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로체스터 성의 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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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킵(keep)이란 성(castle)이나 성채(citadel), 혹은 요새(fortress) 내에서 성주의 지휘소 겸 최후의 방어 거점이다.2. 어형
언어별 명칭 | |
영어 | Keep |
프랑스어 | Donjon |
독일어 | Bergfried |
영어에서는 물품을 보관하는 통(kype)에서 유래하여 킵(keep)이 되었고, 프랑스어에서는 영주 혹은 주군을 뜻하는 라틴어 dominus에서 비롯한 던전(donjon)이라 부르게 되었다. 영어에서는 이후 kype가 사어화되면서 대중적으로는 "지키다."라는 뜻의 keep이 유래라고 여겨지게 되었는데, 이러한 현상은 그 어원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독일어에서도 비슷하게 "berg(성) + Frieden(평화)"라고 믿는 형태로 나타난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는데, 의외로 영국의 Keep과 프랑스의 Donjon, 독일의 Bergfried는 서로 완벽히 일치하는 개념은 아니라는 것이다. 세 나라의 정치와 사회문화, 자연지리, 안보환경 등의 차이로 말미암아 서로 구별되는 특성이 생겼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다른 나라의 것을 가리킬 때 자국의 유사 개념어로 옮기기보다는 외래어로서 그대로 쓰거나 그 뜻을 풀어서 적는 경우가 많다.
한자문화권에서는 "아성(牙城)"이라고 번역된다. 후술하듯 일본 성의 천수각은 후대 서양 성의 킵과 매우 유사한 기능을 하지만 일본 성에만 있는 구조물이므로 번역어로는 잘 쓰이지 않는다.
3. 기원
중세 초기 성벽 형태인 모트 & 베일리 |
본래 모트 앤 베일리에서[1] 모트, 즉 언덕 위에 세워진 요새화한 영주의 저택이나 주둔군 숙소가 곧 성의 중앙에 설치한 거대한 탑(던전)으로 발전하고, 그것이 좀 더 다듬어지면서 우리가 잘 아는 네모 반듯한 킵으로 발전했다. 이 킵을 감싸는 성벽이 넓어지고 다른 구조물이 덧붙여진 것이 castle(성)과 citadel(성채)이다.
성과 성채가 생기면서 킵 자체는 군사적 최전선에서 벗어났지만, 기원이 모트 앤 베일리인 만큼 그러한 시설들 안에는 여전히 모트의 후계로서 최후의 방어시설로써 성이나 성채의 다른 부분과 좁은 문으로 격리된 탑인 킵을 두게 되었다.
이러한 시설은 높은 탑이라서 시야가 넓다는 점 덕분에 지휘소로서 매우 적합하였다. 모트 시절부터도 그런 역할을 수행했으며, 공성/축성 기술의 발달을 거치며 자연스럽게 직접적 방어 능력을 대부분 상실한 이후에도 존속하여 순수한 지휘 설비로서 그 기능이 변모하였고, 끝에는 1차적 목적이 지휘소인 건물이 되었다. 더불어 지휘를 위해 상주해야 하는 까닭에 종종 이전 시대처럼 거주지 기능도 겸하였는데, 보통은 주 거주지는 아닐지라도 유사시 농성을 위해서 최소한 거주설비 자체는 구비해두었다.
4. 기능
4.1. 거주
이는 영국과 프랑스에서 두드러지는 현상으로, 독일에서는 근세까지 잘 나타나지 않았던 현상이다.본래 킵이나 던전은 영주의 저택이 있던 자리를 요새화하면서 발달하였으므로, 예전처럼 영주의 거처로써의 기능을 할 수도 있지만, 반드시 영주가 거주하는 것은 아니고 방어병력 전반의 거주공간으로 기능하기도 하였다. 영주의 거처 겸 피난처/지휘소 역할은 영국의 킵에서 두드러지는 특징이다. 프랑스의 던전은 그러한 역할들도 하지만 그보다는 농성 거점 역할을 맡았는데, 실내침투를 상정하여 전투구역과 거주구역을 지닌 여러 층으로 나뉜 구조여서 매우 능동적이고 공격적인 방어구조물이었다. 반면, 독일에서는 주거 기능은 잘 나타나지 않으며, 단순히 가장 높은 탑으로서 순수한 지휘소 역할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흔히 킵을 영주가 사는 곳이자 최후의 농성 지점으로 생각하곤 하는데, 어느 정도 맞는 말이지만 완전히 맞는 말은 아니다. 이는 시대적 변화에 따라서 달랐으며, 지역적 특성에 따라서도 그 양상이 달랐다. 후자의 경우 특히 영국, 프랑스와 독일 각국의 정치구조의 차이에서 비롯하였다.
