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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 특수전전단/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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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초창기3. 훈련
3.1. 훈련 수료율3.2. 위탁 교육
4. 해외공작5. 북파공작 (창설 ~ 7.4 남북 공동 성명)6. 베트남 전쟁 참전7. NLL에서의 대북작전8. 아덴만 여명 작전9. 그 외10. 기타
10.1. 기수가
11. 관련 사이트

1. 개요

이 문서는 UDT(Underwater Demolition Team)의 역사와 과거 활약상을 다룬다.

2. 초창기

50년대 초창기 UDT 청사는 1부두
일본해군이 쓰던 작은 목조건물에서 UDT 태동이 시작된것이다. 취사장은 함대사령부에 있어서 먼거리를 매일 이동해야 하는 매우 불편함이 있었다.
당시 일등병조(하사) 월급 100원, 이등병조(중사) 월급 5400원. UDT는 별도 부식비가 나오는데 공군 조종사와 동일한 특급대우를 받았다.
그 시절 상사 월급보다 부식비를 더 많이 받았던 시절이라 윤택한 생활은 물론 매끼 고기가 목욕한 기름기 있는 국을 먹을 수 있었는데, 모든 것이 UDT 훈련(B-6)이 지구상에서 얼마나 혹독하고 힘들었는지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UDT훈련수료 포상을 다음과 같이 약속하고 피훈련자들을 모집하였는데
1.전과말소
2.3급문관대우
3.공군파일럿에 준하는 대우
4.미국UDT에 준하는 수당지급
5.최고수준의 식사 등을 조건으로 내걸고 피훈련자들을 모집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지켜진 약속은 최고수준의 식사 빼고는 모두 거짓이었다고 한다. UDT 1기 교육 막바지 북한 해안정찰을 수행하고 인천에 입항하자 당시 해군참모총장이었던 정긍모 중장이 환영파티를 열어주며 '니들은 한때 돼지같이 길러 잡아 먹을거다'라고 발언했다고 석경식 UDT1기생은 회고한다.
Going Gets Tough, UDT Men Get Go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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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힘들어도 UDT는 한다!
한국 UDT 생도의 미국 유학을 보도한 미국 신문의 헤드라인.
미국 UDT 훈련인 B-6 과정을 받는 한국 UDT 생도의 모습이 담긴 1955년의 신문 기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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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DT 창설배경

6·25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미군으로부터 전달된 특수작전부대 편성과 운영은 그대로 해군특수작부대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1952년 2월, 미 정찰정보대(RIU·Reconnaissance Intelligence Unit)가 해체되면서 한국 해군에 정찰정보대의 창설을 기획했다. 이에 한국 함대정보국(NID·Naval Intelligence District)은 1952년 11월, 미 해군특수전부대 UDT 양성 교육과정인 B-6 과정에 김성권 중위를 유학시켰다. 당시 UDT 창설 목적은 ‘요인암살 및 첩보수집’이었다. 김중위에 이어 1953년과 1954년 미 해군 B-6과정에 유학한 12명으로 대한민국 해군 UDT가 탄생됐다. 1954년 5월 17일 미국 UDT의 편제와 동일하게 내륙정찰조, 해안정찰조, 수중정찰조, 폭파조의 4개 작전대로 수중파괴대를 편조했으며,[1] 이후 같은 해 6월 23일 한국함대 제2전단 예하 해안대에 수중파괴대(UDT)를 편성했다.[2] 1955년 5월 25일 한국함대 B-6 교육대(UDT 분견대)가 창설되었고 같은 해 11월 9일 제 1기 과정 26명을 수료시켜 대한민국 해군 UDT가 창설되었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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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미국 UDT 교육과정 수료사진

당시 해군 지휘부에서는 한국 UDT가 창설되기 전 제2차 세계대전 및 한국전쟁 시 미군의 전쟁수행 핵심전략인 상륙작전을 실시하기 위해 ‘적 해안정찰, 첩보획득, 해상정찰, 내륙기습폭파공작, 암살, 해안장애물 제거, 기뢰탐색 및 소해, 유격대 및 요인호송, 특공대 철수지원 및 수중파괴 임무’[4]를 수행하며 큰 활약을 보인 미 해군 UDT를 모체로 하여 창설을 준비하였다. 이에 따라 미 해군 UDT의 선진 교육을 통한 작전개념 정립과 차기 국내에서 배출해야 될 UDT 요원들의 교관 확보와 더불어 임무 수행에 필요한 장비 획득이 우선시 되어 1952년부터 해군 내 국가관과 군인정신이 투철하고 영어구사능력과 체력이 우수한 대원을 추천 또는 공개 모집, 미 8군 KMAG 주도의 영어시험을 거쳐 선발된 인원들을 미 해군 UDT 과정(B-6)에 유학을 보냈고 한국함대 초대 UDT 병과장인 장인표 대위 등을 중심으로 제 1기 B-6과정을 이수한 생도들과 한국함대 UDT를 창설하게 되었다.

미 해군 UDT(B-6) 유학자들은 교육과정에서 습득한 전문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한국함대 UDT 창설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고, 제2전단 예하 함정교육대(STU)에서 UDT 모집을 공고하였다. 지원 자격에 별다른 조건은 없었고, 직별 상관 없이 신체 건강한 해군 장병이면 지원이 가능했다. 또한, 수료 후 3급 문관에 준하는 특별대우와 미국 유학기회 보장, 파격적인 주ㆍ부식을 제공한다는 내용을 포함했다. 전후 복구에 여념이 없던 시절이라 해군 내에서는 보급품이 제대로 조달되지 못했고 식사 및 의복 지원도 여의치 않았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당시 해군에서 제시한 조건은 해군 내에 큰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모집공고 후 300여명의 사병들이 지원하여 지원자들은 팔굽혀펴기, 달리기 등 1차 체력검정을 실시하고 다음날 해안대 방파제 앞 해상에서 2차로 수영 및 잠영 테스트를 거쳐 최종 80명이 선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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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DT 창설 요원인 장인표 대위 등 33명

1955년 8월 5일 한국함대 UDT 1기생이 입교했고, 8월 8일 UDT 체조를 시작으로 훈련이 진행되었다. 해군의 최초 UDT 교육은 교육훈련에 필요한 각종 교재와 장비 등이 구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체력단련과 수영위주로 제2전단 예하 함정교육대 주관으로 시작되었다. 비록 훈련에 필요한 장비를 충분히 확보하지 못했지만 미 해군 UDT 교육과정과 유사한 내용으로 구성하여 체력, 지옥주 훈련(극기주), 구보, 수영, 잠수, 정찰, 폭파, 백병전 등의 다양한 교육훈련을 13주간 실시하였고 특히 이때 실시한 잠수(Skin SCUBA) 교육은 국내 잠수 역사상 최초로 기록되어 한국 잠수 역사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매일 계속되는 강한 훈련에 생도들은 신체적, 정신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미 해군 UDT 과정을 수료한 교관들은 UDT의 혼과 열정을 심어주기 위해 미 해군 UDT 과정보다 더 강한 훈련으로 생도들을 교육하였고, 1955년 11월 9일 마침내 병조장 이만수 등 26명은 대한민국 UDT 1기로 배출되었다.

1955년 11월 9일 UDT 1기 수료식과 더불어 장인표[5] 대위를 초대 지휘관으로, 교관 7명과 UDT 1기생 26명 등 총 33명으로 한국함대 제2전단 해안대[6] 예하에 대한민국 해군 역사상 유일무이한 특수전부대인 수중파괴대(UDT)가 창설되었다.

출처: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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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UDT 14기 수료식
(해군, 육첩(HID), 해병대 등 120여명 입교, 7명 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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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UDT 17기 수료식 사진

2.1. 영도유격대 해상대와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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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도유격대 해상대 출신의 한인섭 영도부대 전우회장. 베레모엔 한국 UDT 철제 휘장이 붙어 있다.
영도유격대 해상대는 비공식적인 최초의 한국 UDT이자, 공식 한국 UDT의 산파 역할을 하였다.

영도유격대는 한국 전쟁 당시 부산 영도에 본부와 훈련장을 두고 강원도 일대와 함경남·북도까지 공중과 해상으로 침투하여 활동한 유격대이다. 대원들은 동해안 지역에서 활동했으므로 ‘동해지구 반공 의병대’라고도 불렸다. 이 부대는 휴전 후에도 한 동안 당시 문서가 공개되지 않아 어느 기관 소속이었는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부대장이 국군 현역 대위였으므로 국군 통제부대로 파악되는 경우도 있었고, 초창기 부대 창설 과정에서 미국 측을 도왔던 윤치영은 물론, 부대장마저 극동군사령부 소속으로 알 정도로 전쟁 당시에는 미국 중앙정보국(CIA) 소속인지 몰랐다. 그러나 이 부대는 미 CIA 산하 유격대였다.

영도유격대는 동해안 북부지역을 작전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함경남도와 북도, 강원도 등 동해 3도 출신을 주로 모집하였으나, 부산이나 거제도 등지로 피난 온 서울, 평안도 등 다른 지역 출신도 있었다. 월남 청년들 가운데, 대개 가족이 없는 경우를 대원으로 받아들였다. 가족이 있을 경우, 부양할 의무를 고려하여 원칙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해상대의 창설배경은 1951년중 대원을 대규모로 침투시켜 장기간 작전을 펼치도록 했으나 연락이 두절된 경우가 많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귀환율이 낮아, 작전 방침을 바꾸어 해안선 근처에서 단기간의 소규모 침투작전으로 전환할 필요성이 대두되어 1951년 6월경 해상대가 창설되었다.
해상대는 오박을 대장으로 대원 10인에 불과한 소부대로 출발, 기존 게릴라 대원과 해상대 교육대에서 엄선한 대원들로 구성하여 58명까지 늘어났다.

