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2-02 08:17:40

찰스 잉 & 레너드 레이크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사건 사고 관련 서술 규정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1. 개요2. 살인범들
2.1. 찰스 잉2.2. 레나드 레이크
3. 범행 수법4. 진실이 드러나다5. 잉의 도주6. 여담

1. 개요



파일:external/thimg.todayhumor.co.kr/1412270201mjsaYzKRz.jpg

왼쪽이 찰스 잉, 오른쪽이 레나드 레이크

1983년에서 1985년까지 총합 11명을 살해한 연쇄살인범.[1] 별다른 이해관계가 없는 두 명이 살인을 위해 힘을 합친 점이 17년 뒤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용인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 김경훈, 허재필과 유사하다.[2]

다른 국적, 다른 나이대, 다른 인종의 범죄자들이 공동으로 저지른 연쇄살인이라는 점에서 상당히 특수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2. 살인범들

2.1. 찰스 잉

파일:external/www.gesomoon.com/138312202563455619.jpg 파일:84AD0092-5934-44F3-A3BD-5C69EB5934DB.jpg
젊은 시절의 찰스 잉. 유년기의 찰스 잉
찰스 잉(Charles Ng Chi-Tat, 吳志達. 광동어 발음은 '응치탓', 한국 한자음으로 '오지달'[3])은 1960년 12월 24일에 홍콩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부유한 사업가였으나 자식 교육에 엄격했다. 그는 교육에 엄격한 아버지에게 중압감을 느꼈고 학업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면서 점차 타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교육 강요로 인한 압박과 정신적 학대 등으로 인해 그는 반항아로 자라났고 문제투성이였던 그는 다니던 여러 학교에서 퇴학을 당했다.

잉의 아버지 케네스 잉은 아들의 삶의 방식이 바뀌기를 바라며 아들 찰스를 영국 요크셔에 기숙사가 있는 사립학교로 보냈는데 그곳에서 찰스는 그 학교의 교사이기도 했던 삼촌의 보호 겸 감시를 받아야 했다.

새로운 학교에서 찰스는 같은 반 친구의 물건을 도둑질하다가 걸리고 다른 학생들과 함께 살던 곳에 위치한 백화점에서도 도둑질을 하다가 붙잡혔으며 다시 한 번 퇴학당했다. 찰스 잉은 결국 홍콩으로 되돌아갔다.

찰스 잉은 계속해서 교육을 시키려던 부모에 의해 18세에 캘리포니아 주 벨몬트에 있는 노트르담 대학에 다니게 되었지만 평범한 생활은 잉의 흥미를 끌지 못했다. 찰스 잉은 한 학기가 끝난 후 그곳에서도 퇴학당했다.

캘리포니아에서도 찰스 잉은 끊임없이 트러블을 일으켰는데 1979년 10월에는 뺑소니 사고를 저지르기도 했다. 찰스 잉은 미합중국 해병대에 입대했다. 미국 시민이 아니었던 관계로 원칙적으로 미군이 될 수 없었지만 찰스 잉은 영어를 잘 하는 데다 자신의 출생지를 인디애나 주 '블루밍턴(Bloomington)'로 적은 가짜 서류를 제출함으로써 가능하게 만들었다. 오늘날에는 출생지를 이런 식으로 세탁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지만 1990년대 이전만 해도 공문서를 비롯한 각종 서류작업들이 종이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군인이 되어서도 찰스 잉의 사고는 바뀌지 않았다. 특히 잉은 자기 자신을 닌자로 해석했으며 끊임없이 해병대 동료들에게 자신의 살인 재능을 늘어놓았다. 이 때문에 해병대 동료들은 잉을 브루스 리라고 불렀으며 그를 전염병 대하듯 멀리했다.

