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독립운동 정당 | ||||
| 민족혁명당 (개별 합류) | → | 한국국민당 | → | 한국독립당 (신설 합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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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국민당 | |
| <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C31919> 영문 명칭 | Korean Nationalist Party |
| 한문 명칭 | 韓國國民黨 |
| 창당일 | 1935년 11월 7일 |
| 해산일 | 1940년 5월 8일 |
| 이사장 | 김구 |
| 후신 | 중경 한국독립당[1] |
| 당보 | 『한민(韓民)』 『한청(韓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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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병무 한국국민당청년단 단원증 |
1. 개요
| 파일:한국국민당 창립 기념.jpg |
| 한국국민당 창립 기념 |
1935년 김구를 중심으로 상해 한국독립당 탈당파가 민족혁명당에 대립해 만든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여당으로 1940년 중경 한국독립당에 다시 흡수됐다.
중경 한국독립당은 기존 조소앙의 재건 한국독립당과 이름은 같되 정체성이 다른데 한반도 밖의 우익 계열 독립운동 정당이 유일 정당화에 성공한 통합 정당이다.
2. 배경
1930년대 중반 민족혁명당에 반대하는 대표적인 단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국민당, 재건 재건 한국독립당, 지청천의 조선혁명당이었다.민족혁명당에 반대하는 세력의 첫 결집은 김구가 중심이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옹호하며 민족혁명당에 가입하기를 거부한 김구는 송병조 등의 임시정부 옹호 세력, 김붕준 등 옛 상해 한국독립당의 광동지부 당원, 한인애국단을 기반으로 1935년 10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무장에 복귀하였다.
김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복귀한 직후인 1935년 11월 하순경, 항저우에서 한국국민당을 창당하였다. 1936년 3월 15일자 기관지인 『한민(韓民)』을 창간하고 활발한 선전 활동을 벌였다.[2] 김구는 자신이 이 시점에서 한국국민당을 창당한 정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5당 통일이 형성될 당시부터 동지들은 단체조직을 주장했으나 나는 극히 만류하였다. 그 이유는, 다른 이들을 통일하자는데 내용이 복잡하여 아직 참가를 하지는 않았으나 내가 어찌 차파 딴 단체를 조직하겠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조소앙이 한독당 재건설을 추진하니, 내가 단체를 조직하여도 통일의 파괴자는 아니며, 임시정부가 종종 위험을 당하는 것은 튼튼한 배경이 없었기 때문인데, 이제 임시정부를 옹호하는 단체가 필요하다 생각하고 한국국민당을 조직하였다.[3]
1935년 말 한국국민당 지도부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창립 선언서에 나오는 한국국민당의 이념은 다음과 같다.
자에 오등은 국가주권의 완전한 광복에서 전민적 정치, 경제, 교육, 균등의 제3 원칙의 신앙을 확립하고 한국국민당을 조직하였던 바, 장래 더욱 성실, 건전, 영웅의 비개인적 정신으로 방황효산 울불한괴한 사람을 일단으로서 도성하고 옥쇄의 귀를 경험하고 와전의 치를 극복하는 대영용무 외의 보조로써 분투매진하고 적의 총세력을 박명하고 완전한 민주공화국을 건설하여 위로는 조선의 광휘를 빛내고, 밑으로는 자손만대의 영예를 발전시킴으로써 세계 각국 민족과 함께 공존공영을 도할 것을 선언한다. [4]
이처럼 한국국민당은 주권을 회복한 이후 '전민적 정치, 경제, 교육 균등의 3원칙' 곧, 삼균주의에 입각하여 완전한 민주공화국을 수립하겠다고 밝혔다. 민주공화국을 세우기 위해서라도 혁명의 제1 대상인 자기가 부속하는 민족의 이해에 따라 민족주의에 입각하여 활동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반면에 과거 민족 운동이 부진한 최대의 원인을 민족주의에 입각해 활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데서 찾았다. 한국국민당이 민족주의를 무척 강조하는 언설을 하였던 점에 눈에 띈다 그러면서 이와 같은 전략적 목표를 달성한 이후 독립 국가의 내용에 대해 「당의(黨義)」에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당의
아등은 오천년래 독립 자주해 온 국가를 이족 일본에 탈취당하고 정치와 유린과 문화의 말살 아래 현재 사멸에 직면하여 민족적 자존을 획득하기 불능하고 세계적 공영을 도모할 방법이 없는 경우에 있다.