모든 유격훈련 과정을 마친 영도유격대원들 가운데 수영에 능숙하고 배를 잘 탈 수 있는 인원들을 해상대원으로 선발하여 미국 UDT의 조지 애치슨 대위(George Atcheson)와 조 파그넬라 상사(James C. "Joe" Pagnella)가 그들이 받았던 16주의 미국 UDT 과정을 이들에게 전수했다. 이는 정규 미국 UDT 과정에 입교한 사례는 아니지만 한국인이 받은 최초의 비공식 UDT 교육이다. 영도유격대 해상대 출신의 한인섭 영도부대 전우회장은 후에 “한국 UDT 정식 창설 시 교관으로 영도유격대 해상대 출신들이 지원나가기도 했다”고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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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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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1기부터 1970년 16기까지 모두 395명이 UDT 교육을 수료했다. 이 중 해군이 아닌 타군[7]에서 온 위탁생들이 63명이었다. 나머지 해군 소속으로 UDT 교육을 마친 332명 중 126명은 훈련 후 바로 해군 첩보부대로 전속됐다. 1971년 UDT 교관단이 해군 첩보부대에 발령받아 UDU 자체 교육대를 신설했는데, UDU 대원들을 별도로 선발하기 시작한 1971년 그 이전 기수인 UDT 1기에서 16기까지의 대원은 훈련 종료 뒤 즉시 북파공작에 투입되거나, 2~3년 간격을 두고 해군 첩보대 전속 명령을 받고 북파공작에 투입됐다. 반대로 UDU에서 교육수료 후 UDT에서 정년퇴직한 사례도 있다. 첩보부대에 자체적인 요원 양성 교육이 생긴건 71년인데 71년에 수료한 UDU 기수를 UDU 1기라고 하지 않고 UDT 기수를 그대로 물려받아 UDU 17기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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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UDU에 UDT 교관단이 전출되어 UDU에서 자체 특수요원 양성이 시작된 이래, UDU에서 자체 B-6교육을 받고 복무하다가 UDT로 전출을 가서 복무한 인물의 진술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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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UDT 6기 수료식 후 찍은 사진이다. UDT 6기는 해군 14명, 육첩(HID) 19명이 수료했는데 해군 수료자들은 전원 해군 정보부대 해상정찰대(현 UDU)에 인사발령이 났으며, 후에 2명이 UDT로 복귀하여 UDT에서 전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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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UDU 동지회 회장(UDT 4기 조OO)의 증언에 의하면 UDT에서 복무 중 당시 UDU 부대장을 하고 있던 UDT 창설요원이자 UDT 부대장이었던 장OO이 직접 불러서 UDU로 갔다고 한다.

UDU B-6 과정의 경우 UDT 교관단이 통째로 UDU로 전출을 가서 UDU 교육대 창설을 했으니 앞서 열거된 타군과는 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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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DU 자체교육 1기(UDU 17기)의 UDT 출신 교관진

과거에는 민간부사관 지원자[8]들은 처음부터 UDT 교육과정으로 입대하여 중간에 하사로 임관하는 방식이었다. 그렇기에 임관 전에 퇴교하면 아예 귀가 조치되면서 군생활이 리셋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 때문에 민간부사관 지원자들도 부사관교육대대에서 모든 교육을 이수 후 하사로 임관시켜 실무배치하고, 실무생활을 하다 추후 UDT 교육을 받는것으로 변경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되니 UDT 교육 수료 전까지는 수병들보다도 더 잉여 자원이 되어버렸다. 해군의 특성상 수병들도 후반기교육을 받는데, 민간부사관은 기초교육만 딱 받고 실무로 왔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현역들 뿐 아니라 타군에서도 지원이 가능한 교육과정에 민간부사관들만을 위한 과정만을 따로 만들수도 없었던 노릇이었다. 물론 현역 출신 지원자라면 해당사항이 없었다. 부사관, 장교는 교육 중 퇴교하면 원대복귀 시키고, 수병은 직별 재분류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제일 초창기엔 교육 기간이 3개월이었고, 1960년대엔 4~5개월 정도였는데 1970년대에 6개월(24주)로 늘어났고, 이게 쭉 유지돼서 2006년까지 계속 24주였다. 그 후론 2007년~2010년 20주, 2011년 26주, 2012년 20주, 2013년~2017년 24주, 2018년 16주, 2019년 이후 24주로 해마다 교육기간이 조금씩 바뀌고 있다.

장교의 경우 초창기에는 초급반에 장교과정이 없어서 장교로 UDT에 들어오려면 미국으로 유학을 다녀와야 했었다. 이처럼 한국 UDT 초급반 교육 대신 미국 UDT 교육을 받은 인원의 기수를 ‘특차’라고 한다. 이후 1972년 18기부터 장교 인원도 초급반 교육에 입교할 수 있게 되었다.
UDT 20기 출신의 영상 수기이다. 돼지라 지칭하는 부분이나 인분으로 양치를 하는 등 당시의 분위기가 잘 표현되어 있다. 영상 말미에 해군 31명, 해병 4명이 수료했다는 글이 나온다. MIU가 해체되어 1명이 해병수색대로 전속되었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수료한 해병 4명 중 3명이 수색, 1명이 MIU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3.1. 훈련 수료율

특이 케이스인 UDT 14기(120여 명 입교하여 7명 수료)를 제외하고 기사에 따라선 20%, 30%라는 내용의 기사와 교육을 받았던 사람들의 수기를 다수 볼 수 있다. 대표적인 수기로 해병수색대 김 00 소령의 수기를 들 수가 있다. 김00 소령이 본인의 블로그에 밝힌 내용에 따르면 김00 소령은 해병대 수색대에 부임한 후 수색교육 7기를 수료하고 이듬해 해군 UDT 18기 과정에 입교하여 위탁교육을 수료하였는데 UDT 18기 당시 해군, 해병대를 비롯하여 육군 첩보부대, 공군 첩보부대에서 입교하여 총 148명 입교하였고 수료자는 31명이라고 밝혔다. 이 부분에서는 UDT 18기 동기생인 육군 첩보부대장을 역임한 박복규 예비역 대령의 회고와 다소 차이가 있다. 박복규 예비역 대령의 기억에 의하면 130여 명 입교하였으며 육군 첩보에서는 6명, 해병 수색에서는 11명이 입교하여 육군 첩보에서는 박복규 대령 혼자 수료하고 해병 수색에서는 3명이 수료하였다고 기억하고 있다.[9]
파일:UDT18기 조광현 교육대장.jpg
UDT 18기 교육 중 사진이며 앞에 걷고 있는 인물은 당시 교육대장이었던 조광현 예비역 대령이다. UDT 18기는 강원도 양양 기사문 일대에서 진행되었다. 130여 명 입교하여 해군 30명, 육군 첩보 1명, 해병 수색 3명이 수료하였다.[10]

3.2. 위탁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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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UDT 9기 교육에는 해군 외 중앙정보부 1명, 공군 첩보부대 3명이 입교하였다. 조OO 대위(UDT 창설요원)가 교육대장을 맡고, 신OO 교관 등으로 구성된 UDT(B-6) 교육은 혹독하게 실시되었으며 공군 첩보부대 1명은 훈련을 소화하지 못하고 퇴교 조치 되었다.
나머지 공군 첩보부대(안OO, 김OO) 2명도 지옥주를 마치고 퇴교 조치 되었으나, 공군 첩보부대 본부 협조 아래 UDT 교관단과 함께 UDT 9기 훈련 종료 시까지 참관만 하게 된 것이다. 공군 첩보부대원(김OO 중사)은 실미도 684 부대 교관단으로 이동했고, 중앙정보부 1명은 UDT 교육 중 11주 교육만 이수하고 바로 중앙정보부로 복귀하게 된다. UDT 9기 수료 사진에는 공군 첩보부대 2명도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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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측이 육군 첩보부대 소속으로 UDT 6기 교육과정에 위탁되어 수료한 인물. UDT 6기 해군 수료자들은 수료와 동시에 전원 해군 첩보부대로 발령받아 임무를 수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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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군 684 부대 간부들 사진
앞줄 맨 오른쪽이 UDT 11기 과정을 수료한 도OO 소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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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udt5기 김00약력.jpg
UDT 5기 김치준의 경우, 해군 UDT에서 복무 중 해병 장교로 신분 전환하였고 월남전 파병도 다녀왔다. 해병수색대에 발령받아서 가보니 당시 해병수색대에는 아직 제대로 된 교육훈련이 없는 것을 알게 되었고, 해군 UDT 교육을 본떠서 단축시킨 해병 수색 교육과정을 만들어서 시작했다. 이렇게 1969년부터 해병 수색 교육이 시작된 것이다. UDT 5기 김치준은 노환으로 2021년 4월 7일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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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육군 특전사, 해병 수색대원을 대상으로 한 UDT 주관 단기 스쿠버 교육 사진이다.

4. 해외공작

1950년대, 대만 파견에 관한 내용이 영상 말미에 언급된다.

5. 북파공작 (창설 ~ 7.4 남북 공동 성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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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과 북이 첨예하게 대립하며 가장많은 공작원들을 주고 받던 1960년대 중후반, 해군 북파공작의 주무부대 NIU의 작전요원은 전원 UDT였다.