영국은 노르만 정복 이후로 일찍이 중앙 집권적 봉건체제를 지니고 있었다. 넓은 영역을 보유한 영역제후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모든 귀족 영주와 기사들은 국왕의 봉신이었다. 백작(earl)이나 셰리프(sheriff) 등의 관작들을 지니고 있더라도, 그것은 원래 기원처럼 역직에 가까워서 정작 그 관할지는 영지가 아니라 순수한 행정구역이었으며, 심지어 관할지가 자기 봉토 경계와 장원의 위치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곳이기도 했다. 이들은 성을 거점으로 삼아 그 일대 자기 영지를 지배하였으며, 전시 상황에서는 공격을 당하거든 자기 성에서 농성하면서 외침이라면 왕국군의, 내전이라면 동맹자들의 조직적인 구원을 기다렸다.
프랑스는 선거군주제를 회피하여 세습군주제를 정착시키고자 공동왕 제도를 꼼수로 써먹었을 정도로 초기 왕권이 약했다. 초기 프랑스 왕국에 존재했던 영역제후들은 복종하는 "봉신"이라기보다는 대등한 "동료"에 가까운 존재들이었으며, 이를 두고서 아예 "샤를마뉴의 12동료"(Charlemagne's twelve peers) 혹은 단순하게 "열두 동료"(The Twelve Peers)라는 문학적 수사가 있었을 정도였다. 영역제후들은 자기 영역을 통치하고 방어하고자 곳곳에 성채를 건설했으며, 그곳에는 성주들을 임명하여 관리하였다. 개중에는 독자적 중소영주로 독립해나오거나 아예 성 자체를 무단으로 짓거나 점거하고서 성주를 참칭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대체적으로 영역제후가 성주들을 억제·제압하여 자기 영역을 통제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성은 독립적인 영주들의 거점이거나 영역을 방어하고 관리하기 위한 시설들 중 하나였다. 특히나 평야지대가 많아서 지형적 이점을 누리기 어려웠던 자연환경상 성 구조물 자체의 방어력이 강화되고 대형화하는 것은 필연이었다. 각 성은 최대한 적을 소모시키면서 영역 내로 침투하는 적을 돈좌시키고, 이는 그렇게 붙들린 적이 못이겨 철수하게 하거나 소집된 아군 병력이 구원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독일은 봉건제 자체가 1~2세기 정도 더 늦게 성립하였으며, 부족적 전통을 지닌 대제후들과 여러 군소귀족가문, 교회와 수도원, 자유로운 도시공동체와 농민공동체들이 신성 로마 제국 안에 느슨하게 모여있는 구조였다. 이는 봉건제로 이행한 뒤에도 마찬가지여서, 국가연합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매우 자치적인 수많은 영방국가로 구성되어 있었다. 따라서 각자 자기 영역을 방어하기 위한 성채를 꾸려야 했으며, 이는 상대적으로 작은 성채 여럿을 요충지에 배치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특히 독일은 산악이나 절벽 등 험준한 지형이 상대적으로 많아서 그러한 이점을 살려서 짓는 경우가 많았고, 평소 각 영방 주체들은 성에서 거주하기보다는 한시적 피난처나 견부진지로 활용하고 계급에 따라 Hofgut, Rittergut, Burggut 등 궁정이나 저택을 거처 삼아서 경영하였다.[2] 성 구조물은 장기적 거주성보다는 방어기능만을 고려하였으며, 각 세력은 적을 요격하든가 최후 거점인 성으로 피신한 다음에 신성로마제국 특유의 제국 단위 혹은 제국 내 동맹 단위의 집단방어체계가 작동하여 구원 받았다.
