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독립운동 정당 | ||||
| (창당) | → | 한국독립당 | → | 민족혁명당 (흡수 합당) |
| | |
| 한국독립당 | |
| <colbgcolor=#f5f5f5><colcolor=#050F4B> 영문 명칭 | <colbgcolor=#fff,#010101>Korea Independence Party (KIP) |
| 한문 명칭 | 韓國獨立黨[1] |
| 약칭 | 한독당 |
| 당수 | 지청천 |
| 전신 | 혁신의회(북만주) |
| 후신 | 민족혁명당[2] → 조선혁명당(1937년) → 한국독립당(1940년) |
| 당군 | 한국독립군[3] |
1. 개요
1930년 만주 지역에서 지청천을 주축으로 창당된 항일 독립운동 정당.2. 역사
2.1. 만주사변과 무장투쟁
1931년 만주사변으로 독립전쟁의 환경이 크게 변화한다. 독립전쟁이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항일을 내걸고 중국의 항일의용군 또는 중국민중과 손을 잡는 것이 가능해졌다. 북만주의 한국독립당[4]은 만주사변 이후 일제에 대해 본격적인 무장투쟁을 벌이기로 결정했다. 1931년 10월 5일에 열린 한국독립당 긴급중앙위원회의에서는 일제의 침략이 만주에 그치지 않고 중국 관내 등 다른 지역까지 미치는 것은 물론 세계대전으로 확대될 것으로 예견되는 상황에서 중국군과 대일 공동작전과 전개하는 것이 독립을 쟁취할 수 있는 유력한 방법이라는데 대한 집중적인 논의가 이루어진다.이 의결되었다. 이로써 한국독립당의 당군으로 한국독립군이 출범한 것이다.
한국독립당의 결의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국독립군은 처음부터 지린성의 항일 중국군 부대와 합작을 적극 추진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한국독립군의 간부들은 일제가 일으킨 만주사변을 계기로 만주에서 항일을 위한 한중 연대의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판단했다. 더 나아가 만주사변이 더 큰 규모로 세계 전쟁으로 확산될 경우 독립의 가능성이 더 커질 것이기 때문에 중국과 함께 일제의 만주침략에 맞서 싸우는 것이야 말로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최선의 방법이라 생각했다.
2.2. 중국인들의 차별과 부정적인 인식 극복
그렇지만 한국독립군이 처음부터 중국과 연대에 적극적으로 나선 데는 이러한 이유 외에도 현실적인 이유가 존재했다. 뿌리 깊은 중국인의 한인 차별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한국독립군만의 독자적인 투쟁이 아니라 중국인과의 연대투쟁이 필요했다. 만주사변 직전에 일어난 만보산 사건을 계기로 재만 한인에 대한 중국인의 적대의식은 한참 고조되었다. 특히 만주사변 이후에 한인이 '일제의 앞잡이'라는 인식이 중국인 사이에서 더 확산되면서 만주 곳곳에서 한인에 대한 살해, 납치, 재산강탈, 방화사건이 폭증했다. 의병장으로 유명한 허위의 일족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이상룡의 손부가 남긴 증언을 인용해보자만주사변이 터졌다....... 중국이 일본에 쫒기면서 퇴병들의 작패가 심했다. 봉천성, 지린성을 일본이 함락하자 그들은 더욱 기승을 부리며 들끊었다. ......우리 집에 와서는 사다리 위에서 흙을 바르던 남편을 끌어 내려서 목을 천장 대들보에다 매달았다. 그리고는 "너희가 왜 일본을 끌어들여 우리나라를 뺏기게 하느냐?"고 하더니 "우리도 너희들을 죽이겠다."고 했다. ..... 금테 두른 이가 쫒아왔다. "이 집은 그러지 말라. 조선 독립운동하는 집이니 우리가 해칠 수 없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겨우 위기를 모면하고 생명을 건졌다. [5]
세상이 다 아는 반일 독립운동가의 집안조차 일제와 동일시되거나 일제의 앞잡이로 몰릴 정도였으니 보통의 한인이야 더 말할 나위조차 없었을 것이다. 이와관련해
만주사변으로 인하여 제일 먼저 참화를 당한 자는 벽지에 거주하는 조선농민이었다...... 일본을 미워하는 지방민의 반감은 접근하여 잇는 동포들의 신변에 몰리아....무지한 토민들과 합작한 흉악한 도적들은 주야의 별(別)이 없이 주택에 침입하여 의류, 금침(衾枕:이불과 베개), 금품을 약탈하고 인명의 상해까지 내었다.....전만의 조선인 피난민은 통계상으로는 3만 여명이라고는 하나 실상은 7~8만에 달하였다.[6]
중국 측은 한교(한국교민)을 샤오뀌즈(小鬼子)라고 오해하여 작당하고 한교 부락을 습격하여 가구, 농작물 등을 탈취하는 등 일본에 대한 한풀이를 한교에게 하였다.[7]
라는 기록도 만주사변 이후 중국인이 재만 한인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 보여준다. 한국독립당도 예외는 아니었다. 보기를 들어 1932년 11월 아청(阿城)에서 열린 한국독립당의 단군 찬신 기념대회에 참석한 한인들이 중국군인들로부터 '일본군의 선견대'로 몰려 폭행을 당하였다. 한국독립군이 지방 조직을 갖추고 있던 무장도 몰수를 당했다.[8] 한인을 일제 침략의 앞잡이라고 보는 시각이 엄존하는 상황에서 무장투쟁을 벌이기 위해서는 중국군과 연대가 반드시 필요했다.