자에 본당은 혁명적 수단으로써 구적 일본의 총침탈 세력을 박멸하여 국토와 주권을 완전히 광복하고 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을 기초로하는 신민주공화국을 건설하여서 안으로는 국민 각개의 균등생활을 확보하고 밖으로는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와의 평등을 실현하고 나아가 세계 일가의 진로로 향함
아등은 오천년래 독립 자주해 온 국가를 이족 일본에 탈취당하고 정치와 유린과 문화의 말살 아래 현재 사멸에 직면하여 민족적 자존을 획득하기 불능하고 세계적 공영을 도모할 방법이 없는 경우에 있다.
자에 본당은 혁명적 수단으로써 구적 일본의 총침탈 세력을 박멸하여 국토와 주권을 완전히 광복하고 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을 기초로하는 신민주공화국을 건설하여서 안으로는 국민 각개의 균등생활을 확보하고 밖으로는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와의 평등을 실현하고 나아가 세계 일가의 진로로 향함
삼균주의에 입각하여 민족국가를 건설하려는 전망은 토지와 대량생산기관을 국유화하겠다는 강령에 제시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순수한 자본주의체제를 지향했다고 말할 수 없다. 이는 「당강(黨綱)」 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당강
① 국가주권광복의 혁명적 의식을 국민에게 고취 환기하여 민족적 혁명역량을 총집중할 것.
② 엄밀한 조직 아래 민중적 반항과 무력적 파괴를 적극적으로 진행할 것.
③ 아등의 광복운동을 우호적으로 원조하는 국가 및 민족과 절실히 연락할 것.
④ 토지와 대생산기관을 국유로 하고 국민 생활권을 평등하게 할 것.
⑤ 독립운동에 대한 사이비 불순적 이론과 행동을 배격할 것.
⑥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옹호, 진전시킬 것.
① 국가주권광복의 혁명적 의식을 국민에게 고취 환기하여 민족적 혁명역량을 총집중할 것.
② 엄밀한 조직 아래 민중적 반항과 무력적 파괴를 적극적으로 진행할 것.
③ 아등의 광복운동을 우호적으로 원조하는 국가 및 민족과 절실히 연락할 것.
④ 토지와 대생산기관을 국유로 하고 국민 생활권을 평등하게 할 것.
⑤ 독립운동에 대한 사이비 불순적 이론과 행동을 배격할 것.
⑥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옹호, 진전시킬 것.
「당강」 자체는 독립 이후의 실행 방향과 함께 당장의 실천 사항까지 모두 섞여 있다. 차원과 과정이 다른 목표가 혼재되어 있는 것이다.
아무튼 「당강」에서도 생활권을 평등하게 만들기 위해 토지와 대상산 기관을 국유화하겠다고 내세우고 있다. 상당히 진보적인, 심지어 좌파적인 활동 목표라고 말할 수 있겠으나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에서 제정한 「대한민국 임시헌장」의 정신과 같은 맥락에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민족 유일당 결성 운동,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민족혁명당의 강령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던 기본 정신이다. 단순히 사회주의적이라고 지적하기에 앞서 1920~1930년대 해외 민족 운동, 특히 중국 지역 민족주의 운동에서 흔히 찾을 수 있는 지향점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에 방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 주류 민족주의 운동의 중심 사상이자 특징이다.