UDT는 과거 7.4 남북 공동 성명 이전까지 북파되어 특수임무를 수행하였는데 북파공작은 UDT에서 직접 수행하거나 NIU(해군 정보부대)로 전출되어 해군 정보부대의 지휘를 받아 임무를 수행하였다. UDT 1기의 경우, 훈련의 마지막 관문이 실전 임무였다.[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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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의 최종관문이 북파공작이었던 UDT 1기의 강OO
- UDT 1기 강OO -
193X년 경남 OO출생
6.25사변 당시, 학도경찰신분으로 지리산지구 공비토벌작전 참전
1952년 경찰임용
1954년 해군 입대(해군 42기)
1955년 UDT 1기 수료
1958년 하사전역
- 전역 후 경찰 수사과, 정보과 등에서 20년 근무함
- 월남전 당시 중앙정보부 지휘로 3년 6개월간 월남에서 근무
- 경정 퇴직 후, 참전경우회장, 참전유공자기념사업회장 등 역임
- UDT 1기 훈련당시, 모든 과정이 혹독하고 힘들었지만 특히 지옥주 기간중 야간에 똥구덩이 속에 집어 넣고 손을 들고 있게 하였는데 구더기가 꾸물꾸물 얼굴로 기어올라와도 털어내지 못하도록 한 것이 너무 힘들어서 특히 기억에 남는다고 함
- 수료를 남겨두고 욕지도에서 시작하여 남해안, 서해안을 따라 백령도까지 해안정찰을 실시하였고 마지막으로 야간에 북한 황해도 용연군 해안에 침투하여 해안정찰을 실시하였다고 함
- 모든 훈련이 종료되고 진해로 복귀하기 전, 당시 해군참모총장이었던 정긍모 중장이 인천으로 초대하여 직접 교관들과 교육생들을 치하 하였다고 함
본래 UDU라는 명칭은 NIU 해상정찰대에 배속된 UDT 요원을 가리키는 용어였다. 1971년, 해군 첩보부대의 개편과(1971.5.5. 국방부령 제216호) 자체적인 특수요원양성을 시작하게 됨에따라 이때부터 해군 첩보부대를 UDU라고 통칭하게 된 것이다. 기원전 존재하던 조선과 1392년 건국된 조선이 이름만 같을뿐 다른 국가이듯 1971년까지 해군 정보부대로의 전출 이후 북파공작임무를 수행하던 UDU라 자칭하던 UDT들과 1971년부터 해군 정보부대에서 자체적으로 양성된 UDU는 해군 정보부대라는 상급부대만 같을뿐 다른 곳에서 양성된 인원들이다. 전자가 UDT에서 양성된 직후 또는 UDT에서 근무중 해군 정보부대로 인사발령난 인원들인 반면 후자는 1971년부터 해군 정보부대에서 UDT교관들을 전입 받아 자체적으로 훈련을 시켜 양성된 인원들이다.

5.1. 북파공작원

북파공작원이란 한국전쟁 중인 1952년부터 휴전 후 1972년 7.4 남북 공동 성명 발표 때까지 북한지역에 파견되어 활동한 무장첩보원이다. 정보사령부에 따르면 7.4 남북 공동 성명 발표 뒤 남북이 공동으로 공작원 파견을 하지 않기로 함에 따라 북파는 자제하고 있다고 한다. 북파공작원들은 최초 한국 전쟁 당시 남한에 있는 지리산 빨치산처럼 북한의 후방을 교란시킬 목적으로 양성됐다. 적 생포 및 사살, 적군진지 주요시설물 폭파, 적지에서 각종 테러를 통한 사회혼란 야기, 첩보수집, 첩보망 구축 등을 주임무였다.

이들은 조선인민군 복장을 위장 착용하고 육해공군의 보급지원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모든 것을 자급자족으로 해결했고 미숫가루, 생식, 칡뿌리, 소나무껍질을 주식으로 했다. 임무수행 중 부상을 당했을 때는 자결이나 자폭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작전에 투입돼 살아 돌아온 경우도 극히 드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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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해군의 첩보(정보)부대

첩보, 정보라는 단어로 인하여 첩보부대, 정보부대라 일컬어지는 부대들의 연상되는 이미지는 007의 제임스본드, 본 아이덴티티의 제이슨 본 등과 같은 헐리우드 첩보액션물에 등장하는 특수요원일 것이다. 그러나 실제 해군 첩보(정보)부대는 정보함을 운용하며 영상, 신호정보를 수집하는 부대이며 그런 정보를 수집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정보함을 운용할 수 있는 해군 승조원들이다.

군사분야에 관심이 있는 해군 예비역이라면 알 수 있듯 그러한 임무를 수행 할 수 있고 수행하는 군인들은 통정, 기정, 음탐, 전탐, 통신 등과 같은 직별의 군인들이며 이 직별의 군인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특수훈련을 받고 적진에 침투하여 정찰을 한다던지 파괴공작을 할 수 있는 군인이 아니다.[12] 해방 직후나 6.25 직후처럼 우리 마음대로 북한 해역에 드나들 수 있던 시절이 끝이 나고 정비되고 강화되어 가는 북한 해군 및 해안경계 세력을 뚫고 북파공작을 수행해야만 했던 60년대에 들어서 해군 첩보(정보)부대에서는 적진에 침투하여 특수임무를 수행 할 수 있는 특수훈련을 받은 군인이 절실하게 필요하게 되었던 것이다.[13]
영상 58초부터

사나이김소장 : 선배님, UDT6기[14] 수료하시고 인천[15]가셨을 때 선배님 위로 특수교육 받은 사람 아무도 없었습니까? 6기생 밖에 없었습니까?[16]

최도경 원로 : 그렇지, 없었지.

그래서 북파공작을 주관하고 우리나라 정보기관의 헤드인 중앙정보부의 지휘를 받던 각 군의 정보(첩보)부대들은 필요에 따라 당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중앙정보부의 힘을 빌어 군내 자원, 인력들을 상당히 자유로이 끌어다 쓸 수 있었고 해군 첩보(정보)부대의 경우는 해군내 유일하게 적진에 침투하여 특수임무를 수행 할 수 있는 부대인 UDT부대에서 근무중인 현역요원이나 갓 특수훈련을 거친 UDT수료생 또는 퇴교생을 자신들의 부대로 끌어 갈 수 있었던 것이다.[17] 이런 배경으로 정보함을 운용하고 운용하기 위한 직별의 군인들로 구성되어 있는 해군 첩보(정보)부대에 UDT가 가게 된 것이며 해군 첩보(정보)부대 안에 적진에 침투하여 임무를 수행하는 UDT로 구성된 소부대(UDU)가 구성되게 된 것이다.[18] 현재도 우리나라 해군은 정보함들을 운용 중이고 그러한 정보함들은 해양정보단이나 정보사령부 소속이다.

현재 국방개혁 계획과 일선 전투부대에 필요한 정보가 제대로 공급이 되지 못한다는 지적에 따라 군사 정보분야 효율화를 이유로 1990년 각군의 정보부대를 통합시켜 탄생시킨 국군 정보사령부의 기능을 각군 정보부대[19] 로 다시 환원시키고 있다. 그러한 계획 때문인지 해군 정보단은 해군 해양전술정보단[20]에서 2012년 해군정보단으로 부대 이름을 바꿔 달았다.
북한쪽 동해 공해상에서 정보수집 임무수행 중 납북된 미 해군 정보함인 푸에블로호
호주해안에서 정보수집하는 중국 해군의 정보함
동중국해에서 정보를 수집하는 미 해군 정보함과 중국간의 신경전

5.3. 해군 해상정찰대(NRU소속 UDU)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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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의 과거 북파공작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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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DT가 부대 창설 이후로 북파공작이 실행 되었던 시기인 정전 이후 ~ 7.4 남북 공동 성명까지의 기간동안[21] 해군 및 해상침투 북파공작에 있어서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은 부인 할 수 없는 사실이다. 현재 청해부대의 특수작전 수요를 충족하기 위해 청해부대에 검문검색대라는 이름으로 UDT/SEAL 인원들을 보내듯 당시 해군 측 북파공작을 담당하던 해군 첩보부대 또는 해상정찰대로 일컫는 부대(NRU)내 특수작전을 담당하는 예하 부대 5과에 소속된 UDT 요원을 UDU라 불리웠는데 그들은 UDT 교육대에서 B-6(UDT 요원 양성교육) 수료 직후 또는 UDT 부대에서 실무 생활 중 NRU로 인사발령이 나면 NRU소속 UDU가 되는 형태였다.[22] 정확한 정의는 UDT교육을 받아, 수중파괴요원/UDT라는 부가직별을 받고 해군첩보부대(NRU)[23]에서 복무하는 군인이다. 수중파괴요원/UDU는 1971년 UDU자체 교육대에서 UDU1기(17기)가 배출되면서 처음 생겼다. 누군가는 UDT가 NRU로 넘어가서 UDU로 불리면 지금의 UDU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해군에 공식적으로 UDU가 생긴건 1971년 NIU소속 UDU자체교육대에서 교육받고 수중파괴요원/UDU라는 부가직별을 부여받은 군인들이 생기면서 부터다. 1971년 이전에 해군 첩보부대에서 근무하며 UDU라 불리던 인원들은 전원이 진해UDT에서 교육받고 수중파괴요원/UDT라는 부가직별을 부여받은 군인들이었다.[24] UDT에서 NRU(해상정찰대) 5과로 넘어가게 되면 군번이 없어진다는 허무맹랑한 주장이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25] 군번이 없어지려면 '전역'이라는 행정절차가 있어야 하는데 없었으며 해상정찰대 근무 후 UDT로 복귀 하는 인원이 민간인이었다면 다시 '재입대'라는 행정절차가 있어야 해상정찰대 5과(UDU라 칭하던 UDT직별군인)는 군번이 없다는 설, 민간인 신분이라는 설이 사실이겠지만 '전역'과 '재입대'라는 행정절차가 전혀 없었다. 단지 '인사발령'에 따라 근무지를 옮겼을 뿐이다.
파일:UDT6기 문00 상사.jpg
파일:UDT6기 문00 상사약력.jpg
문00상사는 수료와 동시에 해상정찰대에 인사이동되어 근무하였으며 후에 수중파괴대로 원대 복귀하여 작전요원, 교관 임무를 수행하였고 수중파괴대에서 상사로 예편하였다.