그리고 한국독립군은 초창기만 해도 병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전투를 벌이는 데 반드시 필요한 무기와 식량도 턱없이 부족했다. 한국독립군이 처음에 합작하려고 한 대상은 지린자위군(吉林自衛軍)이었다. 지린자위군은 일본군의 하얼빈 공략을 저지하는데 성공한 리두(李杜), 딩차오(丁超), 펑잔하이(馮占海) 등의 중국 항일 의용군 부대가 1932년 1월 31일 조직한 연합부대였다. 지린자위군은 이후 약 1년 동안 일본군 및 만주국군과 북만 일대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2.3. 한중연합군으로의 항일전투
1931년 11~12월에 걸쳐 한국독립군 간부들은 지린자위군 산하의 중동철도호로군(中東鐵道護路軍)사령관 딩차오 및 제 3군장 카오펑린(考鳳林)과 합작에 관한 협의를 벌였다. 그 결과 '한 중 양군은 어떤 열악한 환경을 막론하고 장기 항전을 맹세한다. 중동철로를 경계로 하여 서부 전선은 중국군이 맡고 동부 전선은 한국군이 담당한다. 한 중 양군의 전시 후방 교련은 한국군 장교가 부담하고 한국독립군의 소요 일체 군수 물자는 중국군이 공급한다."[9]는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1932년 11월까지는 지린자위군과 연합해 북만 일대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그 결과 1932년 9월에는 하얼빈 부근의 군사적 요충지인 썽성보(雙城堡)전투에서 패전한 뒤 지린자위군과의 연합에는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일본군과 만주군의 토벌 앞에 고봉림 부대가 일시적으로 일제에 투항하기 결정하자 한국독립군은 활동이 곤란한 북만주 대신에 동만주(옌지延吉, 왕칭汪淸, 뚱닝東寧, 훈춘珲春, 닝안寧安)으로 옮겨 지린구군군과 합작할 것을 결정했다. [10]1932년 2월 초 봉기한 왕더린의 지린구국군이 동만에서 한때 큰 기세를 올렸기 때문에 한국독립군은 큰 기대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독립군이 동만으로 이동을 결정한 직후인 1932년 12월 간도임시파견대의 대공세로 지린구국군은 거의 궤멸 상태로 빠졌도 왕더린은 시베리아로 도주했다. 이에 우이청(吳義成)이 왕더린을 대신해 총사령대리로 야오진샨(姚震山) 시세영 등의 잔존부대를 이끌고 동만의 산악지대에서 항일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었다. [11] 따라서 구국군으로서도 쌍성보 전투 등을 통해 전투력이 입증된 한국독립군과 합작이 반가울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한국독립군은 1933년 1월 지린구국군의 야오진샨 부대와 손을 잡고 중한토일연합군(中韓討日聯合軍)을 편성했다.[12] 이후 한국독립군은 6월까지 경박호(鏡泊湖) 전투, 사도하자(四道河子) 전투, 동경성(東京城) 전투 등을 치르며 큰 전과를 올렸다. 그리고 시세영 부대와 함께 대전자령 전투를 치루면서 한중 연대의 가장 가시적인 성과를 낳는데 성공했다.