3. 활동
『한민』 창간호의 창간사에서 활동의 기본방향을 아래와 같이 명시하였다.
적을 박멸하기 위해서는 혁명적 수단 뿐이다. 우리들은 적에 구걸하여 광복할 수도 없다. 적에게 청원하여 생존권을 획득할 수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혁명적 수단으로 적을 박멸시켜 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을 기초로 하는 민주공화의 완전한 독립국가를 건설하지 않으면 행복한 생활은 불가능하다.
여기에 말하는 혁명적 수단이라 함은 혁명적 의식이 강고한 동지들이 하나의 깃발 아래 총집중하여 엄밀한 조직하에서 민중적 반항과 무력적 파괴를 적극적으로 진행하는 것을 말한다. 무력적 파괴에 관한 적극적인 지향은 앞서 언급한 「당강」 제2항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규정은 다른 단체에서 볼 수 없는 한국국민당의 독특한 지향이라 할 수 있는데, 무력적 파괴를 적극진행한다는 점은 한국국민당의 기본 행동강령이다 최대강령인 「당강」에 밝히고 있을 정도로 강력한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이는 김구의 한국국민당이 기본적으로 한인애국단 등에서 젊은 피를 수혈하고 있었던 현실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무력적 파괴를 적극 진행하는 규정만을 놓고 보면, 한국국민당은 상대적 대중지향적인 활동과 대중투쟁을 조직하기보다는 소수의 투사 중심으로 조직을 운영하며 투쟁을 구체화하는 방침에 가깝다고 볼 수 있겠다.
한국국민당이 말하는 파괴적인 무력 행동이란 테러 행위와 무장 투쟁이라고 볼 수 있다. 전자의 행위를 구체적으로 전개한 구체적인 사례가 1930년대 중후반경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물론 한국국민당의 조직에는 테러 행위를 전담하는 기구가 별도로 있지 않았다.
대신에 이와 유사한 외곽 조직은 있었다. 1936년 7월, 한국독립군 특무대를 대신하는 조직으로 한국국민당 청년단이 결성된 것이다. 1934년 12월, 애초 김구는 부하 청년들을 규합하여 정보수집과 특무공작을 담당하는 한국독립군 특무대라는 조직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1936년 1월 초 김동우를 따르는 대원들이 이탈하면서 부득이 한국독립군특무대를 해산할 수 밖에 없었다. 한국국민당 청년단은 이를 대신하여 만든 조직이다.
청년단은 7월 11일 창립선언에서 작금의 혁명 운동이 외적인 요인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혁명 의식이 부족하고 봉건적 폐습과 허영, 태만하고 의타적이면서 망동하는 내재적 요인 때문이라도 지리멸렬한 상황에 빠져있다고 진단하였다. 그들은 그렇다고 이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40여 년간 투쟁을 혼 김구 선생의 영도를 받아 그의 정신과 사업을 계승하기 위해 조직을 결성하였다고 밝혔다. 창립선언에서 밝힌 구로에 따르면 일본제국주의를 우리들의 철권으로 박멸하자, 내지전야에 들어가자, 반동사상과 파벌괴를 청소하자, 모든 타락적 경향을 방지하자, 모든 반동조직을 방지하자고 하면서 우리들의 영수를 옹호하자고 제기하였다. 청
한국국민당 청년단은 1936년 8월 27일, 기관지로 『한청(韓靑)』을 발간하였다.[5] 이 밖에 문서활동으로 「백범 김구 선생의 환력을 축하한다.(8.27)」, 「국치기념일 선언(8.29)」, 「건국기념절 기념(10.3)」이 있었다. 청년전위 조직에는 청년단 이외에도 광둥성에서 민족혁명당 지부를 붕괴시키는 활동을 전개한 이후 광저우에서 1937년 2월 초, 결성된 한국국민당 청년전위단이 있었다.[6]전위단은 기관지로 『전선(前線)』 창간호를 1937년 2월에 발행하였다.