병장으로 진급했을 무렵인 1981년 잉은 세 명의 공범자들과 함께 당시 주둔하던 하와이에 위치한 'Kaneohe' 해병대 기지 무기고에 침입해 11,000 달러 상당의 살상무기를 훔쳤는데 그가 가져간 무기들은 3정의 기관총, 7정의 자동권총, 야간 조준경 하나, 그리고 유탄발사기 하나였다.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난 후 잉은 미군 헌병에 의해 체포되었다. 영창에 갇히게 된 찰스 잉은 자신이 유죄 선고를 받을 것을 확신하면서 탈출을 계획했고 실행에 옮겨 성공했다. 찰스 잉이 도망쳐 간 곳은 캘리포니아였는데 거기에서 잉은 서바이벌리스트 잡지에 실려있던 용병을 구한다는 광고를 보고 그로 인해 레너드 레이크와 만났다. 잉은 레이크와 가학적인 면에서 죽이 잘 맞았다.

2.2. 레나드 레이크

파일:lake_001.jpg

청소년기의 레너드 레이크.[4]

Leonard Lake, 1945년 10월 29일 ~ 1985년 6월 6일(향년 39세)

1945년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난 레너드 레이크는 포르노 보이로 자라났으며 오랜 시간에 걸쳐 자기만의 환상에 젖어 살았다.[5] 그는 자신의 상상하던 내용을 담아 자신이 직접 주인공으로 출연하는 아마추어 본디지 포르노 비디오를 제작하기도 했다.

1964년 레너드 레이크는 해병대에 입대했는데 훈련소에서 레이더 특기병 훈련을 받았고 곧 이어 베트남다낭으로 보내졌다. 당시는 한참 베트남 전쟁이 벌어지던 시절이었지만 레이크는 살육이 벌어지는 전투에는 직접 참가하지 않았다.

처음 베트남에서 복무하던 동안 레이크는 초기 정신병 반응이 나타나면서 입원치료를 받았다. 당시 레너드의 상관들은 그의 상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치료가 끝났다고 생각된 레너드는 임무를 끝내기 위해 다시 자기 부대로 돌아갔지만 레이크는 군에 있는 동안 끊임없이 정신적인 문제로 시달렸다. 결과적으로 레너드 레이크는 'Pendleton' 캠프에서 2년 동안 정신과 치료를 받은 후 1971년 의학적인 문제로 인해 제대했다. 그는 병원 생활을 포함해 모두 합쳐서 7년 정도를 군에서 복무했으며 그에 대한 보상으로 베트남 공훈장과 베트남 종군기장을 비롯한 몇 개의 훈장을 받았다. 제대하고 나서 레너드 레이크는 캘리포니아 주 산호세로 가서 살았다. 제대 직후 병원에 입원해 심리 치료를 받았고 잠시 동안 산호세 주립 대학을 다니기도 했다.

민간인이 된 레이크는 결혼했지만 이웃들 사이에서 생존주의자[6]와 성도착자라는 평판을 얻게 되었다.

그는 자기 말을 들어 주는 사람들과 본디지 행위와 같은 것에 관해 이야기했으며 여러 여자들과 함께 자신이 주연으로 출연하고 수갑과 가죽 끈, 그리고 족쇄 등이 소품으로 사용되는 본디지 행위가 포함된 아마추어 포르노를 만들기도 했다. 그의 아내는 그런 그와 이혼했다.

1980년 레이크는 건설 공사 현장에서 단열재를 훔치다가 걸려 중절도로 기소되었으나 재판관에게 집행유예 1년이라는 비교적 관대한 판결을 받았다.