2.4. 결말
대전자령 전투 이후 동만에서 일본군의 토벌이 격화되었다. 일제는 관동군은 물론이고 간도임시파견대 훈춘지대까지 동원해 대규모 토벌 작전을 폈다. 전투기까지 동원한 토벌이었다. 한국독립군은 장기 항전을 위해 간부들과 앞으로 만주에서 재개될 무장투쟁의 중심이 될 소수의 기간요원들을 중국 산해관 내로 이동하고 나머지는 분산해 산악지대로 들어가 유격전을 전개한다는 방침을 정했다. 만주에 잔류한 한국독립군 유격지대의 이후 활동에 대해서는 최악(崔岳)과 함께 잔류부대를 이끌고 밀산으로 이동하던 안태진이 적과 교전하던 중 전사했다는 것 말고는 현재까지 확인된 바는 없다.한국독립군 간부들은 1933년 말, 만주를 떠나 중국 관내로 이동한다. 만주사변을 계기로 무장투쟁을 벌였으나 일본군이 만주을 장악하고 1932년 4월 15일 만주군을 창설하면서 만주에서 활동은 힘들어졌다.
장기적인 전망 아래 중국 관내(산해관 이남의 중국본토)에서 1932년 4월 29일 훙커우 공원 의거이후 중국국민당 장제스위원장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원과 한인장교 육성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하여 중국중앙군관학교에 입교하고 한국광복군에 창설하게 된다.
1935년 7월 5일, 중국 관내 민족혁명당에 통합정당에 합류했었다. 그러던 중 김원봉과 의열단계의 독주로 인하여 1935년 9월 25일, 3개월 만에 조소앙을 중심으로 한국독립당 계열의 6명은 민족혁명당을 탈당하고 한국독립당(1935년)을 재건한다.
3. 기타
- 한국독립군 간부들이 관내 이후에도 만주에 한국독립군의 잔존 세력이 존재했단 것은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2000년대 초만해도 국립현충원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묘역에 있는 지청천 묘소에 "일제에게 빼앗긴 나라와 민족의 존엄을 찾고 민족의 자주적 독립을 위하여 만주벌 눈보라를 헤치면서 왜적과 함께 싸웠던 당신의 병사 양지권, 양춘식, 양춘산 씨의 외손자, 김요셉, 중국 헤이룽장성 무단장지구 하이린시"라는 명문이 새겨진 화병과 조화가 놓인 적이 있었다. 이 명문에 존재하는 「양지권, 양춘식, 양춘산」이 만주에 남은 한국독립군의 부대원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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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독립당(임시정부)와는 별개의 정당으로 동명이당이 있음[2] 민혁당 중심의 통합정당운동으로 지청천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일부 요인들과 합류하게 된다.[3] 1933년 이후, 산해관내로 재집결[4] 한국독립당에 대해서는 박환, 「재만 한국독립당에 대한 일고찰」, 『한국사연구』 59, 1987 ; 장세윤, 「한국독립군의 항일무장투쟁」, 『한국독립운동사연구』 3, 1989등을 참조[5] 허은,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 민족문제연구소, 2010, 156~158쪽[6] 최형우,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 동방문화사, 1946, 46~38쪽[7] 채근식, 『무장독립운동비사』, 창문각, `1978, 161~162쪽[8] 『신한민보』, 1933년 12월 18일 「동북통신 한국독립군과 중국의용군의 연합항일실기」[9] 一靑, 「'九一八'後韓國獨立在中國東北殺敵略史」, 『光復』 제 2권 제 1기, 53쪽 ; 조경한, 백강회고록. 한국종교협의회, 1990, 95~96쪽[10] 一靑, 「'九一八'後韓國獨立在中國東北殺敵略史」, 『光復』 제 2권 제 1기, 55쪽 ; 채근식, 『무장독립운동비사』, 창문각, 1978, 174쪽.[11] 1933년 초, 구국군의 편제는 총사령 우이청, 참모장 저우바오종(周保中) 1로 사령 우이청, 2로 사령 저우바오종, 3로 사령 야오진샨, 4로 사령 시세영으로 짜여 있었다.[12] 「韓國獨立軍與中國義勇軍聯合抗日記實」, 『혁명공론』 1권 4호, 1933, 66~6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