한국국민당의 파괴력 무력 활동의 하나는 무장 투쟁이다. 그러나 한국국민당이 직접 무장 투쟁을 한 적은 없다. 다만, 이를 위한 준비를 일환이기도 했던 청년군사훈련을 실시한 점은 이와 관련된 대표적인 활동의 하나였다. 1935년 2월 난징에서 조직한 학생훈련소가 그 보기라고 할 수 있다.[7]
학생훈련소는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에 입교시킬 한인청년을 모집하여 미리 예비 군사 교육을 실시할 목적으로 설치한 기구이다. 학생훈련소는 1935년 10월 경까지 30여 명이 있었으며, 학생들은 매월 10여원의 급여를 받으며, 중국어와 기하, 대수 등의 학과 교육과 함께 정신교육을 받았다. 일부 대원은 김구의 지시에 따라 상하이, 간도, 국내로 출발하였는데, 그 성과나 활동 내용을 파악하지 못하였다. 일제 정보 자료에 따르면 학생훈련소는 11월경까지 존속했는데 그때까지 일제의 정보망에 노출되어 여기저기 이동해야 하였으며, 일본과의 대외 관계를 중시한 장제스의 정책으로 훈련조직을 유지하기 곤란한 점이 많았다.
학생훈련소 대원들은 한국국민당이 결성되자 모두 가입되어 한국국민당 특무조직인 한국국민당 청년단의 핵심 인자로 성장하였다. 한인애국단원과 더불어 이들 대원들은 민족 운동 과정에서 김구의 구상을 구체화할 수 있는 전위 분자였고 김구의 영향력을 유지시켜주는 인적 기반이었다. 처언단의 김구에 대한 충성심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4. 민족 운동 세력과의 연대
한국국민당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옹호하는 입장에 공통분모를 갖고 있던 사람들끼리 결성한 단체이다. 민족혁명당이 창당되었을 때 합류를 거부한 중대한 명분 가운데 하나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킨다는 점이었다. 反민족혁명당 세력에게 대한민국 임시정부 옹호는 그들이 함께 활동할 수 있는 명분이고 버팀목이었다.한국국민당은 『한민』 창간호의 창간사에서 당시 민족 운동의 지형을 아래와 같이 보고 있었다.
현재 우리 진중에는 수종의 도깨비가 출몰하고 있다. 첫째로는 우리 민족의 역량이 부족하기 때문에 적의 양행 아래 합법적 운동을 계속하여 계급적으로 독립운동에 성공할 수 있다고 하는 사설을 유호하고 영원히 적의 노예가 되려고 하는 자이다. 이 부류에 속하는 망령배는 해외에서 비교적 희소하다. 또 용이하게 그 정체를 은닉할 수 없기 때문에 그 해독을 받는 자가 오히려 적다. 그러나 가장 위험한 것은 우리 진중에 잠복하여 역사적으로 체계적으로 우리 전선을 혼란시키며 막대한 독소를 끊임없이 방사하며 민족 운동의 가면을 쓰고 조국광복의 병풍 뒤에서 통일의 나팔을 불면서 실은 전민족을 끌어 적로의 괴뢰가 되도록 하려는 망령배이므로 우리들은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국민대표회로 하여금 통일을 가장하고 민족 진영을 파괴하더니...지금은 또 이와 같은 수단으로 대활동을 계속하고 있다.[8]
여기에 말하는 1936년 당시 민족 진영을 파괴하는 집단이란 민족혁명당을 가리킨다. 한국국민당은 민족혁명당이 사회주의 소련의 괴뢰 집단이라는 이유로, 다른 하나는 통일 전선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으로 민족 운동 세력을 분열, 파괴시키고 있다는 이유로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파괴의 보기로 일본에서의 신한회, 북만주에서의 신민부, 남만주에서의 국민부가 이들 독소 때문에 소멸되었음을 들었다.