심지어 1970년 6월 5일 해상정찰대 소속으로 NLL에서 작전중 전사 및 납북된 인원들의 경우 추후 포로, 행불, 전사라는 행정절차를 거쳤으며 이는 공개된 사실이다.[26] 이러한 명백한 기록들을 볼 때 UDT들이 해상정찰대에 배속되어 북파공작을 실행했던 이유는 해군측 북파공작 주무부서인 해군 첩보부대(NRU) 작전계통의 일원화와 인터넷과 같은 정보망이 없던 시절의 보안유지 차원이지, 해상정찰대가 비정규군이여서 제네바협약에 해당안되기 때문에 해상정찰대로 배속된 것이라는 주장은 사실에 반하는 특수임무수행자 보상의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높혀 보려던 시도의 일환으로 나온 엉뚱한 주장일 뿐이다.[27] NRU내 UDU의 인원은 12~20명[28] 선이었는데 전역, 전사, 부상, 기타 등의 이유로 이 밑으로 떨어질때마다 UDT에서 해상정찰대(UDU)로 보충하는 형식이었다.[29] UDT 1기부터 16기까지 해군 수료생 332명중 126명이 NRU 5과(해상정찰대)로 인사발령이 났다.[30] UDU라는 명칭[31]의 유래 및 UDT대원들의 북파공작활동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증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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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FB_IMG_1572794959957.jpg
UDT, UDU 부대장의 진술서
"첩보부대에서 북파공작시 희생된 전사자들 모두 UDT출신들 입니다"
"1960년 UDU 전력강화를 위하여 UDT 6기는 수료자 전원이 첩보부대로 소속변경되었고 그후 70년대 초까지 UDT 작전요원들이 UDU의 훈련강화를 위한 교관요원 및 공작요원으로 전속된 인원도 000명 이나 됩니다"
파일:공작a1.png
파일:공작a.png
수료와 동시에 수료생 전원이 해상정찰대로 발령이 났던 UDT 6기의 故 민O식 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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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DT 10기 故 김O남 중사, UDT 8기 김O춘 중사

71년 UDT 교관진이 통째로 해군 첩보부대로 발령이나 해군 첩보부대원들을 별도로 교육시키기 전까지 해군 내 북파를 위한 특수요원 양성교육은 UDT의 B-6가 유일했으며 또한 육군 첩보부대, 공군 첩보부대 등이 북파공작을 위한 해상침투의 전문성을 향상 시키기위해 UDT B-6를 위탁교육 받았다. 김신조 부대의 1.21사건에 대응하기 위해 대북 응징보복 목적으로 각 군마다 만든 부대들 중 하나인 해병대의 마니산까치부대(MIU) 역시 해군 UDT B-6 위탁교육을 받은 이들 위주로 창설되었다.
특수임무수행자법이 통과 될 당시나 2010년 예비역단체의 보상요구 시위때 까지만해도 정치계, 상급기관들의 눈치를 보느라 UDT부대 내에서는 북파관련하여 현역들에게 입에도 담지 말 것을 명령할 정도로 의도적인 무시로 일관하였으나 몇년 전 부터는 부대내 역사관을 개설하고 북파공작중 전사한 인원들의 이름을 새기는등 스스로 그리고 타부대에 의해 왜곡되어진 자신들의 역사 바로 세우기에 조금씩 전향적으로 나서는듯 하다.[32]

북파공작활동과 관련하여 2010년을 전후로 시작된 UDT/SEAL측의 움직임은 초요과시[33]하며 자신들에 대해 교묘히 조작하여 대중들에게 과대포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부분적이나마 공개되고 있는 기밀해제된 사료의 발굴을 통한 객관적 자료제시, 당시 관련자들의 증언을 통해 실체적 진실을 밝힘으로써 무너진 명예를 찾고자하는 것이라고 한다.
국가를 위해, 사나이 답게 라는 미명하에 세월이 지나도 말을 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는 것을 미덕으로 인식하고 그리 하였으나 돌아온 것은 자신들이 피를 흘려가며 세운 정전 후 시행된 해상 북파공작의 중추적인 공적을 자신들의 것이라 말을 하여도 아무도 믿지 않는 현실과 왜곡된 역사로인해 UDT가 누군가의 하위부류로 조롱까지 당하기에 이르렀고[34]이러한 심각성으로 인해 실추된 명예를 바로 세우기 위한 움직임이라고 한다.[35][36]
UDT/SEAL 역사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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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6월23일 북한 서해 부O항에 정박중인 상류수송선 L.C.U. 납치 및 군관 납치 공작임무를 수행하였으나, 공작자선 노출로 쌍방교전이 발생하여 납치공작자선 1척이 피격되었고 납치조 UDT 6명이 전사하고 나머지 9명만이 연평도로 귀환함.

-전사: UDT 6기 이만석, UDT 6기 강명복,
UDT 10기 김기남, UDT 10기 정종화,
UDT 11기 이 성, UDT 13기 최중석

-귀환: UDT 4기 조기운, UDT 6기 채철석,
UDT 8기 김영춘, UDT 9기 김선수,
UDT 10기 박진호, UDT 13기 권오근,
UDT 13기 최형수,
기정사: 박정열, 지원요원 주계사: 조용두

해군측 최다 북파공작임무(15회)를 수행한 UDT8기 김영춘(61년~70년 군복무) 증언은 다음과 같다.
UDT8기이자 UDU원로인 김영춘에 따르면 북파공작을 수행하던 시기 해군첩보부대 내 해상정찰대 작전요원은 전원 UDT출신이었다고 밝히며 해상정찰대의 인원들을 밝혔다.

생각나는대로 밝힌 당시 해상정찰대의 인원은 다음과 같다. 채O석(문장군), 강O복, 조O철, 이O석(여두목), 김O남, 정O화, 김O태, 최O석, 권O근, 장O재, 권O길, 김O수 그리고 김영춘 본인등이다. 대략 기억나는 인원들은 이와같고 16명이었다고 밝힌다. 비UDT 출신 인원이 북파공작에 참여한 경우도 있었는데 노OO, 허OO의 경우다. 두 인원은 작전요원은 아니었고 주계(취사)였으나 노OO, 허OO은 본인들도 작전에 참가하고 싶다고 지속적으로 밝힘에 따라 두 번 정도 데리고 임무를 수행했다고 한다. 이 두 사람이 당시 작전상 중요한 임무를 수행한 것은 아니고 그때 하달 된 임무 자체가 공작원 호송 임무였기 때문에 보트에 노OO, 허OO을 태우고 호송 임무를 수행했다고 한다.

또한 실제로 해군첩보부대에 작전요원으로 전입한 UDT 출신들처럼 실제로 북파공작을 했던 사람들만 보상받은 것이 아니라 보상법에 해당되는 시기, 해군첩보부대에 복무 했던 인원들 모두가 받았다고 밝힌다. 마지막 북파공작은 1968년 10월을 마지막으로 종료되었고 이는 북한과 합의에 따른 것이라고 밝혔다. 북파공작활동을 하던 시절 작전요원은 UDT가 아니면 받아주지 않았다고 밝혔다.
영상 15:40초부터

사나이김소장 : 그럼 인천(해상정찰대, UDU)에 올라가신 계기는 지원해서 올라가신겁니까?

이강현 특수임무유공자회 부산남부 연합지회장 : 지원이 아니라 차출, UDU는 전부다 차출이야. 지원해서 올라가는거 아니야. 그 당시에는 중앙정보부 이런데서도 직접 차출해서 뽑아가고 또 UDU선배들이 딱, 보고 일 할만한 사람들 뽑아갔다고.[37]

사나이김소장 : 그때는 팀출신(UDT)들로 해가지고.....

이강현 특수임무유공자회 부산남부 연합지회장 : 그렇지. 전부 다 팀출신들로 해가지고... 그러니까 팀출신이 6기생부터, 이걸 알아야돼. 6기생부터 16기까지 팀출신(UDT)들이 UDU 왔다갔다 했다고. 왔다갔다 하다가 16기 이후에 17기 부터는 UDU 자체에서 교육을 시켜가지고....

(중략)

이강현 특수임무유공자회 부산남부 연합지회장 : 그 당시에는 UDT에서 훈련을 UDT, UDU 따로따로 시킨게 아니라 교육을 받다가, 수업하고 난 다음에 한 팀 인천(해상정찰대, UDU)으로 보내고, 한 팀은 UDT로 보내고 그랬지.

UDU 근무 이력이 있는, 미군에서 정년퇴직을 한 UDT 1기 한학준의 진술
영상 4:17초부터

한학준 : 사실, UDT에서 UDU가 나간거지. UDU는 사실 될 수가 없어요. UDU는 원래 Unit거든.[38]Unit는 Team보다 몇배 커야 돼요. 몇개 팀 합해서, 3개 Team 합해서 UDU[39]가 되는데 우리가 교육받을때(미국 해군 UDT)[40] 그렇게 받았거든. 근데, UDU가 그렇게 되지 않거든요. 몇백명 안됩니다. 몇천명도 안 되고, 몇십명도 안 돼요.

사나이김소장 : 진해에서 UDT교육을 시키고 동해, 서해 해가지고 3개가 나오니까, 그게 합해지면 UDT팀이 3개 팀이 있으니까 UDU가 된다.

한학준 : 그럼, 팀이 3개란 말이야. 1팀(진해), 2팀(서해), 3팀(동해) 3개가 합해서 UDU가 되는거에요. 그렇게 UDU를 만드는거에요. 그게 UDU에요.

사나이김소장 : 처음에 기획 할 때는 동,서해(UDT팀을) 만드는걸로 기획을 했었습니다.

(중략)

한학준 : 이름 뭐 붙일까 그러다가 아, 우린 UDT출신 아니냐! UDU라고 한거야. 그래서 UDU가 된거야.

사나이김소장 : 근데 그 사람들(6.25때 첩보수집)은 UDU가 아니잖습니까? 정보부대지.

한학준 : 아니지. 정보부대지.