레너드 레이크는 1981년에 클라라린 발라즈를 만나 재혼했다. 결혼식을 끝낸 커플은 북부 캘리포니아 멘도시노 카운티 'Philo'에 위치한 공동목장으로 이주했는데 그곳은 사람들의 눈에 띄면 곤란한 여러 가지 부적절한 행위를 하기에 적당한 곳이었으며 레이크는 그곳에서 마리화나를 재배했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그 시기에 자신의 환상에 동조하는 파트너를 만났다는 것인데 그가 바로 찰스 잉이었다. 잉과의 만남을 통해 레이크는 오랜 시간 머리 속 깊은 곳에서 그려 왔던 자기의 환상들을 밖으로 꺼내면서 살아갔다. 레이크는 '곧 핵전쟁이 나서 지구가 망할 것이다'는 망상[7]을 가지고 자기 집에 벙커를 설치하고 많은 무기들을 구비하여 집을 요새처럼 꾸몄고 자신의 행위들을 기록해 나갔다. 레이크는 핵학살 이후를 대비해 여성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가 필요로 하는 여성들은 지구상에 계속해서 사람들이 살아가기 위해 요리와 청소, 그리고 그의 성적인 모든 충동의 편의를 제공할 수 있는 여자들이어야 했다. 그는 그런 목적으로 여성들을 찾아내고 붙잡아 그녀들을 완전하게 지배해야 하며 여자들은 철저하게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레이크는 핵학살 이후까지 자기가 만든 벙커에서 지내기로 계획했고 그곳에 최후의 날에 필요한 물건들과 무기들을 저장했는데 그곳에 숨겨진 시설을 갖추었고 인질을 감금하는 독방까지 만들었다. 그는 미 전역에 걸쳐 총기와 여자 성노예들이 완벽하게 갖춰진 벙커들을 계속해서 세우기로 계획하고 있었다.

3. 범행 수법

잉과 레이크는 사람들을 유인하거나 납치해 자신들의 집으로 데려왔는데 남자는 즉시 죽였고 여자는 죽을 때까지 성폭행과 고문을 가했으며 그 장면을 비디오로 찍어 녹화했다.[8]
파일:external/thimg.todayhumor.co.kr/14122702025pBAnQeEFXmd4MWQKQoSeLNMUHHV7h.jpg
잉과 레이크의 비디오 중 일부.

테이프의 어느 부분에 레이크가 안락의자에 홀로 앉아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자신의 벙커와 여성을 납치하고 성노예로 만드는 자신의 환상을 말로 설명했으며 한편으로 자신이 늙고 살이 쪄서 더 이상 여자들에게 매력적이지 못하다는 사실을 한탄하기도 했다.[9]

그는 자신의 인생을 다른 누군가의 것으로 대하는 것처럼 중요치 않게 생각하는 것으로도 보였다. 테이프에서 자기 희생자들에게 말을 하는 장면에서 레이크는 만약 무엇인가 잘못되어 있다면 자기는 서슴지 않고 자살을 하겠다고 했다. 그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말했다.

시체는 소각로에 소각하거나 집 근처 숲에 암매장했다.

4. 진실이 드러나다

1985년 6월 샌프란시스코의 작은 철물점에서 잉이 공구인 바이스를 훔치려다가 종업원에 들키고 말았는데 잉은 그대로 도주하고 이 사실을 몰랐던 레이크는 종업원의 신고를 받은 경찰에게 붙잡혔다. 경찰은 레이크가 탄 차량의 트렁크에서 군용 소음기가 장착된 22구경 권총을 찾았고 곧바로 레이크를 연행했다. 조사 결과 갈수록 가관이었다. 레이크가 제시한 운전면허증은 전혀 다른 사람인 로빈 스콧 스테이플리의 것이었고 레이크가 탄 차의 실제 차주는 폴 코스너였으며 번호판의 실제 주인은 로니 본드였다. 그리고 로빈과 폴, 로니 모두 당시 실종 상태였다.

연행된 레이크는 결국 자신이 로빈, 폴, 로니를 살해했음을 자백했고 경찰관에게 물 한 컵과 필기구를 달라고 요청했는데 종이에 간단한 메모를 남긴 뒤 가지고 있던 청산가리 캡슐을 삼켜 버렸다.

그는 의식불명 상태가 되었고 경찰은 그를 병원으로 후송했지만 4일 후 사망했다. 당시 종이에는 아내에게 자살해서 미안하다는 글이 적혀 있었다.[10]

파일:leonard-lake1.jpg

당시 경찰에 체포된 레너드 레이크.