시대적으로 볼 때는 본래 영주의 저택이나 수비대 주둔지가 요새화되면서 탑형 요새를 거쳐 지휘소 겸용으로 변모하였다. 시간이 경과하면서 축성술과 수성술만이 아니라 공성술도 발달하였으며 전투 규모도 커졌으므로, 어느 시점에서는 킵 단독으로 방어전을 수행하기는 어려워지고 비효율적인 상황이 벌어지면서 성벽과 탑 등 여러 부속시설을 지어 주 방어선을 만들고 킵은 이를 통제하는 방향으로 변화했다. 따라서 킵 자체는 기원적으로 독자적 방어건물이었고 여전히 방어구조물 형태를 띠고 있지만, 점점 단독 수성전 상황에서는 지휘 기능만이 발휘되는 시설이 되어갔다. 그러나 전쟁은 성 하나에 의지하여 진행되지 않는 데다가 엄연히 축성물이니만큼 벽이 뚫리고 안뜰(bailey)까지 적이 들어왔을 때는 외부 지원이 올 때까지 최후의 항전을 벌이는 피난처 역할을 하였다.
후술할 방어적 이점 덕분에, 성을 지배하는 군주의 거주 시설이나 집무실은 아성 안에 마련되었다. 예컨대 킵의 1층이 평시에는 군주의 집무실 겸 연회장인 식으로. 대중들이 흔히 떠올리는 "저택"에서 사는 경우는 귀족들이 더는 봉건영주로서 행사하지 못하게 되고 성 자체의 방어적 이점을 상실하게 된 훨씬 후대의 일이다.
4.2. 방어력
중세 극초기의 모트 앤 베일리 시절에는 벽도 허술한 통나무 목책 수준으로 극히 빈약하고 다른 부수적인 탑 등의 방어시설이 거의 없었기에, 킵이 그 자체로 하나의 요새로 기능하였다. 개중에는 방어 목적에서 아예 입구를 2층에 두어 사다리 등으로 오가는 경우도 있었다. 성의 석조화 또한 벽보다 여기서부터 진행되었다. 이것은 후대 양식 기준으로는 기능적으로 유사한 시설인 일본의 천수각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다.이후에도 중세 초기까지는 완전히 독자적으로 기능 가능한 요새화 설비로써 1층에 창고가 있고 2층에 주거공간을 두는 식으로 웬만한 물자와 설비가 다 들어가 있었고, 영주의 주거지로써의 기능도 (따로 저택이 없는 경우엔) 온전히 수행하고 있었다. 따라서 적어도 이 시기까지는 킵이 어느정도 독자적인 방어 시설이자 거주 시설로써도 기능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때도 다른 부속시설들은 안뜰에 따로 두고는 했으므로 적이 성내로 들이닥치는 시점에서 해당 성은 끝장난 경우가 많았다.
개나소나 성문에 공성추를 끌고 갈 상황이면 방어측의 허술한 수성 능력에 맞먹게 공성 측의 공성 능력도 개판인 경우가 많았고, 덕분에 킵에서 버텨내는 경우가 꽤 나올 수 있었으나, 탑과 보루 등 다른 구조물들이 덧붙여지면서 성 구조가 발전하여 킵이 독립적 성으로써의 기능을 사실상 상실하고, 지휘통제 설비로써의 구조물이 된 후로는 굳이 킵에서 최후의 저항을 하는 경우는 가능은 하여도 실제 실천하는 일이 거의 없게 되었다. 보통 진지하게 따져볼 만큼 착실히 진행된 공성전에서는 공성추가 성문을 때리는 순간 그 성은 함락된 것으로 판단했고, 따라서 공성추가 성문을 때린 순간 상대의 조건부 항복을 인정하지 않는, 즉 재산과 생명의 권리를 박탈당한 것으로 보는 관습이 굉장히 오래 이어졌다.[3]
