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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fff> こが まさお 古賀 政男 코가 마사오 | Koga Masao | |
<colbgcolor=#262b3e> 출생 | 1904년 11월 18일 |
후쿠오카현 오카와시[1] | |
사망 | 1978년 7월 25일 (향년 73세) |
도쿄도 시부야구 | |
학력 | 선린상업학교 (졸업) 메이지 대학 (상학 / 학사) |
직업 | 작곡가, 기타리스트, 만돌린 연주자 |
활동기간 | 1931년 ~ 1978년 |
레이블 | 일본 콜럼비아 테이치크 엔터테인먼트 빅터 레코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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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작곡가이자 기타리스트로, 일본 쇼와 시대 당시 5,000곡 이상을 작곡하여 가요계의 큰 발전에 기여한 인물이다.2. 생애
1904년 11월 18일, 후쿠오카현에서 8형제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그러나 5세 때 아버지가 사망하며 가세가 급격히 기울자 2년 후 가족들과 맏형이 일하고 있는 일제강점기 조선으로 건너가 초기에 인천부에서 생활하다가 경성부에 정착해 생활했다.이 때 재종으로 부터 일본의 악기 중 하나인 '다이쇼고토 (大正琴)'[2]를 받아 악기를 처음 접했고, 이후 중학교 3학년 때 넷째형으로부터 만돌린을 소개받아 이 때부터 음악계에 입문하기로 마음을 먹게 된다고
선린상업학교를 졸업한 뒤 귀국하여 오사카의 상점에 취업해 근무하였고 메이지 대학에 입학해 1923년 만돌린 클럽 창설에 참여하였다.[3] 1929년 대학교 졸업 이후에도 만돌린 클럽의 지휘자가 되어 음악활동을 이끌었고, 그 해 6월 정기 연주회에서 자체적으로 만든 왈츠곡인 '影を慕いて' (그림자를 쫓아)라는 노래를 발표하였는데 이 곡에 지난 1928년 정기 연주회에서 같이 활동을 시작한 가수 사토 치야코 (佐藤 千夜子)[4] 가 제작에 참여하여 당대 최고로 불린 가수의 연주자로 참여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이듬해인 1930년 '影を慕いて' (그림자를 쫓아)와 '日本橋から' (니혼바시에서)라는 곡을 발표할 때 사토 치야코가 부르고 이번에는 코가 마사오가 단독으로 만돌린을 연주하기도 했다. 또한 1931년 일본 콜럼비아의 전속 작곡가로 영입되어 본격적인 음악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처음 영입제의가 들어왔을 때 막상 자신이 없어 문예반을 지원했지만 콜럼비아의 강력한 의지로 작곡가로 영입되었다고 한다. 이 때 마침 도쿄음악학교에 재직 중이던 후지야마 이치로를 만나 듀엣으로 활동을 시작했는데 후지야마 이치로의 가창력과 음색이 코가 마사오의 연주실력이 어우러져 코가 마사오의 재능을 한 층 업그레이드 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에서 살며 민요를 많이 접했고 원시적 엔카(艶歌)에 한국민요를 결합하여 1920년대부터 술은 눈물인가 한숨인가(酒は淚か溜息か)', '그림자를 사모하여(影を慕いて)' 등을 내놓으며 현대적 엔카(演歌)를 창시했다.##
1938년 외무성 음악친선사절로 하와이와 아르헨티나를 방문하였으며, 이 때 NBC에 코가의 작품이 15분에 걸쳐 소개되기도 하였다.
1958년 일본작곡가협회를 창설, 초대 회장에 취임하여 일본 레코드 대상을 제작하기 시작하였다. 이 후 1978년 6월 17일 자신이 창설한 메이지 대학 만돌린 클럽 제102회 정기연주회 지휘를 마지막으로 그 해 7월 25일, 자택에서 급성 심부전으로 세상을 떠났다.
3. 사후
- 사망 10일 후인 8월 4일, 작곡가 최초, 그리고 오 사다하루에 이은 2호로 국민영예상이 추서되었다.
- 1982년 3월 1일, 코가의 고향인 후쿠오카현 오카와시에 '코가 마사오 기념관'이 건립되었다.
- 1997년, 1932년 입주한 도쿄도 시부야구 코가의 자택 부지에 일본 저작권 협회와 콘서트홀이 건립되었고, 사옥 내부에 '코가 마사오 음악 박물관'이 건립되어 음악 관련 도서와 PC 등 또한 설치되어 있다.
4. 대표작
'影を慕いて' (그림자를 쫒아) [5] |
'丘を越えて' (언덕을 넘어) [6] |
[1] 출생 당시 미즈마군 다와구치촌[2] 기타와 가야금, 아코디언을 섞은 형태로 보인다. 현악기와 건반악기를 혼합한 케이스로 쇠로 만든 다섯개의 줄을 숫자가 적혀있는 건반을 누르며 튕기면 소리가 나는 방식이다. 통통 튀는 맑은 소리로 만돌린과 비슷한 소리가 난다.[3] 이 동아리는 1924년 5월 31일 우에노 자치회관에서 제1회 연주회를 개최하였고, 당시의 전통이 현재까지 이어져 2023년 창설 100주년을 눈 앞에 두고 있다고 한다.[4] 1897년 ~ 1968년, 도쿄 행진곡을 대표작으로 활동했던 가수로서 도쿄음악학교를 졸업하고 이탈리아에 유학하여 성악을 전공한 유학파로 신여성으로 불린 인물이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도 상당히 비슷한 행적을 보인 가수가 있었는데, '사의 찬미'를 부른 윤심덕이다. 이 둘은 학력과 행적 등에서 상당히 비슷한 점이 많았지만 윤심덕은 1929년 향년 29세로 요절했고, 사토 치야코는 40년 뒤인 1968년 사망했지만 말년에도 사기와 절도 행각을 일삼으며 따가운 눈초리를 받기도 했다[5] 1931년 작, 위 영상은 코가 마사오 본인이 직접 노래를 불렀다.[6] 1931년 작, 위에서 설명했던 메이지 대학 만돌린 클럽의 연주와 코가 마사오의 지휘, 후지야마 이치로의 노래로 방송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