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09 17:53:08

찰리 멍거

<colbgcolor=#303099><colcolor=#fff> 前 버크셔 해서웨이 부회장
찰스 토머스 멍거
Charles Thomas Munger
출생 1924년 1월 1일
미국 네브래스카오마하
사망 2023년 11월 28일 (향년 99세)
미국 캘리포니아패서디나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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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미시간 대학교 (수학 / 중퇴)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 (기상학 / 수료)
하버드 대학교 (J.D.)
직업 변호사, 기업인, 투자자, 건축가
경력 버크셔 해서웨이 (부의장 / 1978년 ~ 2023년)
재산 26억 달러[1][2] (2023년 10월 / 포브스)
연봉 10만 달러[3][4] (2022년)
부모 앨프리드 C. 멍거, 플로렌스 멍거
배우자 낸시 허긴스 (1945년 ~ 1953년)
낸시 배리 (1956년 ~ 2010년 사별)
자녀 찰스 T. 멍거 주니어, 에밀리 멍거 오그든, 웬디 멍거, 몰리 멍거, 배리 A. 멍거, 필립 R. 멍거

1. 개요2. 생애3. 투자관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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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변호사 출신 투자가, 기업인.

웨스코 파이낸셜과 코스트코 등에서 이사회 이사를 역임했고 버크셔 해서웨이에 합류해 부회장(이사회 부의장)으로 재직하며 거물급 투자가인 워렌 버핏 회장의 오른팔로 활약했다. 1924년생으로 버핏보다 6살 연상이지만,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동업자로서 공식 석상에 자주 동행했다. 버핏의 유명세에 어느 정도 가려져 있지만 엄연히 가치 투자의 대가로 손꼽히며 성공한 투자자산가의 상징으로 칭송받고 있다. 2010년대 이후로 90대 중후반에 접어든 고령임에도 버핏과 함께 버크셔 해서웨이 주주총회에 참석하는 등 꾸준히 공개 활동을 이어왔다. '오마하의 현인'으로 불린 워렌 버핏에 빗대어 패서디나의 현인(Oracle of Pasadena)으로 불렸다. 버핏과 같은 오마하 출신이지만 패서디나에 거주했기에 붙은 별명.

2023년 말 자신의 100세 생일을 한 달여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2. 생애

1924년 1월 1일 미국 네브래스카오마하시에서 태어났다. 미시간 대학교를 입학했으나 중퇴하고 제2차 세계 대전에 뛰어들어 공군 장교로 복무하였다. 전투기를 위한 기상 예측하는 일을 담당했는데 미공군은 이를 위해 찰리를 패서디나에 있는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에 보내 수학하도록 한다. 이 때 인상이 매우 좋게 남았는지 패서디나를 사망 전까지 평생의 집으로 삼게 된다. 1948년에 하버드 대학교 로스쿨을 졸업했다.[5][6]

멍거는 특유의 지성과 성실함으로 성공적인 변호사 생활을 했지만 당시에는 변호사가 지금처럼 수입이 좋은 직업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첫째 아들 테디 멍거가 8살에 소아백혈병에 걸려 1년만에 사망한다. 아들의 치료비로 전 재산을 소모한 상황에서 첫째 부인 사이에 낳은 자녀 2명, 둘째 부인 사이에 낳은 자녀 4명과 둘째 부인이 전 남편 사이에 낳은 수양자녀 2명 총 8명의 자녀를 부양해야 했다. '내가 좀 더 부자였다면 아들을 살릴 수 있었을까?' 하는 회한과 8명의 자식을 부양해야 하는 책임감으로 멍거는 경제적독립을 위해 투자업에 손을 대기 시작한다.

멍거 톨스 앤 올슨(Munger, Tolles & Olson) 로펌에서[7] 부동산 전문 변호사로 일하다 웨스코 파이낸셜 CEO로 재직했으며, 1978년에 버크셔 해서웨이에 이사로 합류해 이사회 부의장을 맡았다. 이 때부터 워렌 버핏과 함께 가치 투자로 대성공을 거두며 투자가로서의 명성을 날렸다. 부회장 재임 기간 동안 버크셔 해서웨이의 가치 투자 원칙을 정립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023년 11월 28일 캘리포니아주의 병원에서 노환으로 타계했다. 향년 99세. 1924년 1월 1일생이므로 2024년 새해의 시작과 함께 100세 생일을 맞이할 예정이었으나 이를 단 한 달 앞두고 세상을 떠나게 됐다. 절친한 벗이자 평생의 동업자였던 워렌 버핏을 비롯해 투자업계의 수많은 이들로부터 애도와 추모의 메시지가 쏟아졌다.
버핏이 쓴 멍거에 대한 추모글