사나이김소장 : UDU라는건 UDT를 받은, 1960년 6기생부터 말을(UDU) 한건데.
2021년 10월 29일 사나이김소장이 김영춘 UDU경북지회장[41]과의 대화영상을 업로드하였다.
영상 1분 32초부터

김영춘 UDU경북지회장 : 원래 창설이 UDT출신들이 창설을 했고, UDU를 그후, 그훗날은 인원을 보충하게 되면 전사를 당하던지 제대를 하던지 하고 나면 인원이 모자르면 UDT에서 차출해 올리는거야 전부 UDT에서. 그 필요한 사람을 거기서 차출을 해가지고,

(중략)

김영춘 UDU경북지회장 : 그런데, 뭐? 저거는, 저거가 뭐했다고?

사나이김소장 : 그러니까, 실제 UDU라는게 이제 우리 UDT선배들이 가서 UDU라는 명칭을 사용하면서 대북작전을 다 했는데 그 사실을 부정하는거지 말입니다.

김영춘 UDU경북지회장 : 잠깐만 가만히 있어봐 내가 얘기할게 지금 회장(UDU)하는 사람이 UDT출신이가?

사나이김소장 : UDU입니다. 71년도에 따로 만들어져서 UDT교육을 시킨 UDU인데 선배님 말씀처럼 우리 UDT선배님들이 대북작전한 그 덕으로 자기들은 대북작전 해본적도 없으면서 보상받고 있는데 UDT선배들이 작전 한 것을 자기가 중앙회장이라는 사람이 부정하는거지 말입니다. UDT선배들이 한 것이 아니고, 그건 일부 1~2명 섞여있던거고 따로 자기들이 한 것처럼

김영춘 UDU경북지회장 : XXX XX
두 번째 영상 7:49부터

김영춘 UDU경북지회장 : (임무수행중 전사한 후배, UDT 13기 최중석을 생각하면)지금도 여기 마당에 들어오는 것 같다... 그만큼 사랑을 많이 했는데...

5.4. UDU가 UDT의 정예집단인가?

파일:60년대후반udu.jpg
과거 수료생을 비롯하여 퇴교생, 단기교육과정 이수자들을 해군 정보부대(현재 UDU로 불림)로 보냈다. 김신조1.21사건 이후 퇴교생과 단기교육과정 이수자들을 대거 보내어 1968년 즈음의 UDU엔 수료생보다 퇴교생과 단기교육과정 이수자들이 더 많았다고 한다. 사진은 해군 정보부대원들이 UDT 해마 상징의 모자를 쓰고 있는 모습이다.
1971년 UDU자체교육대가 창설되기전의 UDU는 진해 UDT에서 교육받은 UDT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60년대 후반 무렵, 인원이 부족하자 수료생을 비롯하여 퇴교생과 따로 단기과정을 모집하여 양성한 단기 비정규 UDT교육이수자들도 UDU로 보내기 시작했다. 해군 최다 북파공작 수행자인 UDT8기 김영춘 UDU경북지회장에 따르면 퇴교생이나 단기 비정규 UDT교육이수자들은 임무수행에 참여시키지 않았다고 밝힌 바 있다.(당시 UDU멤버를 열거 할 때 UDT정규과정 수료자를 제외한 인원들은 UDU로 거론도 하지 않는 것으로 볼 때, UDU로 생각하지 않는듯 하다. 오히려 취사담당 2명은 거론했다.) 회고영상 링크

또 1968년 UDT14기 수료생은 본인이 인천(UDU)으로 올라갔더니 퇴교생과 단기 UDT교육이수자들이 UDT수료생보다 더 많았고 심지어 수영도 능숙하게 못하는데 어디가서 14기라고 하고 다녀서 기분이 좋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회고영상 링크

따라서 북파공작이 수행되던 시기이자 UDU의 구성이 전원 UDT들로 구성되어 있던 시절 당시 임무수행하던 진짜 UDU들은 UDT의 정예라고 평가 할 여지가 있을 수 있겠으나 그러한 사전전제가 없다면 1960년대 후반 무렵부터는 UDU가 UDT수료생 뿐만 아니라 UDT퇴교생, 단기 비정규 UDT교육이수자들도 있었기 때문에 UDU가 UDT의 정예집단이라 말 할 수 없다.

북파공작 당시 해군 첩보부대에 배속된 공작원(UDU)들은 UDT에서 교육받은 군인들이였고
해군 첩보부대가 71년부터 UDT교관단을 끌어가 자체교육 시켜 내려져 온 UDU라 일컬어지는 부대와 UDT는 태생(교육과정)이 다른부대이다. 해군 첩보부대에 배속된 UDT출신 공작원들을 같은 선배로 두었을 뿐이다.
항간에는 UDU가 UDT의 정예집단이라는 낭설이 있다. 그 낭설의 근거에 대해 확인을 확인해보자.

1. “UDU(Underwater Demolition Unit)이고 Unit은 한 개인을 의미하기 때문에 Team으로 움직이는 UDT(Underwater Demolition Team)보다 정예이다”라는 주장.
이야 말로 어처구니 없는 주장이다. 모든 특수부대는 기본적으로 팀으로 움직이며 그렇게 편제되어 있으며 UDU 또한 예외 없다. 또한 Unit에 대해 사전을 찾아보면 Unit의 군사적 의미는 특정 임무를 위한 부대라 되어 있다. 스타크래프트와 같은 게임에서 처럼 어떤 한 개인이나 병력을 의미하지 않는다. UDU를 제외하고 부대명에 Unit를 사용하는 부대는 SSU(해난구조대)와 SOU(경찰특공대) 등이 있다.

2. “UDT에서 UDU로 인사발령이 나기 때문에 UDU가 UDT보다 정예집단이다” 라는 주장.
이는 사실이 아니다. 1971년 부터 UDU라 공식적으로 명명된 지금의 정보사령부 해상특임부대에 UDT대원이 선발되어 인사발령 나지 않는다. UDU대원들이 자체적으로 양성되기 전, UDT대원들 일부가(대략 3분의 1) 정보사령부 해상특임부대의 전신 해군첩보부대 해상정찰대에 인사발령 났던 것이 사실이다. 그게 뭐가 달라? 라고 의문을 품을 수 있는데 이는 엄연히 다르다. 정보사령부 해상특임부대(UDU)의 전신 해상정찰대는 자체적인 특수요원 양성프로그램이 없었다. 그래서 해군은 UDT에서 막 수료한 인원이나[42] UDT에서 생활하고 있는 인원중 일부(약 1/3) 해상정찰대로 배속 시켰고[43] 그 배속된 인원들이 해군 첩보부대(NRU)와 구별되고자 스스로 UDU라 칭했다.[44] 17기부터는 교육과정이 분리되면서 인사교류 또한 현격하게 줄었다. 분리된 교육과정을 받고 UDT, UDU에서 생활 중 UDU로 가거나 UDT로 간 사례가 있으나 극히 적다. 70년대 들어서 남북화해 분위기로 인하여 상호간 무장공작원 파견이 급격히 줄었고 1972년 7.4남북 공동성명으로 인하여 북파공작이 중단되었다.

즉, 북파공작이 수행되던 시절의 해상정찰대(UDU) 작전요원은 해군 첩보부대라는 북파공작 주무부대에 배속된 UDT교육을 받은 인원들이었던 것이다. 만약 당시 해군 첩보부대에 자체적인 특수요원 양성프로그램이 존재 했고 자체양성된 해상정찰대 대원들과 선발과정[45]을 통해 선발된 UDT 인원들이 같이 해상정찰대 생활을 했다거나 혹은 현재 예전처럼 UDT 한 곳에서 UDT, UDU같이 교육 시키고 20명이 수료하면 1등에서 10등 까지는 정보사 해상특임부대(UDU) 11등에서 20등까지는 UDT로 배속되는 구조라면 부대 계보상 해상정찰대의 명맥을 잇는 지금의 UDU(정보사령부 해상특임부대)가 UDT보다 정예집단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해상정찰대 작전요원들은 해군 첩보부대(NRU)소속의 UDT 교육을 받은 인원들[46]이었을 뿐이고 교육성적이 좋거나 수료를 한 인원들만 해상정찰대에 간 것이 아니다.

NRU에 배속되어 NRU 소속이지만 NRU와 다른 정체성과 자부심이 있었던 그들이 NRU와 UDT를 합쳐 UDU라 스스로 명명한 것이라는 해상정찰대에 근무했던 UDT(해상정찰대 UDU)의 진술이 있다. 당시 해상정찰대로 간 인원들과 안가고 본대에 남은 인원들간 엘리트 시시비비 문제는 어디까지나 당시 UDT 교육을 이수한 자들간의 내부 사정이지 당시 존재하지도 않았던, 1971년부터 UDT 교관들을 통해 자체 양성된 지금의 정보사 해상특임부대(UDU)가 UDT의 정예집단이라는 근거가 될 수 없는 것이다.[47] 또한 UDT에서 해상정찰대로 갔던 인원들이 UDT 교육 성적이 좋았던 인원들이였거나 UDT내에서 엘리트로 인정받는 인원들만 간 것이 아니라는 당시 복무자들의 진술 또한 존재한다.

6. 베트남 전쟁 참전

1965년 대한민국 해군 수송전대인 '백구부대' 소속으로 베트남 전쟁에 파병되어, 함정의 안전을 위해 수중암초 및 수중장애물 제거, 수색 등 해군 수송 지원임무를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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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상 수송작전과 더불어 함정마다 승조한 특수부대(UDT) 대원들은 안전항해에 필수적인 장애물의 제거 작전을 수행하였고 주월미군사령부의 특수부대(SEAL Team)와 연합으로 전개한 민족해방전선의 벙커에 대한 파괴작전을 비롯하여 폭발물처리반(EOD)의 수중탐색 작전과 부비트랩 제거 작전을 수행하였다.[48] 또한 백구부대 소속의 UDT 인원들은 메콩 델타 수색작전에도 참여하였다.
월남전에 참전했던 UDT 9기 출신에 따르면 미국 SEAL팀, 월남 UDT와 연합 매복작전 등을 수행했다고 한다.

