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8-17 15:45:21

알렉시 드 토크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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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dd,#000><colcolor=#000,#ddd> 알렉시 드 토크빌
Alexis de Toucqueville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Alexis_de_tocqueville.jpg
출생 1805년 7월 29일
프랑스 제1제국 파리
사망 1859년 4월 16일 (향년 54세)
프랑스 제2제국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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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철학자, 역사학자, 정치인
학력 파리대학교
당적 [[오를레앙주의#s-2.2|
운동당
]] (1839년-1848년)
[[오를레앙주의#s-3|
질서당
]] (1848년-1851년)
사상 고전적 자유주의, 공화주의, 계몽주의
서명 파일:Signature_d’Alexis_de_Tocqueville.png

1. 개요2. 생애
2.1. 미국과 토크빌2.2. 밀과 토크빌
3. 토크빌의 말이라고 오해된 어록4. 실제 토크빌의 어록5. 저서

1. 개요

프랑스의 정치철학가이자 역사학자.

2. 생애

1805년 7월 29일에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진보적인 귀족 정치가이자 프랑스 혁명 당시 희생된 크레티앵 드말제르브의 증손자로 태어났는데 그 때문에 본인도 진보적인 성향을 띠게 되었다. 노르망디 가문의 귀족으로 태어나서 인지 본인의 콧대가 높고 사람들에게도 차갑게 대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태어나서부터 예민한 성격에 우울증까지 겪어서 매일 의회에 참석하기도 귀찮아 했고 신경쇠약에 시달리기도 할 정도로 건강은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아버지를 따라 정치인이 된 그는 1827년 샤를 10세로부터 프랑스 귀족 작위를 받았고 이 덕에 견습 하급관리로 정치의 길에 쉽게 발을 들일 수 있었다. 이후 헌법 개정에 대해 보수파와 진보파 사이의 정쟁에서 진보파 쪽을 지지하기도 했는데 이것은 그의 당시 프랑수아 기조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후 1830년 7월 혁명을 겪으면서 "프랑스는 영국식 입헌군주제가 아니라 미국식 민주제로 나아가야 한다."라고 생각했는데 이 때문에 미국으로 유학을 가겠다고 정부에 요구해 허락을 받아냈다. 다만 온전한 공화주의자는 아니었고 오를레앙주의에 지지를 표하긴 했다.

1848년 혁명으로 7월 왕정이 붕괴되자 프랑스 제2공화국의 제헌 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어 제2공화국의 헌법의 초안을 작성하는데 기여한다. 이때 헌법에 보통 선거양원제 같은 미국적 민주주의의 요소를 집어넣기 위해 여러모로 노력했다.

잠시 제2공화국의 외무장관을 지내기도 했으나 1851년 샤를 루이 나폴레옹이 일으킨 친위 쿠데타에 반대하다가 체포된 이후 정계에서는 은퇴하였다. 1856년 무렵부터 <앙시앵 레짐과 프랑스 혁명>을 저술했다. 1859년 결핵으로 숨을 거둔다.

2.1. 미국과 토크빌

1831년 5월, 프랑스 정부가 미국의 감옥제도를 연구하라고 그와 그의 절친이자 귀족인 귀스타브 드보몽(Gustave de Beaumont)을 함께 보내 미국에서 9개월간 체류를 했는데 이때 미국 사회의 면면을 기록했고 1832년 2월 프랑스로 돌아와 형벌제도에 대한 보고서 『미국의 교도행정 체제와 그 체제의 프랑스 내 적용 여부』를 제출함과 동시에 본인이 겪은 일들을 책으로 펴냈는데 현대의 고전 중 하나인 『미국의 민주주의(De la démocratie en Amérique)』가 바로 그것이다. 행정학정치학에서는 유명한 고전 중의 고전. 내용은 어마무시하게 축약하고 알기 쉽게 설명하면, 자유와 평등은 서로 상치되는 면이 있어 평등을 과도하게 주장하다보면 자유가 침해될 수 있고, 자유가 과도하다보면 결과적으로 평등하지 않게 되어 불만이 쌓이게 된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중앙정부 내지는 국가와 개인 사이에 공적 권위를 가진 중간적 기구 내지는 기관, 즉 지방 정부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여기서 예로 든 것이 바로 미국의 마을회의와 같은 자치정부였다.