3. 투자관

워렌 버핏과 마찬가지로 가치투자자이다. "모든 현명한 투자는 가치투자이다."라고 자주 말한다. 기업을 내재 가치보다 낮은 가격에 사서 수익을 내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투자 행위라는 것이다.[8] 다만 "누군가는 강한 기업들에서 가치를 찾고, 다른 누군가는 약한 기업들에서 가치를 찾는" 차이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벤저민 그레이엄의 방식이었던 철저히 장부 가치에 기반한 극단적인 조건을 충족하는[9] 약한 기업들의 포트폴리오를 구성하고 매년 갈아끼우는 담배 꽁초 전략에 추가적으로 직접 약한 기업들의 경영에 뛰어들어 구조조정 등 피바람을 가져오고 골머리를 썩이며 턴어라운드를 가져오는 방식이 버크셔 해서웨이의 덩치 수준에서는 영위하기 힘든 전략인 것을 주장하며 위대한 기업을 적당한 가격에 사는 투자 방식을 버핏에게 전수한다.[10] 그가 선호하는 기업들은 첫째로 이해할 수 있는 사업이어야 하고, 둘째로 장기적으로 지속가능한 경쟁우위를 지니고 있어야 하며, 셋째로 신뢰할 수 있는 경영진이 운영하고 있는 기업이어야 한다는 조건을 만족해야 한다.[11]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무리 좋아도 무한대의 가격을 지불할 수는 없으니 합리적인 가격이어야 한다는 워렌 버핏이 제시하는 조건을 찰리 멍거도 공유한다.

다만 투자하는 분야에서 차이가 있다. 미국의 미래에 대해 무한한 신뢰를 보이는 워렌 버핏과 달리 찰리 멍거는 미국이 문명으로서 최고점에 도달했거나 거의 도달해서 이제 내리막길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때문인지 중국 투자를 선호한다. 재산의 상당량을 중국계 미국인 투자가 리 루(Li Lu)가 운영하는 차이나펀드에 투자했고 버크셔 해서웨이의 중국 전기자동차이차 전지 제조기업 BYD에 대한 투자도 찰리 멍거가 주도했다.

좋은 투자감이지만 저평가된 부동산을 찾기가 매우 어렵다는 이유로 부동산 투자를 기피하는 버핏과 달리 부동산 투자에 적극적이다. 아마도 젊었을 때 성공적이었던 부동산 투자 경험에서 기인한듯 하다.

비트코인같은 가상자산에 매우 부정적이다. 가상자산 거래에 뛰어드는 기관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똥을 거래하는데 나라고 빠질 수 없지.(Somebodyelse is trading turds and you decide I can't be left out.)"라는 꼴이라고 표현했다. 그 외에도 가상자산을 쥐약, 성병, 치매라고 부르며 비판했다.

