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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기의 정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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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 정보 | |
이름 | 헌법의 벗 결사단 |
원어 이름 | Société des Amis de la Constitution |
배경색 | 파란색 |
지도자 | 라파예트 후작 질베르 뒤 모티에 |
선행조직 | 클뢰브 데 자코뱅 (일부) 1789년 애국회 |
창당 | 1791년 6월 18일 |
해산 | 1792년 6월 10일 |
스펙트럼 | 중도 ~ 우파[1] |
이념 | 온건주의 (자유주의 보수파) 입헌군주주의, 앙시앵 레짐 반대, 온건 보수주의, 고전적 자유주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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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어: Feuillants Club불어: Club des Feuillants
한국에서는 '푀양' 혹은 '푀양파'라고도 한다. 프랑스 혁명기의 정파 중 하나였다. 왕정시대에는 자유주의 혁명을 지지했고 바렌 사건과 테르미도르 반동 이전 시기에는 군주의 권위를 옹호한 보수주의적 태도를 보였다.
공화파 빅 텐트 정당인 클레브 데 자코뱅과 달리 입헌군주제를 지지하는 온건파라서 내부 이견이 심하지 않았다. 그래서 자코뱅과 달리 정당(클레브 조직)이자 동시에 정파로도 간주된다.
2. 역사
본래는 프랑스 혁명을 이끌었던 진보좌파들의 일원으로 1789년 애국회와 일부 클뢰브 데 자코뱅의 일원들이 창당했다. 왕실이 오스트리아로 튀려고 시도한 바렌 사건 이후 급진적 공화파들이 자코뱅을 점령하자 1791년 탈당해서 새 살림을 차려서 만든 정당이 클뢰브 데 푀양이다.창당 초기에는 지롱드당 등 온건적 공화파들과는 우호적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다가 1792년 경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 반대했던 푀양파쪽 외무대신이 지롱드당에게 고발당해서 파면됨으로써 관계가 틀어지게 된다. 클뢰브 데 푀양의 공식 해산일은 1792년 6월 10일이지만 실질적인 해산일은 8월 경으로 보는 학자들도 많다. 이후 지롱드를 포함한 공화파들에 의해 철저하게 탄압당하게 된다.
3. 지지 세력
라파예트 후작 질베르 뒤 모티에가 당을 이끌었으며 후기에는 지롱드파에서 전향한 앙투안 바르나브가 중심이 되었다. 이외에도 알렉상드르 드 라메트, 아드리앙 뒤퐁 등이 핵심 인사였다. 루이필리프 조제프 도를레앙과 함께 혁명을 지지한 귀족들, 부르주아 내 보수파들의 주 지지를 받았다. 진보적인 부르주아들은 공화파인 지롱드파를 지지했다.[1] 좌우의 분기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중도파냐 우익이냐 논쟁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이들이 훗날 부르봉 왕정복고~7월왕정 시기에 중도좌파적 자유주의~진보오를레앙주의자가 된다. 여담으로 당시에는 중도우파라는 용어가 없었으므로 중도우파로 적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