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10-11 22:58:15

한국독립당(1935년)

한국독립운동 정당
민족혁명당
(개별 합류)
한국독립당 한국독립당
(신설 합당)
1. 개요2. 상세3. 역대 당수4. 둘러보기

1. 개요

1935년 조소앙을 중심으로 재창당한 항일 독립운동 정당.

2. 상세

민족혁명당을 탈당한 조소앙 등은 한국국민당의 창당보다 조금 앞선 1935년 9월, 한국독립당을 재건하였다.[1] 다만, 재건 한국독립당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여당이 아니었으며 이 시기의 여당은 김구가 이끄는 한국국민당(1935년)이었다.

재건 한국독립당이 밝힌 「당의」는 아래와 같다.
오등은 5천년래 독립 자주해 온 국가를 이족 일본에게 탈취당한 이래 정치의 유린과 경제의 파멸, 문화의 말살하에서 사멸에 직면하고 민족적으로 자존하기 불능하고, 세계적으로 공영을 도모하기 어려운 경우에 있다.
자에 본당은 혁명적 수단으로써 구적 일본의 모든 침탈 세력을 박멸하여 국토의 주권을 완전히 광복하고 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을 기초로 하는 신민주국가를 건설함으로써 안으로는 국민 각개의 균등생활을 확보하여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의 평등을 실현하고 나아가 세계일가의 진로로 향한다.

이처럼 한국독립당은 혁명적 수단 곧, 무장 투쟁으로 일제가 물리치고 주권을 회복한 이후 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을 기초로 하는 신민주국가를 건설하겠다고 밝혔다. 또한 아래와 같은 「당강」도 제시하였다.
① 대중의 혁명의식을 환기하여 민족혁명역량을 총집중할 것
② 엄밀한 조직 아래 민중적 반항과 무력적 파괴를 적극적으로 진행해야 할 것.
③ 세계 피압박 민족의 혁명단체와 연락을 취할 것.

재건 한국독립당은 관념상으로만 보면 대일 적극 투쟁이었지 실력 양성을 우선하는 그룹이 아니었다. 삼균주의에 입각한 정치 이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민중적인 언사를 동원하여 자신의 정치적 지향을 표현하기도 하였다. 달리 말하면 조소앙 등은 이념의 차이 때문에 민족혁명당을 탈당했다고는 주장하지만, 민족혁명당의 「당의」, 「당강」과 재건 한국독립당의 「당의」, 「당강」은 일제로부터 독립과 사회주의민족주의 국가를 지향했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차이가 없었다. 탈당 이유는 정당한 명분이 아니었다.

오히려 6인의 탈당은 민족혁명당 창당 과정에서 상하이 한국독립당의 대표로 나섰던 조소앙이, 당이 결성된 이후 이렇다 할 직위를 확보하지 못하는 등 당내 위상이 격하된 것과 더 연관이 있었을 것이다. 의열단 계열의 독주와도 깊은 연관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두 요인이 원칙의 문제가 아니라 운영의 측면을 어떻게 개선하느냐와 더 밀접히 연관된 것이었다. 결국 한국독립당이 비록 창당을 선언할 때, 자신들과 정치적 견해가 같은 세력과 결합하겠다고 했지만, 이미 결성 당시부터 결합을 위한 행보의 첫 번째 기준은 입장의 문제가 아니었음은 민족혁명당 탈당에서 보여 준 것이다.

탈당한 이후, 조소앙 등의 행보를 보면 어느 정도 정황을 유추할 수 있다. 즉, 민족혁명당을 탈당한 조소앙송병조, 차이석을 끌어들여 김구를 견제하고 한인애국단 계열을 제외한 채 두 사람을 비롯하여 김구와 경쟁적 관계에 있던 사람들과[2] 연합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장악하는 한편, 민족혁명당 반대 세력의 중심에 서려고 하였다. 그렇지만 송병조, 차이석은 소수파로 전락하여 제대로 된 활동을 하지 못하는 곤란한 처지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어려훈 상황을 타개하고 부흥을 위해 김구의 재정지원과 김구 계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참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조소앙이 끝까지 김구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참여를 반대하자 그와의 연합보다 김구와의 제휴를 선택한 것이다. 이로써 조소앙은 반민족혁명당 세력의 주도권을 잡는데 실패하였으며, 오히려 민족주의 운동 계열 내에서 소수파로 전락하였다. 반(反)민족혁명당 세력은 김구를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당시 김구 등은 조소앙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대한민국 임시정부한국국민당(1935년)은 장차 조소앙과의 결합을 염두에 두고 국무위원보다 낮은 자리인 임시의정원 상임위원에 임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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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건 한국독립당(1935년)상하이 한국독립당 시기에 발간했던 기관지 『진광(震光)』을 복간하지 않은 것 같다. 이 밖에 「건국기념선언(1935.10.29.)」, 「제 17주년 3.1절 기념선언(1926.3.1.)」, 「한망 26주년 통신(1936.8.29)」등의 선언문을 발행하였으나 선전 활동이 활발한 편이 아니었다. 조직 상층 간 연합에 실패하고 이것과 연동되어 있는 자금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서 실질적인 선전 활동을 벌이기는 무리였을 것이다. 더구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하려는 작업에 실패한 이후에도 조직 활대 작업은 그다지 성과가 없었다. 오히려 박창길, 문일민은 민족혁명당 가입을 권유 받았고, 한국국민당을 탈당한 김동우도 끌어들이지 못하였다. 더구나 재건 한국독립당은 중국인들로부터 자금 지원을 얻는데도 실패하여 재정적으로 대단히 어려웠다. 재건 한국독립당이 한국국민당(1935년)이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접근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3. 역대 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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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송병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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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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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외: 한국독립당(196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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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독립당은 한시준, 「충칭 한국독립당의 성립배경 및 과정」, 윤병석 교수 회갑기념 논총간행위원회 편, 『한국근대사논총』, 지식산업사, 1990 ; 조범래, 「재건 한국독립당 연구」, 『한국독립운동사연구』 5,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1 참조. 언급상 필요할 때는 이 시기의 한국독립당을 '재건 한국독립당'이라고 표시하겠다.[2] 송병조, 차이석은 김구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함으로써 그의 계열이 영향력을 확대하는 데 우려하고 있었다. 차이석에 대해서는 장석흥, 『임시정부의 버팀목 차리석 평전』, 역사공간, 2005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