그러나 아무리 지휘소(겸 종종 영주의 거주지) 기능만을 제공하게 된 후라 해도, 엄연히 축성물로서 커다란 탑, 누각, 장대 돈대 같은 형태를 띠므로 들어가서 농성할 수 있는 건 여전하다. 실제로 이미 성이 함락되었어도 끝까지 아성이나 시타델에 들어가 버티다 장렬히 산화하거나 외부의 구원으로 극적인 승리를 거두는 경우는 중세 초기 이후에도 꽤 많았다.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고 나면, 아성이 작은 요새처럼 생긴 이유는 이같은 관습적 배경 하에서 순전히 요새의 지휘 시설을 만들다보니 자연스럽게 요새의 모양을 가지게 된 것일 뿐, 설치 목적이 최후의 저항을 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게 되어, 모트 엔 베일리 시절의 그것과는 사실상 전혀 다른 시설로 변하였다. 이 시점부터는 일본의 천수각과 비슷한 설비가 되었다. 즉, 훗날의 킵들은 수성전시 벽과 안뜰을 대충 시간 끌다가 내어주고 아성에서 틀어박혀 농성하려고 지은 게 아니지만, 일단은 축성물이므로 정 하려거든 못할 것은 없는 수준의 방어 기능이 존재는 하는 시설이라 하겠다.[4]
영화 아이언클래드(2011) |
자신에게 저항하는 봉신의 성을 공성하는 존 왕에게 주인공 일행이 맞서는 장면들. 저렇게 킵 안에까지 침투한 경우는 이미 대세가 기울어 사실상 다 끝난 싸움이나 다름없었다. 성벽이 돌파당한 후 다시 밖으로 내몰지 못한다면 처절하게 안뜰에서 막아세우거나 항복하는 수밖에 없었다. |
고중세 유럽 성에서 아성은 영주의 생활공간과 여러 핵심시설이 안에 몰려있고 주변을 성벽이 감싸고 있는데, 기본적으로 성벽을 악착같이 지키는 것이 수성의 기본전략이고, 아성은 지휘소의 기능을 한다. 물론, 어쩔 수 없이 벽이 뚫렸으나 아직 방어가 가능한 경우에는,[5] 방어측을 압박하기 위해 공격자가 감행하는 Siege Assualt 시도를 견디기 위해 안뜰에서 성문을 보호하면서 농성했고,[6] 재수 없게 실패하여 적의 침입을 허용하였으나 성 전체는 아직 건재한 경우라면 아성 안으로 들어가 농성을 시도했다.[7]
5. 비교사: 동아시아
요새화된 시설에 반드시 지휘소나 최후 거점에 해당되는 설비가 있어야 하는 건 전세계 어디든 똑같았지만, 동아시아에서는 킵과 유사한 시설이 일본의 천수각에서만 나타났다. 이는 정치체제가 크게 달랐기 때문이다.[8]일찍이 거대하고 중앙화한 전근대 관료제 국가가 출현했던 중국이나 한국에서는 분권적 통치자로서의 영주가 빠르게 사라졌다. 그 결과 변경에 장벽이나 여러 요새와 진보로 구성된 장성이나 교통로를 통제하는 관문, 도시나 마을 전체를 감싸는 읍성 등의 성곽, 산성과 같은 피난용 성이 발달하게 되었다.[9] 장성이나 관문, 피난용 성 등은 독립 성주가 있는 것이 아니고 통치 중심이지도 않았으므로, 도시나 마을은 그러한 시설로 감시통제하기에는 너무 거대했으므로[10] 킵이나 천수각 종류의 시설을 지을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도 지휘통제용 시설 자체는 요새화 시설에서 자연스럽게 등장할 수 밖에 없는데, 한반도에서도 성 내부에서 전망이 좋은 위치에 지휘소를 세우고 장대(將臺)라고 불렀었다. 다만 보통 병영이나 창고, 관저 등은 따로 두고 지휘소는 간단하게 누각만 세웠을 뿐 요새화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게다가 일찍이 관료제 국가가 성립하여 도시를 둘러 방어하거나 산성 등 방어거점에 관료를 보내어 방어를 맡긴 탓에 주거기능은 애초부터 지니고 있지 않았다.