토크빌은 저서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민주적 전제'를 극복하기 위해 결사의 자유 보장과 언론 다양성의 헌법적 권리 보장을 들었다. 민주주의 제도는 국민의 여론에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일단 여론이 한 방향으로 쏠려 그것이 다수의 지지를 획득하는 경우 그 힘을 상쇄 보완할 방책이 거의 없기 때문에 현실정치에서 많은 문제는 입법부의 폭정이 아니라 여론의 무책임한 압력에서 나타날 수 있다고 보았다. 그 압력에 특정 정치세력이 편승할 경우 민주주의 대의제 시스템의 기능이 상실된다고 하였다. 지배자의 억압에 맞서는 것보다 다수 국민의 여론 독재에 맞서게 되는 경우가 점차 많아지는 것이 민주화된 국가에서 문제로 대두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민주국가는 시민사회의 소수의견도 수렴하여 정치적인 힘으로 전환시키는 장치를 갖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결사와 정당이다. 토크빌은 결사의 자유를 다수의 전횡에 맞서는 소수의 권리로 이해했다. 미국이 다수 폭정의 가능성에 노출된 최초의 체제이면서도 그 위험을 줄일 수 있었던 것은 소수를 위해 결사의 자유를 보장하고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언론의 다양성을 헌법적 권리로 보장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덧붙여 기득권 철폐가 아니라 기득권 향유자의 수를 늘리는 것을 지향하는 온건한 개혁문화는 개인에게 발전의 계기가 되었고 사회에서는 타협과 협력의 문화를 정착시키는 배경이 되었다고 보았다.

다만 토크빌은 당시 도시의 궁핍이나 노예의 고통 등을 의도적으로 배제했다는 점에서 비판받기도 한다. 이는 토크빌 본인이 제국주의를 옹호했던 바에서 기인한다. 다만 흑인인디언들의 비참한 삶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기는 했다.[1]

토크빌은 미국과 러시아가 언젠가 세계의 초강대국으로 부상할 것이라는 예언을 남기기도 했다. 그는 『미국의 민주주의』 에서 처음으로 미국이라는 국가를 '예외적인(exceptional)' 모델이라고 서술하였으며, 이 말은 이후 미국의 국수주의자 및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몇 번 의미가 변하여 미국 예외주의라는 이름의 정치 철학으로 발전하였다.

2.2. 밀과 토크빌

지금도 현대 자유주의의 기틀을 다진 공로를 높이 평가 받는 존 스튜어트 밀과 알렉시 드 토크빌은 동시대인이었다. 두 사람은 토크빌이 사망하기 이전까지 계속해서 교류를 해왔다. 사적인 교류는 주로 서신으로 이루어졌다고 전해진다.

밀은 영국에서는 매우 이른 시기에 토크빌의 사상을 접한 인물이기도 했다. 밀이 『미국의 민주주의』를 읽었을 시기는 아직 그것이 영어로 번역되기도 이전이었다.[2] 그는 해당 저작을 읽고 자세한 논평을 써서 신문에 개재하기도 했다.[3]

이 젊은 공리주의자[4]의 반응에 토크빌 역시 주목하였고, 두 인물은 이를 계기로 친분을 쌓게 된다. 그들이 직접 대면했다는 이야기는 전해지지 않지만, 적어도 서신으로는 빈번히 교류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3. 토크빌의 말이라고 오해된 어록

민주주의 내에서 사람들은 그에 걸맞은 정부를 얻는다.[5]
* 해당 어록은 토크빌이 한 말로 잘 알려져 있지만, 정작 토크빌은 이런 말을 하지도 않았다. 동시대의 보수정치학자인 조제프 드메스트르가 한 말이 와전된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고.
미국의 교회에 들어가 공의로 불타는 설교단을 듣고 나서야 나는 미국의 재능과 힘의 비밀을 이해했다. 미국은 위대하다, 왜냐하면 미국은 선()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미국이 언젠가 선하기를 멈춘다면, 미국은 위대함을 멈추게 될 것이다.[6]
* 해당 어록은 영미권에서 토크빌이 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토크빌이 한 말이 아니다. 『위클리 스탠다드』(1995년 11월 13일) 의 "토크빌 사기"가 밝혔듯이, 이 인용문은 1922년 Herald and Presbyter 라는 장로교 잡지에 보낸 편지 (제93권, 제36호, 8쪽)에 나오는 말이다. 장로교 선교 위원회의 한 임원인 존 맥도웰 목사가 일요일 설교에 이 인용문을 포함시키고는 토크빌이 한 말이라고 얘기했는데, 사실 토크빌은 이런 말을 한 바가 없다. #1 #2