7. NLL에서의 대북작전

그간 전방 함대[49]에 파견되어있는 UDT/SEAL 부대들은 단순히 함대의 작전을 보조하거나 단순히 함정전력을 제외한 함대의 육상전투력 및 경비 차원의 파견으로만 알려져 있던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또한 근래들어 언론의 취재와 국방부의 공개로 그들의 파견목적이 무엇인지 공개되었다. 전방 파견부대들의 작전은 정부가 공개를 하지 않으며[50] 피치못하게 상대방측(윗동네)에서 공개하는 바람에 공개되는 경우, 언론사에 우연히 포착되어 공개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언론에 일일이 공개되고 있지는 않지만 실제로 NLL을 월선하는 북한의 군, 민간 선박들이 상당히 많다고 한다.[51] 이에 대한 1차적 대응은 아측 해군 함정이 경고방송, 경고사격 등을 실시하여 NLL 이북으로 퇴거조치하며 이에 불응하거나 불순한 의도가 있는 것으로 판단되면 UDT 요원들이 직접 VBSS작전[52]을 한다고 한다. 접적해역에서 UDT 요원이 무기를 들고 저항하는 신원미상의 사람을 참교육했다는 카더라는 해군에서 군생활을 했던 사람이라면 한번쯤 들어 봤을 수도 있는데 이는 카더라가 아니라 실제다.[53][54]전방함대 장병들과 함께 접적해역에서 대한민국 안보를 위하여 지금 이 시간에도 작전하고 있다. 통계 참고.
파일:0003252006_001_20191107163919701.jpg
사건과 무관하게 국회 예결위에 참석한 청와대 관계자가 JSA 장교로 부터 받은 문자를 보던중 언론사 기자에게 딱 포착되어 사건의 내막이 공개 되었다.
육상에 DMZ가 있다면 해상에는 NLL이 있다. 동영상 초반부에 나오는 상황은 충돌상황이 아닌 귀순의도를 가지고 남하한 경우이며 당시 상황을 북한 보위부 출신인 귀순자의 입장에서 대략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8. 아덴만 여명 작전

항목 참조.

9. 그 외

1983년 부산 다대포 해안에 침투하는 간첩선 탐색, 1993년 서해훼리호 여객선 구조, 1996년 강릉 및 1998년 속초 해안으로 침투한 북한 잠수함 내부 수색작전, 2002년 한일 월드컵때 발생한 제2연평해전참수리 357호정 인양시 폭발물 탐색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파일:20090519230814.jpg
박정희 대통령의 경호작전 지원을 나간 UDT 대원들[55]

10. 기타

10.1. 기수가

매 기수마다 만들어지는 사가(비공식 군가)인 UDT 기수가(期數歌)들 중 일부는 타군 부대에도 전파되었다. 예를 들어 지금도 불리는 '해병수색대가'와 '특전사 해척조 사가'의 원조는 해군 UDT 13기 기수가이다. '고무보트 울러 메고 파도를 헤치고 나가면 상어 떼도 기뻐 날뛰고 산호초 춤춘다…' 이런 유명한 가사가 들어있다. 당시 히트했던 봉봉 사중창단의 '육군 김일병'이라는 노래를 개사하여 UDT 13기 기수가로 만들었던 것인데, UDT 기수가들 중에 가장 인기가 많아 위탁교육생들에 의해 타군 부대로 전파된 것이다.
어~머니 아~버지~ 날곱게 길~러~서
UDT에~ 보내려~고 이자식길렀~습니까
악마같~은 훈련~에도 이몸은 살아왔건만
보트~메고 훈련~하~는 올챙이 용~사~라~오

심 굴궂은 교관놈들 한테 기합도 많이 받았소
배곱프고 졸리워~서 난정말 못살~겠어요
악마같~은 지옥~주도 이몸은 살아왔건만
24~주만 지나고나~면 개구리용~사라~오

- UDT 지옥주가
내고향 처녀들은 나를 반겨 주는데
하루에도 열두 번씩 가고싶은 내고향
에헤야 가다못가면 데헤야 쉬어나가세
베르베르 치마저고리 사가지고 오세요

강남갔던 제비는 다시돌아 오는데
한번갔던 우리님은 아니돌아 오시네
에헤야 가다못가면 데헤야 쉬어나가세
말썽많은 이세상을 누굴믿고 사나요

앞집에 처녀는 시집을 가는데
뒷집에 총각은 목을메러 간다
에헤야 가다못가면 데헤야 쉬어나가세
호박같은 이세상을 둥글둥글 삽시다

- UDT 1기가[56]
양말도 없는 몸이 내복은 있을쏘냐
떨어진 슈트 입고 동해, 서해, 남해로다
바닷물만 철썩철썩 UDT 울리는데
정든친구 왜버렸나 UDT 신세

- UDT 8기가
수중 훈련 6개월의 UDT 용사
해마를 새겨 달고서 뽐내는 UDT
체조 수영에는 투덜대지만
영자 식사에는 용감한 UDT
고무보트 울러 메고서 파도를 헤쳐 나아가면
상어떼도 기뻐 날뛰고 산호초 춤춘다

TNT C-3를 가슴에 안고
부수고 파괴하는 용감한 UDT
헤이 브라보 UDT 후야!

- UDT 13기가[57]
사나이 대장부 가는 길
두 길이 있을쏘냐
UDT 용사들 가는 길
오직 한 길 뿐이다
하늘과 바다와 저 푸른 강토도
UDT 아니면 누가 지키랴
조국에 바친 몸 수중파괴대

- UDT 24기가
돌진하자 UDT 거센파도 타고서
우리들은 사나이 피를 나눈 사나이 UDT
해마떼 가는곳에!(해마떼 가는곳에!)
나설자 누구냐!(나설자 누구냐!)
UDT 가는곳에!(UDT 가는곳에!)
싸울자 누구냐!(싸울자 누구냐!)

악마같은 UDT 깡다구에 UDT
우리들은 사나이 무쇠같은 사나이 UDT
해마떼 가는곳에!(해마떼 가는곳에!)
나설자 누구냐!(나설자 누구냐!)
UDT 가는곳에!(UDT 가는곳에!)
싸울자 누구냐!(싸울자 누구냐!)

- UDT 25기가
야! 불사의!(불사의!) 해마떼!(해마떼!)
수중!(수중!) 파괴대!(파괴대!)

사나이의 의리 속에 굳게 뭉친 용사들
악마 같은 훈련에도 이겨 왔노라!
강철 같은 사나이가 모인 UDT
젊음 바쳐 내 조국 위해 싸워 나가자. 가자!
가자! 파도뚫고, 가자! 적진으로 가자!
선봉부대 수중파괴대

- UDT 28기가[58]
보아라 용맹스러운
불굴의 사나이다
투혼의 드높은 의지
통일을 이룩하리
성난파도 힘차게 헤쳐가는 헤마떼
바다의 쾌남 UDT
지옥의 사자 수중파괴대 차!
피끓는 젊음의 정열
비켜라 물러서라
UDT 스쳐가는 곳
오직 승리뿐

- UDT 30기가
사나이 불 같은 젊음을
푸른 바다에 바치고
장부의 웅지, 조국의 통일, 민족의 평화를 위해
보트메고 황혼을 등진 불사의 UDT
어둠을 뚫고! 파도를 넘어!
적진을 돌파하리
한번 품은 큰 뜻을 굳게 지키며
지옥 같은 훈련을, 이겨온 UDT

- UDT 38기가
우리가 함께 쏟아부었던 땀과 눈물들
서로를 채찍질하며 몰아쉬던 턱숨들
거친 파도와 싸워나가는 우리는 무적 해마떼
세계 최강 사나이들 지옥의 용사
나가자 거친 바다로 우리는 무적 해마떼
대한의 평화를 위해 오늘도 피땀 흘린다
오늘도 피땀 흘린다

- UDT 46기가
지옥 같은 훈련과 끝없는 도전 속에
사나이 UDT는 바닷속을 헤맨다
고무보트 울러매고 성난 파도 넘고 넘어
적진으로 돌진한다
해마떼가 가는 길에 불가능이 왠 말이냐
우리에겐 승리뿐이다
사랑하는 부모형제 조국과 겨레 지키려
이 한목숨 다 받쳤다 세계 최강 UDT

- UDT 53기가
야아! 길을 비켜라 UDT 나가신다!
아악! 소릴 높여라 우리가 UDT다!
패!배는 없다 백전백승 오직 승!리!뿐!(승!리!뿐!)
독품은 사나이 뜻을 뭉친 우린 U!D!T!(U!D!T!)
노래하세!(노래하세!) 헤쳐가세!(헤쳐가세!)
성난 파도 넘어! 피를 뿌릴 순간을 기다려왔다!
차.차디찬 파도속에! 치가 떨려도!
어금니 꽉 깨물고! 헤쳐 나가는 악바리 용사들!

- UDT 60기가
악! 가자 62기!(62기!)
우리들은 지옥의 사나이 UDT 용사!
자! 보트메고 파도를 뚫고!
자유대한의 평화를 위해!
오늘도 피똥싸며 훈련을 한다!
아야!(아야!) 후야!(후야!)
악바리와!(악바리와!) 깡따구로!(깡따구로!)
오늘도 살아간다!
우리가 바로 작살나는 UDT SEAL!

- UDT 62기가
아아!(아아!) 나가자!(나가자!) 바다로!(바다로!)
우리가 UDT다! 악! 보아라!(보아라!)
당당한 이 모습! 그 누가 우리를 막을쏘냐! 악!
길을 비켜라! 지옥의 용사! 63기가 나가신다!
악!(악!) 악!(악!) 악!(악!) 후야!