레이크가 자살하자 경찰은 그의 집으로 찾아갔다. 처음 보안관은 레이크의 집을 수색하면서 끔찍한 일이 집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레이크의 침실 벽 여기저기엔 커다란 갈고리들이 걸려 있었으며 집 앞마당에서 발견된 흙구덩이에서 사람을 태우고 남은 재와 치아, 유골 조각들이 발견되었다. 구덩이 바로 옆에는 소각로가 있었고 숲으로 이어진 길에는 조잡하게 지어진 벙커 한 개가 있었다. 벙커 문을 부수고 들어간 경찰은 내부에서 가구와 수갑들을 발견했고 창문 없는 작은 방으로 이어지는 문 하나도 발견했다.

파일:external/thimg.todayhumor.co.kr/1412270201CEXmMuPkEuhDFuzOL7RbxS.jpg

벙커 내부의 작은 방.

작은 방의 벽에는 젊은 여성들의 사진이 가득 붙어 있었는데 그 중 일부는 실종 신고가 되어 있었다.

그들은 주도면밀하게 시체를 처리했기 때문에 경찰 당국도 정확한 희생자 수를 알 수 없었다. 경찰이 밝힌 공식적인 희생자 수는 25명 정도였다. 수많은 인원으로 2주간 대대적인 발굴을 끝낸 경찰은 9구의 부패한 시신과 까맣게 탄 유골 18kg을 수습했다.

지역 검시관은 시신의 신원을 확인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라고 말했으며 레이크는 자살하였고 잉은 도주 중이었다. 경찰은 정확한 희생자의 수와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잉을 붙잡아 자백받아야만 했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 잉의 행방을 쫓았다.

5. 잉의 도주

잉은 이미 캐나다로 도망친 상태였다. 많은 아시아계 사람들 중 잉을 찾을 돌파구를 마련해 준 사람은 다름 아닌 잉 자신이었다.[11] 1985년 7월 잉은 캐나다의 한 백화점에서 물건을 훔치다가 체포되었다. 잉은 경비원에게 총을 쏴서 살인미수 혐의로 4년 6개월형을 선고받았다. 미국 당국과 경찰들은 캐나다 측에 잉의 신변인도를 끈질기게 요청했다.

하지만 캐나다 법무부 장관 존 크로스비는 미국의 요구를 거부했다. 캐나다는 이전에 사형 제도를 폐지했고 미국과 범죄인 인도조약을 맺으면서 사형 판결을 받을 만한 중죄를 저지른 어떤 형사피고인도 미국으로 돌려보내지 않아도 되었다. 캐나다의 몇몇 최고위층 인사들은 미국이 사형시키지 않는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 한 찰스 잉을 절대로 미국으로 돌려보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로 인해 잉은 캐나다에서 선고받은 형기가 끝날 때까지, 혹은 그 이후에도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될 가능성이 생겼다. 어쨌든 잉은 시간을 벌었다.

그 사이 잉은 자신이 수감되어 있던 교도소의 독방에 앉아 책을 보며 공부를 시작했다. 그가 자기의 대부분의 시간을 소비하면서 봤던 책들은 미국 법률에 관한 내용이 적혀 있었던 것들이었다. 당연한 것이겠지만 찰스 잉은 계속 캐나다에 남으려고 했다. 그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십 차례에 걸쳐 법률에 호소했고 캐나다 법정에서는 그에 따른 증언 청취가 계속해서 반복됐다. 찰스 잉의 뻔한 법률 플레이는 끝이 없이 계속될 것처럼 보였다.

그러던 1991년 9월, 마침내 캐나다 대법원이 잉의 미국 송환을 결정했다.

파일:external/www.gesomoon.com/138312358404657714.jpg

송환된 잉.

1999년 찰스 잉은 사형을 선고받았다. 재판 비용이 200억원이 넘었다고 하는데 주 역사상 가장 비싼 재판 중 하나였다고 한다.

파일:external/thimg.todayhumor.co.kr/1412270202BLK2PPdwaNIoC1xrS5NXioy4gnZJMalV.jpg

파일:external/www.gesomoon.com/138312369958398615.jpg

재판을 받는 잉.

