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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송웅

추송웅의 주요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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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부문 남자 최우수연기상
제13회
(1977년)
제14회
(1978년)
제15회
(1979년)
이대로
(그날밤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이호재
(페르퀸트)
추송웅
(빨간 피터의 고백)
김길호
(천일의 앤)
장민호
(북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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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추송웅.jpg
성명 추송웅 (秋松雄)
출생 1941년 9월 4일, 경상남도 고성군
사망 1985년 12월 29일 (향년 44세)
학력 서라벌예술대학 연극영화과
학력 아들 추상욱, 추상록, 딸 추상미

1. 개요2. 생애3. 저술 및 작품4. 상훈과 추모5. 기타

1. 개요

대한민국배우.

2. 생애

1941년 9월 4일 경상남도 고성군 고성읍 서외리 167번지에서 태어났다. 1947년 진주 천전국민학교, 1948년 마산 중리국민학교·내서국민학교·상남국민학교를 다니다가 부산으로 이주하여 사상국민학교를 거쳐 1953년 청룡국민학교를 졸업하였다. 1956년 동아중학교, 1959년 부산공업고등학교 건축과를 나왔다. 종교는 원불교

어릴 적부터 재주가 많아 신동이라 불리며 큰 잔치나 모임 등에 감초처럼 초대되었으며, 초등학교 시절에는 학예회의 주역이었다. 부산공업고등학교에서는 처음으로 연극반을 만들고 각본도 쓰면서 연출을 맡기도 하였다. 이후 서라벌예술대학 연극영화과에 진학하여 1963년 졸업하였다.

추송웅이 서라벌예대에 입학했을 때 유달리 떨어지는 외모왜소한 체격, 지독한 경상도 사투리, 게다가 사팔뜨기라는 핸디캡까지 있어 주변에서 "쟤는 어떻게 여기 들어온건가?" 라며 관심을 주지 않았지만 신입생 환영회 때 무대에 올라와서 폴 앵카Crazy Love팝송을 열창하고 현란한 춤솜씨로 관객들을 열광시키면서 저 녀석은 끼가 보통이 아니다 라는 찬사를 받았다고 한다.

1963년 극단 민중극장 창립 동인으로 창립 공연인 「달걀」에 출연하여 연극계에 데뷔한 것을 시작으로, 신조극장을 창단하고 연기 부장으로 활동하였다. 1965년 극단 가교의 창립 동인, 1966년 극단 광장 창립 동인으로 활동하다가, 1967년 극단 자유극장에 입단하고, 1979년 극단 현대극장에 입단하였다. 1980년 4월 살롱 '떼아뜨르 추'를 개관하고, 1982년 5월 극단 떼아뜨르 추를 창단하였으며, 1983년 8월 떼아뜨르 추 삼일로 극장을 개관하였다.

성격파 배우로서 독특한 희극적 연기술을 개발하여 소극풍(笑劇風)의 추송웅 스타일을 확립시켰는데[1], 이것은 주로 프랑스풍의 희극들에 출연하면서 구축되었다.

추송웅의 개성적인 연기와 성격 창조를 바탕으로 1977년 삼일로 창고 극장에서 공연한 모노드라마 「빠알간 피터의 고백」[2] 은 당대 최고의 화제작으로 떠올랐고, 일본 공연의 기회를 얻기까지 하였다. 추송웅은 자신의 연극 무대 데뷔 15주년을 자축하는 의미로 과감하게 아내의 곗돈 75만원을 털어 빠알간 피터의 고백을 기획하면서 원숭이의 생태를 체득하고자 창경원 동물원의 원숭이 우리 앞에서 하루 종일 원숭이를 바라보며 흉내까지 내는 등, 나중에 동물원 직원들이 수상하게 여겨 경찰에 신고할 정도로 몇날 며칠을 원숭이의 삶과 싱크로하려고 피나는 노력을 기울였다. 덕분에 빠알간 피터의 고백을 본 관객들은 하나같이 추송웅은 진짜 한 마리의 원숭이 그 자체였다는 극찬을 받을 수 있었다.[3]

이 작품은 추송웅의 또 하나의 모노드라마 「우리들의 광대」와 더불어 추송웅을 시대의 개성 있는 배우로 부상시켰을 뿐만 아니라 생소하였던 모노드라마의 가능성을 높여 주었다.

추송웅은 부산에서 「빠알간 피터의 고백」을 비롯하여 여러 작품을 공연하였다. 1976년에는 「세빌리아의 이발사」를 부산 시민 회관에서, 1977년에는 「동물원 이야기」를 부산 시민 회관에서, 1977년·1980년·1985년에는 「빠알간 피터의 고백」을 부산시민회관에서, 1979년과 1981년에는 「우리 집 식구는 아무도 못 말려」를 부산시민회관에서, 1980년에는 「우리들의 광대」를 부산시민회관에서, 1982년에는 해운대 해수욕장에서 공연하기도 하였다. 추송웅은 부산 사투리를 활용한 독특한 대사법을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 재학 시절에 연구하여 그만의 스타일로 만든 것으로 유명하였다.