4. 여담

  • 워런 버핏과 마찬가지로 엄청난 독서광이라고 하는데 그런 거물급 투자자가 되려면 사실 독서는 기본 조건이라고 볼 수 있다.
  • 찰리 멍거가 쓴 유일한 책으로는 Poor Charlie’s Almanack(가난한 찰리의 연감)[12]이 있다. 자신의 투자 방법, 가치투자의 장점, 기업을 바라보는 시각, 인간을 바라보는 심리학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굉장히 내용이 알차고 시각적인 자료도 다양하여 투자자들이 읽어야 할 대표적인 바이블로 인정 받고있다. 하지만 멍거는 이 책을 미국 내 영어판 판매만을 원칙적으로 허용하고 해외 번역, 출간을 허용하지 않는다. 다만 매우 예외적으로 멍거의 투자 파트너인 루이 리가 5년 동안 엄청나게 설득한 끝에 중국만 예외적으로 번역 출간을 허용하게 되었다.
  • 형제자매로는 메리와 캐럴이 있고[13] 배우자는 낸시 배리와 낸시 허긴스이다. 자녀는 찰스 T. 멍거 주니어, 에밀리 멍거 오그덴, 몰리 멍거, 웬디 멍거, 필립 R. 멍거, 배리 A. 멍거를 두고 있다.
  • 백내장 수술 실패로 한쪽 눈을 적출하였으며 때문에 한쪽 눈이 의안이다. 남은 눈도 시력을 많이 잃었다고 한다. 눈이 부자연스러워 보이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 워런 버핏버크셔 해서웨이의 기업 문화를 만든 사람은 찰리 멍거이고 자신은 실행만 했을 뿐이라고 평한다.[14] 반대로 멍거는 그러한 평가는 과장되었고 버핏은 자신이 없었어도 엄청난 부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서로를 높여주었다는 훈훈한 일화이다.
  •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싱가포르의 국부 리콴유를 꼽는다.
  • 건축 설계가 취미이며 현재 살고 있는 집도 본인이 직접 설계했다. 여러 대학에 기숙사를 지을 돈을 기부하며 기숙사를 직접 설계했다. 설계한 기숙사는 학생 개인의 방은 작게 만들어 보통의 기숙사보다 많은 인원을 수용할수 있도록 하고 공용 공간은 넓고 채광도 좋게 만들어 학생들이 각자 방에만 머무르기 보다는 공용 공간으로 나와 다른 학생과 교류하도록 유도하는 컨셉이라고 한다.
  • 민감할 수 있는 질문을 받으면 가능한 실명 언급을 피하고 중립적인 표현을 써가며 대답하는 워런 버핏에 비해 직설적인 화법을 구사한다. 버크셔 해서웨이 주주총회에서 기업가치를 평가하는 공식에 대해 질문을 받자 "공식을 사용하지 않으니 알려줄 공식이 없다. 공식을 배우고 싶으면 대학원에 가라. 쓸모없는 공식을 잔뜩 알려줄거다."라고 대답했다.
  • 브룩스 브라더스 제품을 매우 좋아해서 자녀들 생일선물로 해당 브랜드의 상품권을 선물로 주었다고 한다.
  • 평소에 검소하게 살았으며, 말년에도 자신의 자동차는 직접 운전했다. 국내 기사
  • 알리바바에 투자했다가 실패해서 스스로 자책을 많이 했다. 죽기 전 마지막 인터뷰에 따르면 위험을 피하고 광기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1] 버크셔 지분 0.3%에 해당되는 A주 4,170개 보유.[2] 사망 당시 기준 한화 약 3조 3514억 원[3] 2022년 버크셔 해서웨이 프록시 보고서 기준.#[4] 사망 당시 기준 한화 약 1억 2890만 원[5] 로스쿨에 지원했을 때 대학교를 중퇴하여 학위가 없었기 때문에 입학을 거절당했으나 장교 경력과 할아버지는 네브래스카주 연방판사, 아버지는 변호사인 법조인 집안의 인맥으로 입학한다.[6] 멍거의 아이들은 하버드와 인연이 깊을 것 같지만, 멍거의 자식 8명 중 5명이 스탠퍼드를 다녔으며 찰리 멍거의 외손녀 애나 멍거 또한 4대째 스탠퍼드를 졸업했다. 멍거의 아내 낸시 멍거와 낸시의 부모님은 대대로 스탠퍼드 대학교를 졸업한 재원들이다.[7] 명칭을 봐도 짐작 수 있듯이, 찰리 멍거가 Leroy Tolles(1922-2008), Ronald Olson(1941-)과 함께 1962년에 설립했다. 멍거 사망 당시까지도 성업 중이다.[8] 버핏의 버크셔 해서웨이 주주서한에서는 더 극단적으로 "투자"라는 단어에 굳이 "가치"라는 형용사를 붙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한다.[9] 당시 실적 보고서는 전적으로 투자자를 끌어모으길 원하는 기업이 자발적으로 발행했고, 투기도 심하고, 주가 조작에 대한 규제도 약했고, 기업 정보도 관심있는 소수의 사람이나 우편이나 정기간행물을 받아 열람하는 열악한 조건이었다. 안 그래도 폭락장을 경험해 보수적인 투자를 고수한 그레이엄이 괜히 경영진이 회사 실적을 뭐라 포장하든 배제해버리고 전적으로 안전 마진을 넣은 초저가로 매수한 보유 주식들의 평균 실적에 의존하는 퀀트에 가까운 초강수를 쓴 것이 아닌 것.[10] 이러한 방식으로 처음 투자한 곳이 시즈캔디이다. 다만 세간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멍거 본인도 제시된 가격이 너무 비싸다고 생각했으나 또 다른 친구의 설득에 의해 매수 결정을 하게 된다. 시즈캔디 측에서 조금만 더 높은 가격을 불렀으면 본인도 반대했을거라고 한다.[11] 필립 피셔의 책 위대한 기업에 투자하라를 읽어보면 더 자세히 알 수 있다.[12] 찰리 멍거가 우상으로 여기는 벤자민 프랭클린이 쓴 책 Poor Richard's Almanack(가난한 리차드의 연감)에서 따온 제목이다.[13] 이름을 봤을 때 누이(누나 혹은 여동생)들로 보이며 외아들인 것 같다.[14] 2024년 나온 버크셔 해서웨이의 주주서한에서 워렌 버핏은 오랜 친구이자 동료인 찰리 멍거를 기리며 찰리 멍거야 말로 버크셔 해서웨이의 설계자였으며 자신은 도급업자였을 뿐이라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