4. 실제 토크빌의 어록

민주주의의 법률들은 일반적으로 최대 다수의 이익을 향하는 경향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법률들은 모든 시민의 다수로부터 나오는데, 이들은 착오를 저지를 수는 있지만 자기 자신과 배치되는 이해관계를 가질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 아메리카의 민주주의, 제1권에서.[7]
선거로 뽑힌 정부들의 당연한 예단은 음모와 부패이다. 그런데 국가수반이 재선될 수 있을 때, 이러한 페단은 극에 달해서 국가의 존망 자체를 위태롭게 할 수 있다. 어느 단순한 후보가 음모로 당선되려 한다면, 그의 책략은 그저 제한된 범위에 그칠 수 있다. 반면에 국가수반이 이러한 행태를 보인다면, 그는 자신의 당선을 위해서 정부의 힘을 사용할 것이다.
첫 번째 경우, 음모를 꾸미고 부패에 빠져드는 것은 변변찮은 수단을 가진 한 개인이다. 하지만 두 번째 경우, 그것은 엄청난 자원을 가진 국가 자체이다.
권좌에 오르려고 온당치 못한 책략을 꾸미는 일반 시민은 공공의 안녕에 간접적으로만 해를 끼칠 뿐이다. 하지만 행정권의 대표자가 싸움에 끼어든다면, 통치 업무는 그에게 부차적인 관심사일 뿐이고 선거만이 그의 주된 관심사이다. 법률뿐만 아니라 협상도 그에게는 당선을 위한 책략일 뿐이다. 공직은 국민이 아니라 국가수반에게 바친 봉사에 대한 논공행상이 된다. 정부의 조치가 항상 나라의 이익에 어긋나게 된다고까지는 말할 수 없을지라도, 적어도 나라의 이익에 이로운 것이 되지는 않는다. 정부의 모든 조치는 국가수반의 의도에 맞추어서만 취해질 따름이다.
(...)따라서 재선의 원칙은 선거로 뽑힌 정부들의 타락한 영향력을 더욱 광범위하고 더욱 위험하게 만든다.
* 아메리카의 민주주의, 제1권에서.[8]

5. 저서

제목 발간 연도
<colbgcolor=#fff,#1f2023> 미국 수형 제도의 프랑스에 대한 적용
Du système pénitentaire aux États-Unis et de son application en France[미번역]
<colbgcolor=#fff,#1f2023> 1833년
아메리카의 민주주의 I
De la démocratie en Amérique I[번역]
1835년
아메리카의 민주주의 II
De la démocratie en Amérique II[번역]
1840년
앙시앙 레짐과 프랑스 혁명
L'Ancien Régime et la Révolution[번역]
1856년


[1] 이에 대한 부분은 제1권의 마지막 챕터인데, 노예의 고통을 외면했다고 보기에는 상당히 소상히 다루고 있다. 또한 '있어서는 안 될 일' 등의 표현으로 노예제에 관한 비판을 명시적으로 개진하고 있다.[2] 밀은 불어에 능했기 때문에 원서를 읽을 수 있었다.[3] 첫번째 논평은 1835년, 두번째 논평은 1840년에 남겼다. 시기를 감안하면, 거의 출간 되자마자 읽어본 셈이다.[4] 그 당시는 밀이 그의 대표작들을 발표하기 이전이었다. 심지어는 아직 『논리학 체계』를 쓰지도 않았을 시점이다. 물론 밀은 『정치경제학 원리』를 저술하기 이전에도 무명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의 아버지아버지의 스승이 모두 유명한 사상가들이었기 때문이다.[5] In a democracy, the people get the government they deserve.[6] Not until I went into the churches of America and heard her pulpits flame with righteousness did I understand the secret of her genius and power. America is great because America is good, and if America ever ceases to be good, America will cease to be great.[7] 해당 구절은 언뜻보면 공리주의와 공명하는 듯이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토크빌은 이러한 상황을 긍정적으로만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사실을 말했을 뿐, 공리주의자들처럼 그것이 가장 옳다고 하지 않았다. 그는 항상 다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배제를 염려했다.[8] 그의 연방 대통령 중임제에 대한 염려를 다루고 있다.[미번역] 국역되지 않음.[번역] 국역되었음.[번역] 국역되었음.[번역] 국역되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