이후 추송웅은 개성적인 연기로 연극은 물론 TV 드라마, 예능 프로 등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던 중, 1985년 12월 29일 자택으로 귀가한 후 복통을 호소하며 쓰러졌고 급히 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 끝내 소생하지 못했고 결국 향년 44세로 유명을 달리했다. 사인은 패혈증과 급성 신부전증이었다.[4]

3. 저술 및 작품

연극 출연 작품으로는 「달걀」[1963]·「뜻대로 하세요」·「도적들의 무도회」[1964]·「테모스 테스의 재판」·「동물원 이야기」·「위대한 곡예사」·「토끼와 포수」·「상선 떼나시티」[1965]·「이순신」·「들개」·「달이 뜰 무렵」·「따라지의 향연」·「꿀맛」·「윈저의 명랑한 아낙네들」·「인간 부결」[1966]·「햇불」·「저승에서 만난 부부」·「검찰관」·「한꺼번에 두 주인을」[1967]·「우정」·「그래도 막은 오른다」·「피크닉 작전」·「물리학자들」·「살인 환상곡」·「대수양」[1968]·「대머리 여가수」·「우정」·「마리우스」·「햇빛 밝은 아침」·「뿌리 깊은 나무들」·「흑인 창녀를 위한 고백」·「타이피스트」[1969]·「동물원 이야기」·「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소식」[1970]·「아가씨 길들이기」·「부부 연습」·「그물 안의 여인들」·「슬픈 카페의 노래」·「바다여 말하라」·「프로랑스는 어디에」[1971]·「기도」·「아버지 연설」·「세빌리아의 이발사」·「위선자 딸뛰프」·「소식」·「다라지 향연」·「라 뮤지카」[1972]·「타이피스트」·「도적들의 무도회」·「학당골」·「더블맨」·「카츄사」·「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1974]·「동리자전」·「출세기」[1974]·「보이책크」·「마의태자」·「소」[1975]·「주머니 속에서 탱고를」·「상둥이 모험」·「미란돌리나의 연인들」·「바다 풍경」[1976]·「빠담 빠담 빠담」·「보물섬」·「빨간 피터의 고백」[1977]·「빵집 마누라」·「북벌」·「우리 집 식구는 아무도 못 말려」·「살짜기 옵서예」[1978]·「피터팬」·「우리들의 광대」[1979]·「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초코렛 데이트」[1980]·「올리버 트위스트」[1983]·「파랑새」[1985] 등이 있다.

영화 출연 작품으로는 「돌아가는 삼각지」[1970]·「마음은 푸른 하늘」[1973]·「병태의 감격 시대」[1975]·「7인의 말괄량이」[1976]·「여자를 찾습니다」[1976]·「문」[1977]·「반금련」[1981]이 있으며, 방송 드라마 출연은 대학 시절 KBS 「긴 귀향 항로」[1962년]를 시작으로 단막극 「밧줄」·「첫과 끝」·「돈을 살려라」·「그날 일어난 일」·「피난처 있으니」·「태양 앞에 서서」[1963년] 등이 있다. 이후 기성 배우로서 연속극 「달동네」[1980~1981]·「사랑하는 사람들」[1984~1985]에 출연하였다.

그리고 자서전 『빠알간 피이터 추송웅』[1981]이 있다.

4. 상훈과 추모

1971년에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로 제7회 동아연극상 최우수 남자 주연상을 수상하고, 1973년에 「세빌리아의 이발사」로 제9회 동아연극상 최우수 남자 주연상을 수상하였으며, 1979년에 「빨간 피터의 고백」으로 한국연극영화 예술상 최우수 남자 연극연기상을 수상하였다.

5. 기타

자녀로서 배우영화감독으로 활동하는 추상미추상록이 있다.

배우 유해진이 중학생 때 추송웅 선생의 연기를 보고 감명을 받아 배우의 길을 걷게되었다고 한다.


[1] "연기를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추송웅같이 연기한 사람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다"라는 말이 있는데, 달동네 등 추송웅이 연기했던 드라마들을 몇 편 보게 되면 무슨 얘기인지 짐작이 갈것이다.[2] 원작은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어느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서이다.[3] 이후 빠알간 피터의 고백은 권혁풍과 장두이, 이원승, 주호성, 그리고 추송웅의 아들 추상록 등 여러 배우들이 리메이크 했지만, 아무도 추송웅을 뛰어 넘었다는 평가는 받지 못했다.[4] 훗날 추상미의 인터뷰에서는 아버지의 사인이 심근경색이었다는 언급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