- UDT 63기가
우리는 잘 웃지도 속삭이지도 않지만
보트에 맺은 정은 갯벌의 향기에 비기리오
깎아지는 수직의 암초도 무서운 파도도
UDT 앞길을 가로막지 못한다네
군함의 휘항한 불빛도 아가씨들의 웃음도 좋지만
UDT 오늘도 바다로 간다네

- UDT 64기가
드넓은 가슴! 새까만 얼굴!
내가 바로 사나이란다
자장가 대신! 지옥주를 부르는!
내가 바로 UDT란다

악에 받친 나의 목소리
고향 땅에 울려 퍼지리
언젠가는 돌아갈 고향
사랑하는 님은 기다려

드넓은 가슴! 새까만 얼굴!
내가 바로 사나이란다
자장가 대신! 지옥주를 부르는!
내가 바로 UDT란다

- UDT 65기가[59]
악바리의 사나이들 가슴팍에 휘장 달고서
악마 같은 파도 뚫고 67기 나가신다
밤바다를 무대삼아 달빛을 조명으로
고무보트 울러메고 지옥을 헤쳐나간다
SEa. Air.(악!) Land.(악!) 우린
불가능 따윈 모르는
회색 베레 해마복에
그 이름은 UDT란다
우리가 UDT란다!
Hooya!

- UDT 67기가
헤이~ 육군! 배낭 메는 육군!
느그는 배낭 메고 따라와! 우리는 UDT의 아들들!
헤이~ 해병대! 총알받이 해병대!
느그도 배낭 메고 따라와! 우리는 UDT의 아들들!
헤이~ 공군! 날지도 못하는 공군!
느그도 배낭 메고 따라와! 우리는 UDT의 아들들!
헤이~ UDT! 짠내 나는 UDT!
느그는 물 처먹고 따라와! 우리는 특전사의 아들들!
헤이~ 특전사! 탄피나 훔치는 특전사!
느그는 탄피 들고 따라와! 우리는 UDT의 아들들!
우리는 UDT의 아들들! 후야!

- 테크 2기가[60][61]