반면, 일본은 유럽 이상으로 지주 겸직 무사들이 지배층이었던 나라였기에 심지어 도시라 하더라도 일종의 성관을 끼고 있는 경우가 많아 킵의 기능을 하는 천수각이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동양의 성 구성요소 중 keep과 가장 유사한 개념은 일본식 성에 있는 천수각(天守閣)이다. 킵과 마찬가지로 경우에 따라 영주의 저택 기능도 할 수 있으며 구조적인 차이들을 제외하면 군사적으로는 지휘통제상 동일한 기능을 한다. 다만 이는 후대의 것들을 비교하였을 때 일부 유사성이 있다는 이야기이지 실제로는 다른 점도 있다.
기원상으로 Keep 부류는 저택이나 수비대 거처에서 발전하였으나, 천수각은 그러한 주거에서 발달한 것이 아니었다. 일본식 성에서 거처는 고텐(御殿)이라고 불렸으며, 근세 이전에는 성 밖에 있었으므로 수성전 돌입 시 전투지역에 제외되어 방어군이 버리는 곳이었다. 천수각의 거주성은 아주 제한적이었으며, 고텐이 성내에 지어진 것은 근세부터 시작되었다.
동서양의 건축 양식의 환경적인 차이로 말미암아 천수각은 일반적으로 항상 목조 건물이지만, 아성은 후대로 갈수록 석조 건물이라는 차이점도 있었다. 이에 따라 천수각 자체는 방어력이 썩 좋지 못했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명 연합군은 왜성에 고전하였는데, 여기에는 천수각과 같은 건물이 주는 전술적 이점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전훈은 진지하게 고려되지 않아 임진왜란 이후 명나라도 조선도 딱히 천수각처럼 대형의 지휘용 누각을 지은 경우가 없었다. 이 역시 정치체제와 안보환경이 일본하고는 달라서 천수각처럼 대형 지휘소를 설치할 동인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는 이들 지역이 오랜 중앙집권제의 역사를 지닌 점과 후대로 갈수록 평화기가 길어지면서 주된 적대세력이 국가 단위보다는 유목민족이나 해적 등 소규모 약탈자들이었던 점, 그 규모가 커지더라도 내전 상황이거나 유목민 및 해적과 연속적인 구성 탓에 요충지 통제와 기동성이 중요했던 점이 크다.[11]
다만, 비슷한 건물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문수산성 장대나 함흥읍성 구천각처럼 돈대 형식의 축성물을 단독으로 건설한 경우도 있다. 이 경우 구조상으로는 성 내부의 거대한 탑(던전)과 동일하다. 비교하자면 바스티유 요새가 이런 유형이다. 유럽에서도 종종 아성만 따로 빼서 지은 듯한 건물들이 있는데, 이것은 보통 병영이나 야전 지휘소 같은 시설로써 자체적인 방어 기능은 거의 못 하지만[12] 아성과 비슷한 기능을 할 수 있도록 지어진 것들이다.
6. 관련 개념
모트 앤 베일리에서 베일리(안뜰, bailey)를 감싸는 성벽이 더 넓고 커지고 보루와 탑을 비롯한 각종 시설이 늘어난 것이 바로 castle(성)과 citadel(성채)이다. 커튼 월(curtain wall)도 원래는 이렇게 킵을 두르고 있던 벽을 가리키던 말로, 이 curtain wall에 탑을 비롯한 각종 방어시설이 덧붙여지고 거기에 keep까지 모두 아우르는 총체적 개념이 castle 혹은 citadel이다.citadel은 도시(city) 내부에 별도로 벽을 둘러 추가로 요새화된 구역 혹은 그 구성요소 총체를 의미하며, 성채를 둘러싼 도시가 함락되었을 경우에도 지속적으로 저항을 이어나갈 수 있는 요새화된 지역이다. citadel마저 함락될 경우 성채 안에 있는 건물인 keep으로 퇴각하여 저항을 계속하게 된다. 즉, city 안에 citadel이 있고 그 안의 하나의 시설로 keep이 있는 것이다. 'keep'은 탑, 즉 단일 건물에서 기원한 것인 반면, 시타델은 애초부터 도시 방어 시설의 부속품으로 출발했다는 결정적 차이가 있다.
한자문화권에서는 citadel, keep을 둘 다 '성채', '아성' 등으로 뭉뚱그려 번역하여 혼동을 빚곤 한다.
