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4 14:14:31

포브스 버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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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아나 협동 공화국 초대 총리
가이아나 협동 공화국 제2대 대통령
포브스 버넘
Forbes Burnham
파일:IMG_9644.jpg
<colbgcolor=#C08F1B><colcolor=#ffffff> 본명 린든 포브스 샘슨 버넘
Linden Forbes Sampson Burnham
출생 1923년 2월 20일
영국령 기아나 조지타운
(現 가이아나 조지타운)
사망 1985년 8월 6일 (향년 62세)
가이아나 조지타운
재임기간 제2대 대통령
1985년 8월 6일 ~ 1985년 8월 6일
학력 런던 대학교
신체 188cm
정당 [[인민국민회의|
인민민족회의
]]

1. 개요2. 생애3. 평가4. 여담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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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이아나의 초대 총리이자 제2대 대통령.

2. 생애

포브스 버넘은 1923년 2월 20일 영국령 기아나조지타운에서 태어났다. 1947년 영국 런던 대학교에서 법학 학사 학위를 졸업했고 이후 법조인으로서 가이아나에서 활동을 하게 된다.

1946년 영국령 가이나 노동당에 입당하엿고, 1949년에 당대표로 선출되었다. 이후 1950년에 PAC와 합병하여, 인민진보당의 창당 주역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인민진보당은 1953년 총선에서 승리하였고, 버넘은 교육부 장관직에 오르게 되었다. 인민진보당은 강경한 좌파성향의 정책을 펴게 되지만, 곧 영국의 압력으로 정권을 상실하였다. 이 와중에 당내갈등이 일어서 인민진보당은 두개로 분당되었으며, 버넘은 인민국민회의의 당수가 되었다. 이에 따라 기존 인민진보당은 인도계를 대표하게 되었고, 인민국민회의는 흑인을 대표하는 정당이 되었고, 양당제를 구성하게 된다. 1961년 선거에서 인민진보당이 승리했지만, 득표율은 근소하였고, 이후 1962년 폭동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고, 버넘은 이 과정에서 가이아나가 공산화될까 걱정하던 영국과 미국 당국의 지원을 얻었고, 1963년에 가이아나 노총 위원장 자리에 오르게 된다.

1964년 총선은 인종폭동이 난무하는 극심한 혼란속에 치러졌다. 가이아나 의회 선거제도가 소선거구제에서 비례대표제로 변경되면서 인민진보당은 득표율의 상승에도 과반확보에 실패했고, 인민국민회의는 보수정당인 권력연합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하여 총리직에 올랐다. 1966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직후 초대 가이아나의 총리로 취임했다.

버넘은 총리로 취임하자 마자 국가안보법을 통과시키며, 반대파를 탄압할 구실을 마련했지만, 여전히 선거에서 불리한 입장에 서있었다. 이 당시 가이아나에서 흑인은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미국과 협상해서 흑인들의 이민을 도모하였지만, 이는 실패하였다. 결국 버넘은 총선에서 게리맨더링과 부정선거를 감행하였으며, 이는 1968년 총선을 시작으로 하여 1985년 총선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었다. 1970년 가이아나가 공화정으로 전환되자 버넘은 본격적으로 사회주의적인 노선을 걷게 되었다. 버넘은 아프리카 국가들과 유대를 강화하였고, 1974년 소피아 선언을 계기로 하여 산업 국유화를 단행했다. 또한 협동조합의[1] 활성화 정책을 시행했고, 외교적으로는 북한중국공산 국가들과의 관계를 중시하였다. 이후 1978년 인민사원 집단자살 사건이 터지면서 미국과의 외교 관계가 악화되기도 하였다.[2] 그러나 국유화 정책은 썩 성공적이지 못하였으며, 인도계 주민들이 버넘에게 불만을 품으면서 가이아나 인구감소의 원인이 되었다. 1980년 개헌을 통해 가이아나의 제2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3] 이후 1985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3. 평가

가이아나독립과 경제자립을 주도했던 국부라는 평가와 사회주의적 경제 정책으로 인해 장기적으로 경제에 악영향을 끼쳤고[4]볼리비아보다도 가난한 남미 최빈국이었을 정도였다. 그나마 2016년 석유가 발견되어 현재는 선진국에 준하는 수준으로 진입한 상태이며, 유사 사례인 적도 기니와 달리 가이아나는 민주주의 국가라 권력층이 석유를 독점하고 국민들은 최빈국 수준 삶으로 연명하는 기형적인 경제 체제가 될 일은 없다.] 가이아나 내부의 인종 갈등[5]을 악화시킨 독재자라는 평가가 공존한다. 가이아나 내에서 흑인들에게 평가가 높지만, 인도계한테는 평가가 박하다.

4. 여담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포브스 버넘도 상당히 친북적이었다. 공화정 전환 직후 본격적으로 북한과의 교류에 적극적이었고 이후 북한의 전문가들을 초청해서 매스게임까지 한 바가 있다.[6] 가이아나의 매스게임을 다룬 글 사실 재임초기인 1960년대에는 CIA에게 대놓고 지원을 받았지만, 1968년 원주민 봉기 진압사건 이후로 미국으로부터 대놓고식의 지원을 받기 어려워지자,[7] 외교노선을 전환했기 때문이었다. 재미있게도 버넘은 이스라엘계 종교조직은 지원했었고, 이들의 지원을 받았다.

5. 관련 문서



[1] 가이아나의 국명부터 가이아나 협동 공화국(Cooperative Republic of Guyana)이다.[2] 당시 짐 존스존스타운 건설을 허가해주고, 이후에도 친분을 유지했다는 점에서 사건 이후 큰 논란이 되었다.[3] 이전에는 대통령은 상징적인 역할을 하였고 실권은 가이아나 총리에게 있었다. 여담으로 초대 대통령은 가이아나 화교였던 아서 중(Arthur Chung)[4] 버넘이 가이아나 경제를 얼마나 망쳐놨는지 1977~2000년까지 가이아나는 단 네 해(1980, 1986, 1996~1997)를 제외하면[5] 아프리카계 가이아나인과 인도계 가이아나인 사이의 갈등.[6] 냉전 당시 제3세계 국가들이 대부분 북한에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점을 감안해도 가이아나처럼 북한식 매스게임을 도입할 정도로 적극적이었던 친북 국가는 드문 편이었다. 제일 유사한 사례라면 차우셰스쿠 정권 당시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 정도[7] 물론 미국은 그러면서도 브라질이나 과테말라, 엘살바도르 등의 극우정권에게 무기를 대놓고 지원하거나, 자메이카 노동당에게 무기를 지원하면서 학살과 혼란을 조장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