11. 관련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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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작전기밀 제58호[2] 원래 장교 13명, 부사관 16명, 병 103명 총 132명으로 편성되었으나, 실제로는 지휘부 21명, 각 소대 23명 씩 4개 소대로 총 113명으로 편성되었다. 다만, 1981년 특수공작대로 개칭되기 전까지 단 한번도 완편된 적은 없다.[3] 해본기밀 제1762호, 단기 4287년, 서기 1954년 6월 19일[4] UDT/SEAL의 창설 당시 명칭이 수중파괴대였다는 점을 근거로 UDT는 해군의 공병부대라는 잘못된 정보가 퍼지기도 했으나 한국 UDT는 창설 기획부터 미국 UDT를 모델로 하였고 미국 UDT 교육과정을 수료한 인원들로 창설되었기 때문에 창설 당시부터 공병부대와는 다른 성격의 부대였다. 실제로도 당시 한국 UDT는 부대차원에서는 북파공작을 위한 요원 양성을 담당했고 UDT요원은 북파공작을 실행했던 만큼 이러한 주장들은 명백히 사실이 아니다. 즉 처음부터 해군 특수작전을 위한 부대였다. 현재는 스쿠버가 대중화 되어있지만 당시엔 스쿠버는 군대가 아니면 어디서 배울 수도 없는 초고도의 기술 그 자체였다.[5] 해사 5기, 美 UDT 11기, 해군 대령 예편[6] 해변대라고 불리기도 했으며, 상륙지원대 개념으로 해병대가 상륙하기 전 해당 지역 침투, 정찰 및 첩보수집, 적 군사시설 파괴, 선견특수작전 임무를 기본으로 수행했다. 당시 해병수색대의 주 임무는 서부전선의 임진강 및 사천강 갈대숲지 등 북한 간첩의 침투 루트로 이용되기 쉬운 취약지역에 대한 수색정찰 및 매복 감시 작전이었으므로 사실상 현재의 해병수색대의 임무를 해안대(`60년 2월 해변단으로 명칭 변경) 수중파괴대가 담당하고 있었다.[7] 육군, 해병대, 공군[8] 실무생활을 하다 UDT에 지원한 현역부사관이 아닌, 민간에서 UDT 부사관을 지원한 자[9] 김00 소령 본인이 블로그에 밝힌 군 복무 약력에 따르면 수색 교육과 해군 UDT 18기 위탁교육을 수료하였으며 해병 수색대장 역임을 비롯하여 해병 북파부대였던 MIU에서 복무, MIU의 해체 이후엔 해군 UDU에도 복무했다고 밝히고 있다.[10] 육군 첩보부대장을 역임한 박복규 예비역 대령 회고.[11] UDT 1기가 교육받던 1955년은 휴전 된지 얼마 안된 시점으로 북측의 해안경계가 정비 되지 못했기에 아직 완벽하지 못한 교육생들이 임무를 성공 할 수 있었다. 시간이 흘러 점차 북측의 경계가 정비되었고 나중엔 작전에 실패하기도 하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1968년 부O항 공작이다. 이 작전에서 UDT대원 6명이 전사했다.[12] 어두운 격실에서 헤드셋을 끼고 소리를 듣던지 레이더 화면을 주시하거나 통신실에서 근무하는 직별[13] 현재는 인공위성이나 고고도정찰기, 드론, 고성능의 통신감청 장비로 사람이 직접 들어가지 않고도 임무를 수행 할 수 있고 꼭 사람이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중국 보따리상, 조선족, 탈북자들을 포섭해서 일하면 되지만 당시엔 중국과 교류도 없었기에 결국 우리가 직파하는 방법 밖엔 존재하지 않았다.[14] 1960년[15] 해군 해상정찰대[16] UDT 6기는 수료생 전원이 수료 즉시 해군 해상정찰대로 발령이 났는데 이 부분에 관해선 UDT, 정보사 해상 양측 모두 이견이 없다.[17] 해군 북파공작 최다수행자인 UDT8기 김영춘 UDU경북지회장의 진술에 따르면 부대운영상 인사명령을 거부하면 거부할 수 없는 '특명'으로 다시 인사명령을 냈다고 진술한 바 있다.[18] 71년부터는 UDT교관단을 끌어와 자체 교육시킨 특수요원들을 운용 중이며 현재 UDT와 그 부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19] 대한민국 육군지상정보여단(2018년 창설), 대한민국 해군해양정보단(2022년 개편), 공군항공정보단(2017년 개편)[20] 1995년 창설[21] 공식적으로 북파공작은 1972년 7.4 남북 공동 성명을 기점으로 중단되었다. 다만 공동성명 이후에도 북파를 실행한 정황이 있으나 정부에서는 부인하고 있다. 그만큼 남북공동성명 이후 실행된 것으로 보이는 사례는 전군 통틀어 몇건 밖에 안될 정도로 극히 적으며 남북공동성명을 기점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분위기를 엿볼 수 있는 회고록 참고.[22] 이처럼 본래 UDU라는 명칭은 NRU 5과에 배속된 UDT 요원을 가리키는 용어였으나 1971년, 해군 첩보부대의 개편과(1971.5.5. 국방부령 제216호) 자체적인 특수요원양성을 시작하게 됨에따라 이때부터 해군 첩보부대를 UDU라고 통칭하게 되었다.[23] 후에 NIU로 개칭[24] 현재는 부가직별이 아닌 특전이라는 대분류 직별이 생겼고 UDT교육을 수료한 군인에게 특전이라는 직별이 부여된다. UDU 또한 특정이라는 직별이 생겼다.[25] 해상정찰대는 엄연히 대한민국 해군 소속의 군부대였으며 구성원 또한 현역 해군이었다. 해상정찰대 5과는 다른 특수전부대와 마찬가지로 첩보부대 예하 비정규전수행 정규군부대이지 절대 민간조직, 민간인이 아니다. 당시 북파공작을 수행하던 부대들 중에는 분명 민간인으로 구성된 곳도 있었다. 그들은 각 지역 소규모 안전가옥에서 훈련을 받거나 임무를 수행했으며 일정기간이 지나면 사회로 다시 나왔는데 신분이 민간인이었기에 다시 정식으로 군입대를 해야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러나 해상정찰대는 아니다. 누군가 UDU가 비정규군(민간인)이라 주장한다면 이는 잘모르고 하는 말이거나 명백한 거짓이다.[26] 인사 930-713호(75.7.18), 감사 140-597호(75.9.16) 국방부 인사국 《해군 OOO 승조원 인사처리》(1975.10.20) 《해군예비군원령철》승조원들은 제네바협약에서 정의하는 포로의 개념에 해당되기에 포로로 간주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결론, 전사처리 및 현충원 봉안에 대한 유가족의 동의를 얻어 승조원 20명중 18명이 전사처리되었다.(반대 1, 무연고자1)[27] 해군 현역군인이 부대를 옮긴다고 민간인이 된다는 엉뚱한 주장을 누가 믿겠냐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 상당히 많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UDT대원들이 NRU안에서 NRU대원들과 차별화를 꾀하기 위해 UDU라 자칭하며 해상정찰대에서 근무를 한 것이다. 당시 NRU 내 UDU구성원은 전원이 UDT(UDU)였다.[28] UDT복무중 1963년 해상정찰대로 전출을 가게되었는데 당시 해상정찰대 5과는 12명의 UDT로 구성이 되어 있었다. UDT 8기 권OO 증언.[29] 해군의 북파특수공작 관점에서 요원양성 및 인력풀은 UDT, 작전은 NRU 5과라고 보면 이해가 쉽겠다.[30]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들은 북파공작이 이뤄지던 시기 해상정찰대의 특수요원이 12~20명 선이고 NRU 5과의 작전요원은 전원 UDT며, UDT 전체인원 332명중 해상정찰대 근무인원이 126명이라는 사실, 해군 특수요원 양성교육은 UDT의 B-6밖에 없었다는 사실들에 주목해야 한다.[31] 현용 UDU마크는 1975년에 UDT 12기 김OO이 만들었다.[32] 그때보다 인터넷 정보망이 훨씬 더 발달되어 숨기려해도 숨길 수도 없거니와 왜곡되어진 자신들의 부대역사에 대한 자성론도 일었기 때문으로 보여진다.[33] 招搖過市 남의 이목(耳目)을 끌도록 요란스럽게 하며 저자거리를 지나간다는 뜻으로, 허풍(虛風)을 떨며 요란(搖亂)하게 사람의 이목(耳目)을 끄는 것을 비유(比喩ㆍ譬喩)하는 말[34] 정전 후 북파공작이 실행되던 시기 해군측의 북파공작원은 UDT에서 교육을 이수한 인원들이 해상정찰대로 배속 되어 북파임무를 수행하는 형식이었고 이와 같은 경로의 인원들이 절대다수 였다. 이런 사실은 해군 첩보부대 부대장을 역임한 인물을 비롯하여 당시 근무자들이 증언하고 있다. 해군 첩보부대에 자체적인 특수요원 양성교육이 생긴건 1971년이고 북파가 종료된 시점은 1972년이다. 청해부대 검문검색대에 UDT/SEAL이 인원을 보내고 있는데 나중에 청해부대에 자체적인 검색대 요원 양성교육이 생기고 그 이후부터 UDT/SEAL이 청해부대로 인원을 안보내게 됐다고 해서 아덴만 여명작전이 청해부대 자체 양성 검색대 요원들이 수행한게 되는건 아니다.[35] 비슷한 직무, 같은 직무를 수행한다거나 결과적으로 추후에 통폐합 흡수 되었다고 해서 과거의 타인이 내가 되는 것은 아니다. 비슷한 직무인 임진왜란 당시의 잠수 흑인용병이 UDT의 전신이 아닌 사실은 자명하며 UDT/SEAL이 해군 특전단이 되었고 SSU가 추후에 해군 특전단에 편입이 되었다고 해서 UDT/SEAL의 부대 창설년도가 SSU의 전신 해상공작대(일본에서 선체인양, 선박해체 등을 하던 인원들을 군무원으로 고용하여 창설되었다. 6.25 당시 선체인양 및 구조작전을 수행하였다. 해상공작대의 공작은 통상 대중들이 알고 있는 그 공작이 아니다.)의 창설 년도인 1950년이 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정신적 전통을 계승함을 목적으로 미국 해병대 특수작전연대(Marines Special Operations Regiment)가 2차대전 당시 활약하고 해체되었던 해병 레이더스(Marine raiders)와 똑같은 명칭인 해병 레이더 연대(Marine Raider Regiment)로 변경하였다고해서 지금의 레이더스가 2차대전 당시의 레이더스가 되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누군가 이런식의 주장들을 한다면 그 주장들은 현재의 중국 영토안에서 벌어진 모든 역사와 인물은 중국의 역사이고 인물 또한 원래 중국인이었다는 중국의 동북공정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고구려, 신라, 고려, 조선 당시에 살던 사람들을 당시 그들이 살던 시절에는 존재 자체가 없던 대한민국 사람이라고 하지 않는 것과 같다.[36] 북파활동 인정의 기준을 정규군이냐 비정규군이냐의 차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한국전 당시의 영도유격대와 같이 미국 CIA가 민간인을 모집하여 구성원들이 민간인신분으로 운영되던 부대 정도가 비정규군이라 할 수 있지만 해상 북파공작을 수행한 대부분의 부대는 영도유격대 사례와 달리 해군 정규군이었으며 군인들이었다. 비정규전을 수행하는 정규군은 비정규군이 아니다. 비정규전을 수행하는 정규군일 뿐이다. 비정규군의 사전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비정규군 : 정규군, 경찰 또는 기타 국내 경계 부대에 속하지 않는 무장한 개인 또는 집단.》대표적인 비정규군의 예를 들자면 한국의 서북청년단, CIA의 SAC/SOG나 이라크에서 활동하는 시아파민병대 등을 들 수가 있다.[37] UDT 4기 조OO UDU 초대 동지회장의 진술과 일치한다.[38] 당시 미국 해군 편제상 UDT 3개를 UDU라는 이름으로 묶었고 UDU 3개를 Squadron으로 묶었다.[39] Underwater Demolition Unit[40] 한학준은 미국 해군 UDT교육도 받았다.[41] UDT 8기[42] 처음 모집을 UDT로 하였으나 수료 후 UDT 생활 없이 바로 UDU로 간 인원들도 있고 모집을 UDU로 되어 UDT 교육을 받고 UDU로 간 인원들도 있다.[43] 해상정찰대에서 전역, 부상, 전사, 자신의 원에 의하여 결원이 생기면 수중파괴대로 인원보충요청을하였고 수중파괴대에서는 장교나 선임하사관이 부대원중에 골라 보내거나 공개지원자를 보내기도 하였다. 해상정찰대의 지휘관 또한 수중파괴대 출신이 많았기에 직접 눈여겨보았던 UDT대원을 고르는 경우도 있었다.[44] 해군은 군 특성상 육군과 달리 첩보 및 파괴공작을 수행 할 병력이 UDT를 제외하고 딱히 없다.[45] 델타의 OTC나 데브그루의 그린팀과정 같은 선발과정[46] 모집이 UDT였으나 UDU로 가게 되었건, 처음부터 모집도 UDU였고 UDT 교육 후 UDU로 가게 되었건 모두 UDT 교육대에서 교육을 받았다.[47] 물론 해상정찰대에 한 번 배속이 되었다고 해서 영영 해상정찰대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UDT 근무 중 해상정찰대로 갔다가 다시 돌아온 인원, 수료 후 바로 해상정찰대로 갔다가 다시 UDT로 돌아온 인원들이 존재한다.[48]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베트남전쟁과 한국군》[49] 제1함대제2함대[50] 그런 사실자체를 발표하지 않거나 사실을 발표 하더라도 UDT/SEAL을 언급 하지 않는다. 하지만 전방의 각 함대 지통실, 전방 해군기지에 근무했거나 참수리급 고속정(PKM)에 승조했던 해군들은 누가 직접 나포하는지 알 수 밖에 없다.[51] NLL 월선이라고 검색을 해보면 기사 뜬 사례만 해도 수두룩하다.[52] Visit, Board, Search, and Seizure[53] 전방 파견부대에 근무하다 보면 가끔 중국어선은 물론이고 적 선박 대상으로 실전 경험을 쌓기도 하며 북한 측에서는 어부라고 주장하지만 어부로 위장한 공작원이며 수시로 이런 식의 도발을 한다고 한다. 북한 측에서는 정찰위성이나 고고도 정찰기 같은 정찰감시 자산이 없기 때문에 도발도 할 겸 이런 식으로 공작원을 어부로 위장해 보내 남측에서 어떤 자산들과 인원들이 대응하는지 파악한다고... 그러다 UDT 떡대들에게 이종격투기 교습을 받는다고 한다.[54] 조업한 흔적이 없는 민간선박은 의도가 뻔하고 어부도 아니다. UDT요원이 작전에 들어 갈 때는 당연히 상대는 어부로 위장한 공작원이며 총기와 같은 살상무기를 숨기고 있을 것이다. 라는 최악의 상황을 전제하고 작전에 임한다. 어촌에서 성장했거나 낚시를 취미로 하는 사람들은 잘 알겠지만 공작선이 아니더라도 어부들에게 칼은 필수이며 어선에는 기본적으로 식칼은 나온다. 물론 언제든지 무기가 될 수 있다.[55] 사진을 보면 UDT 대원들 역시 대통령(VIP)과 마찬가지로 편한 복장으로 휴가 중인 것으로 보이는데, 근접 경호 인력이 VIP와 드레스 코드를 맞추는 건 흔한 일이다. VIP가 야구장에 가면 야구장 관중이 되고 시장에 가면 장 보러 나온 부부가 되는 사람들이다.[56] 최희준의 ‘병사의 향수‘가 원곡.[57] 봉봉 사중창단의 육군 김일병이 원곡으로 UDT 교육 매 기수마다 만들어서 부르는 기수가 중에서도 가장 인기가 많아서 UDT 교육에 위탁교육 들어온 타군 요원들에 의해 특전사와 해병수색대 등의 타 부대들에까지 퍼지게 된 대표적인 히트 싸가이다. 특히 해병수색대에서는 '수색대가'라는 제목으로 해병수색대의 대표 군가로서의 지위까지 가지고 있다. 저 기수 당시는 교육기간이 4개월이었기 때문에 원래 가사는 "수중 훈련 4개월의~ " 였으나 그 후 교육기간이 6개월로 정착된 후에는 자연히 저 싸가 가사에서도 '6개월'이라고 바꿔서 부르게 되었다. 2011년 3월 4일 KBS 2TV 금요기획 '우리에게 불가능은 없다 - 세계 최강 UDT/SEAL'에서 대원들이 직접 부르는 모습이 나온다.[58] 미국민요I've Been Working on the Railroad가 원곡. 대원들에게 가장 애창되는 군가 중 하나이다.[59] 나훈아홍시가 원곡이다.[60]네이비 씰의 대표적인 군가 ‘We are the sons of UDT’를 개사해서 만든 노래다. 한명이 독창으로 한마디씩 선창하고 나머지 사람들이 똑같이 한마디씩 따라 부른다. 타군에서 온 위탁 교육생들과 함께 부르며, 중간에 UDT를 풍자한 가사는 타군이 부르고, 답가로 특전사를 풍자한 가사는 UDT만 부른다. 서로 주거니 받거니 센스있게 서로를 풍자하는 것이 특징. 63-2기 인원들이 수료식에서 해당 군가를 부르는 영상.[61] 보통 연 2회차 교육인 테크 2기에 타군 위탁 교육생들이 입교한다. 특전병 교육생들은 테크 1기에, 타군과 타국 위탁 교육생들은 테크 2기에 입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