[1] motte and bailey. 직역하면 "언덕과 안뜰"이다.[2] 이러한 시설들은 중세 말로 가면서 개별적으로 요새화되기도 하였고, 근세에 이르러 영방국가 단위의 중앙화가 진전되자 영국이나 프랑스 등지와 유사한 성 구조로 변하게 되었다.[3] 즉, 이 지경까지 가고나서 함락되면, 십중팔구 지휘관이 약탈을 허용하는 정도가 아니라 보복 목적으로 약탈을 명령하는 지경이 된단 소리다. 물론 공성추가 대놓고 성문으로 갈 지경으로 가고도 도통 함락시킬 수 없던 경우도 꽤 있고, 이런 경우에는 오히려 방어측이 공격측에게 약탈 기간과 약탈 대상을 제시하는 조건부 항복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어느 식으로든 일단 항복이 받아들여지면 방어 측은 보통 자신들의 깃발을 챙겨서 "명예롭게" 퇴거할 수 있었다.[4] 단순히 생각해봐도 당연한 것이, 킵 안에 공간이 얼마나 있을지는 킵 마다 천차만별이긴 해도, 엄연히 군대가 주둔할 수 있으니 그 자체로 군사 거점이다. 용도가 지휘소라 방어가 주 목적이 아닐 뿐.[5] 대부분 열심히 돌을 던져넣다보니 우연히 성벽이 무너졌으나 그렇다고 성문에 대놓고 공성추를 끌고갈 만큼 공성이 진척되지는 못한 경우다.[6] 벽이 뚫린다 해도 구멍이 원체 좁기 마련이라 병목이 생겨 뚫린 벽에 병력을 밀어넣는 것은 벽을 기어오르는 거랑 그다지 차이가 없는 특공이었다. 따라서 전반적인 방어가 약화된게 아니라면 벽이 단순히 뚫린 정도로는 공성 진척이 그리 많이 되지 못하였다.[7] 변동이 심하던 중세 극초기라면 모트가 함락되면 군주로 있던 전사의 목숨이 위험해질 수 있으므로 성이 함락된 것이나 다름 없어도 어쩔 수 없이 틀어박혀 버티는 경우가 나왔으나, 이후 어느 정도 봉건체계가 자리잡히고 난 후에는 명예롭게 항복하는 선택지가 더 합리적이게 된다.[8] 의외로 지형적 요소는 그렇게 관련은 없다. 유럽 내에서도 산지를 활용하기 좋았던 독일에서는 산에다가 지었으나 평야가 많은 프랑스에서는 그러지 않았고, 동아시아에서도 유럽식 성과 가장 비슷한 양식이었던 일본식 성은 정작 산 위에 지어지는 것이 선호되었다.[9] 특히 한반도의 경우 산이 많아서 고구려의 축성양식을 보면 알 수 있듯, 초기에는 주로 방어용 성과 주거지역을 따로 두는 경우가 많았으며, 조선시대에도 산성과 읍성으로써 이와 유사한 방어체계를 보였는데, 이는 서유럽의 킵이나 던전보다는 중부유럽의 베르크프리트나 오히려 고대 지중해권에서 나타난 도시국가들의 아크로폴리스 등과 비슷한 양상이었다.[10] 유럽의 사례를 봐도, 도시의 시타델은 사령부 기능을 하긴 하나 킵과 달리 1차 목적이 지휘 기능이 아니라 방어 기능에 있었다. 대도시 정도의 크기가 되면 건물을 아무리 높게 세워도 도시 전체를 조망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11] 소규모 약탈자라면 신속한 출동이 가능하도록 군진을 두고 주둔군이 출동하는 사이 대피할만한 장소가 유효하고, 대규모 침략자라면 성벽이나 성채들로 구성된 장성이나 군진으로써 조기에 포착하여 야전군으로 격파하는 것이 일반적으로는 효율적이었다. 양양성 전투를 비롯한 여러 공성전 사례에서 보듯, 막상 본격적으로 준비된 성들의 경우 천수각 같은 시설이 없이도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는 방어력을 보여주었다.[12] 방어 기능은 순전히 거기에 군대가 주둔하고 있다는 것에서 나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