사건 이후 잉은 샌 쿠엔틴 교도소[12]에서 사형수로 지내고 있다.

레나드 레이크의 부인이였던 클라라린 발라즈는 수사관들과 협조하는 것을 대가로 기소 면제 처분을 받았으며 찰스 잉의 재판에 증인으로 참석하기도 했다. 사건 이후에는 다른 사람과 결혼해서 잘 살고 있다. 단 불편한 부분이 하나 있다면 미국으로 압송된 뒤 모든 혐의를 순순히 인정한 찰스 잉이 정작 발라즈에 대한 진술만큼은 침묵한 점이다. 즉 일정 부분 가담한 공범 혹은 범행에 협조한 동조자일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는 뜻이다.

6. 여담

찰스 잉은 국제법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 마주치게 되는 이름인데 잉이 “사형제가 폐지된 캐나다에서 사형이 여전히 집행되고 있는 미국으로 자신을 송환하는 것은 반인권적 행위”라며 국제연합 산하 인권규약위원회(Human Rights Committee)에 청원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인권위원회는 “사형 폐지국인 캐나다가 미국으로 잉을 송환하는 것은 사형의 우회집행이 될 수 있으므로, 이는 (캐나다가 가입한) 시민적 및 정치적 권리에 관한 규약(ICCPR)의 생명권 및 비인도적 대우를 받지 않을 권리에 대한 침해”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 판례는 국제인권법 분야에서 리딩 케이스 중 하나로, 인권위원회가 국가 간 범죄인 인도에 대해 적극적인 법해석을 한 대표적인 사례로 꼽혀 주요 교과서와 판례평석에 거의 예외 없이 등장한다.

다만 찰스 잉이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이라는 것 정도만 간략하게 사실관계 차원에서 언급되고 구체적으로 어떤 극악무도한 짓을 했는가에 대한 설명은 없기 때문에 그가 위와 같은 끔찍한 짓을 저질렀다는 사실은 모르고 쟁점 중심으로 판례를 익힌 후 넘어가는 수험생들이 대부분이다.
[1] 재판에서 인정된 피해자 수이며 실제로는 25명 정도를 살해했을 것으로 추정된다.[2] 심지어 한 명은 자살한 것까지도 똑같다.[3] 정말 우연찮게도 이름이 배우 오맹달(吳達, Ng Man Tat)과 한 글자 차이다.[4] 14세에서 15세 사이에 촬영된 사진이라고 한다.[5] 레이크가 꿈꾸었던 환상은 다른 것도 있었겠지만 다른 사람들, 특히 여자들 위에 군림하려고 했던 것이었다.[6] Survivalist: 전쟁이나 재해 등에서 살아남기 위해 미리 대비하는 사람.[7] 물론 1980년대는 냉전의 마지막 절정기였으므로 일반인으로써 핵전쟁에 대한 공포를 느끼고 대비책을 세우는 것 자체는 특이한 일은 아니다. 이러한 세계적 공포의식과 넓은 땅덩어리 때문에 미국은 특히 생존주의가 흔한 나라다.[8] 그리고 이것은 법정에서 이들의 혐의를 입증하는 데 아주 중요한 증거가 되었다.[9] 당시 레이크는 생일만 지나면 40살이었다. 21세기에는 40살은 늙은 게 아니지만 1980년대에 40대는 21세기의 50대보다 좀 더 늙었다고 취급받았다.[10] 여담으로 이 점도 용인 연쇄살인 사건의 범인 중 한 명인 김경훈과 비슷하다. 김경훈도 교제 중이던 여자친구에게 미안하다는 편지를 남긴 채 자살했다.[11] 잉이 캐나다에 쉽게 갈 수 있었던 건 자신의 누이가 캐나다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12] 캘리포니아 주에서 가장 오래된 교도소이자 찰스 맨슨, 로드니 알칼라, 윌리엄 보닌, 리처드 체이스 등 수많은 범죄자들과 사형수들이 거쳐간 감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