운 활약상을 선보였다. 먼저 당시로서는 카라콜을 하지 않는 기병대 자체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기에, 적 입장에서는 예상치 못하게 돌격해오는 스웨덴 기병대의 모습만으로도 상당한 패닉에 빠졌다. 여기에 구스타프 아돌프는 돌격 전에 포병이나 보병으로 하여금 적의 전열을 흐뜨러뜨리도록 하는 방법을 사용함으로서 이러한 돌격에 대한 효율적인 대처를 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러한 보병, 기병, 포병의 합동 전술로 구스타브 아돌프의 스웨덴군은 당장 1626년 있었던 폴란드-리투아니아와의 전쟁에서 놀라운 성과를 내며 전쟁을 실질적으로 승리로 이끌었고, 이후 30년 전쟁에 신교 측으로 참가하여 가톨릭과 제국군에게 악몽을 선사하게 된다. 참고로 이때 만들어진 것이 그 하카펠리타 행진곡이다.

물론 하카펠리타트의 활약상이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았다. 핀란드, 혹은 스웨덴 기병대의 이러한 성과는 기본적으로 보병 및 포병과의 연계를 통해 전투력을 보완하는 형식이었기 때문에 이런 연계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전투력이 크게 감소하는 문제가 있었으며, 이는 1629년 트슈치아나 전투[4]에서 윙드 후사르를 포함한 폴란드 기병대에게 참패한 사례를 통해 증명된다. 또한 스웨덴이라는 나라는 어찌되었건 우수한 기병을 길러내기에는 한계가 있었으며, 하카펠리타트의 우수한 전과는 혁명적인 전술의 개발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었으므로 타 유럽 국가들이 이를 모방하기 시작하면 이러한 우위는 빠르게 상쇄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스웨덴군의 강력함은 하카펠 기병의 존재에 의존한 것만은 아니었기에 스웨덴군은 17세기가 끝날 때까지 유럽 최강의 명성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이는 18세기 초 대북방전쟁까지 이어진다.

3. 대중문화에서

  •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3
    용병 유닛으로 등장한다. 게임 상 명칭은 해카펠 기병.(원어로는 Hackapell).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조.
    •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3: 결정판
      결정판에서는 하카펠리타트를 운용한 장본인인 스웨덴이 플레이 가능 문명으로 승격되면서 고유 유닛으로 변경되었다. 자세한 것은 문서 참고.
      이로 인해 위 항목의 유닛은 Harquebusier, 화승총 기병으로 바뀌었다.[5][6] 스탯은 기존 해카펠과 동일하지만, 원거리 공격 능력이 추가되어 실질적으로 상향을 받았다. 사격 공격의 위력은 97. 작중 등장하는 모든 비포병 유닛의 사격 능력 중 최강이다.


[1] 핀란드가 그냥 스웨덴의 일부로 간주되었다.[2] 구스타프 2세가 전사한 이후인 네덜란드 전쟁에서도 카라콜이 쓰였다.[3] 그나마 핀란드 지역은 스웨덴 본토보다 사정이 나았다. 그래서 핀란드인들이 주축이 된 기병대가 된 것.[4] 또는 회니히펠데 전투라고도 부른다. 구스타브 2세 아돌프와 폴란드 왕국 대원수 스타니스와프 코니에츠폴스키가 맞붙은 전투로 스웨덴군의 실책을 놓치지 않고 달려든 폴란드군에 의해 스웨덴의 기병전력이 완전히 와해되었다. 그나마 다행인건 보병대는 온전히 보전하여 훗날의 30년 전쟁에서 제대로된 활약을 펼치게 된다.[5] 아일랜드 출신 용병으로 설정된 것으로 보인다.[6] Harquebusier는 근세 서유럽에서 운용되었던 기병 병과로, 보병들이 사용하는 아퀘버스보다는 약간 작은 기병용 화승총을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