1936년 11월에 열린 한국국민당 제2차 대회 때 발표한 「선언」에서도 "무슨 주의, 무슨 사상을 외치"는 현상 때문에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라고 하면서 연대 활동의 기본방향을 아래와 같이 제시하였다.
진정한 주의로 통하고 확실한 사상을 파악한 자에 대하여 우리는 쓸데없이 우리와 동일하자고 강조하지 않는다. 상호 각각 신뢰하는 바를 향하여 나아갈 뿐, 어떤 경우 동일한 목표를 향하여 동일한 길을 걷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그들이 우리와 다를 때는 우리는 그들에 대하여 우리와 동일하라고 강력하게 요구할 필요를 인정하지 않는다. 만약 그들에게 요구할 일이 있으면 그것은 그들에게 우리들의 현실을 능히 이해시키며 쓸데없이 비방하지 않는다고 말할 뿐이다.
같은 이념과 공동의 목표를 갖고 있는 집단이라 할 지라도 민족혁명당처럼 굳이 통일 정당을 만들지 않겠다는 것이다. 한국국민당은 민족주의 세력을 결집시켜 효과적인 항일투쟁을 하기 위해 각 단체를 자체를 강화하고 전투력을 왕성하게 향상시키는 한편, 민족 구성원 공통의 이해 문제와 일제에 대한 "전로에 관해 각 단체 협조하여 양을 확대하는 것"이 긴급한 현안이라 보았다. 결국 단체별로 각개 약진하면서 일제와의 투쟁에 대해서도 협력을 확대해 가자는 주장은, 통일된 항일단체의 결성이 시기상조라는 입장을 말한 것이다. 달리 말하면, 한국국민당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라는 통일된 최고 지도부가 있는데, 굳이 정당을 통일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인 것이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한국국민당을 중심으로, 김구를 중심으로 한 통일정당이 결성된다면 두 개의 통일 조직이 병렬하는 모양새가 되는 것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라는 통일 지도부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또 하나의 통일 지도부가 있게 되는 형국은 결국 둘 중 하나의 해체 논의로 발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5. 의의
한국국민당 결성은 중국관내의 사회주의 운동 세력에 대항할 수 있는 민족주의 운동 세력, 범위를 좁혀 말하면 대한민국 임시정부 폐지론에 대항할 수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옹호 세력의 중심 축이 다시 세워졌음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김구가 중국 국민당의 재정지원을 바탕으로, 1932년부터 육성된 청년 군인들을 인적 기반으로, 단순히 상징적인 존재이자 명망있는 민족주의 운동의 지도자로 한정하지 않고 쟁쟁한 원로들이 결집되어 있는 관내 지역에서 민족주의 운동 세력의 실질적인 리더로 자리 잡을 수 있는 확실한 정치적 기반을 가지게 되었다.6. 역대 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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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복 이후 | |||||
[1] 1940년 재건 한국독립당, 한국국민당, 조선혁명당의 3당 합당[2] 『한민(韓民)』은 1938년 4월 3일자 발행된 제17호까지 확인된다.[3] 김구(도진순 주해), 『백범일지』, 돌베개, 1997, 358쪽[4] 김정명 편, 「1935년의 중국에 있는 불정조선인의 부정책동상황」, 『조선독립운동』II, 546~547쪽[5] 『한청(韓靑)』은 1937년 6월 15일에 발행된 제2권 4기까지 확인되고 있다.[6] 1937년 9월 초 한국국민당 청년전위단은 한국국민당 청년단으로 해소되었다.[7] 이에 대해서는 한상도, 『한국독립운동과 중국군관학교』, 문학과 지성사, 1994, 338~345쪽 참조[8] 사회문제자료연구회 편, 「쇼와 11년 2월 그 이후로(以降) 중국에 있는 불령선인단의 상황」, 『사상정세시찰보고집』 3, 148~14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