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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一鴻
1932년 12월 15일 ~ 2023년 9월 16일 (향년 90세)
1. 개요
대한민국의 전 관료, 광역자치단체장, 공기업인이다.2. 생애
1932년 12월 15일 경상남도 고성군에서 태어났다. 진주고등학교(22회)[1]와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를 졸업하였다.[2]1956년 민의원 사무처 법제연구관을 시작으로 국가공무원 생활을 시작하였고, 1961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실 민원담당 비서관을 지냈다. 이후 국토건설단 건설원으로 징집되어 대체복무한 뒤 1963년 1월 11일 대한민국 육군 일병으로 전역하였다.[3] 전역 후 박정희 정부에서 중앙정보부 제3국장, 중앙정보부 정보담당관으로 재임하였다.
1980년 6월 18일 제1무임소장관실 정책연구실장(1급 관리관), 1981년 5월 28일 정무제2장관 보좌관 직무대리(1급상당), 1982년 3월 20일 체육부 기획관리실장 등으로 각각 발령되었다. 1985년 12월 23일부터 1988년 12월 12일까지 체육부차관, 1988년 12월 13일부터 1990년 12월 27일까지 제24대 관선 경상남도지사를 역임하였다.
1991년 1월 8일 국민생활체육협의회[4]가 창립되자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1998년까지 2대와 3대 회장직을 연임하였다. 2000년 11월 10일 제6대 서울올림픽기념국민체육진흥공단 이사장으로 임명되어 2002년 5월까지 역임하였다.
그러나 2001년 1월 타이거풀스 인터내셔널[5]의 전산시스템에 6가지 결함이 있으니 체육진흥투표권 사업자 우선협상 대상자 자격을 박탈해야 한다는 내부 보고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외부기관에 예정에 없던 위탁 실사를 지시하였다. 이때 타이거풀스의 전산시스템 구축공사를 수주한 LG-EDS시스템 상무이사 김모씨로부터 전산시스템 검정 및 감리과정에서 편의를 봐달라는 청탁과 함께 현금 1억원을 받은 것이 훗날 드러났다. 이에 2002년 5월 30일 서울지방검찰청 특수2부로부터 배임수재 혐의로 구속수감되었고[6], 2002년 7월 9일 서울지방법원 형사11단독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7] 이후 2002년 8월 28일 서울지방법원 형사3부에서 열린 항소심에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8]
이후 국민체육진흥공단 경영자문위원을 지냈다.
[1] #[2] #[3] 병무청공고제2001-9호(병역사항공개)[4] 2009년 6월 17일 국민생활체육회로 개칭되었으나 2016년 3월 7일 대한체육회와 통합되었다.#[5] 2002년 3월 스포츠토토로 회사 이름을 바꿨다.#[6] 2002년 5월 31일 한국일보 기사[7] 2002년 7월 9일 문화일보 기사[8] 2002년 8월 28일 경향신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