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6-08-02 13:31:37

주문모

<colbgcolor=#000><colcolor=#fff>
주문모
周文謨 | Zhōu Wénmó

복자 주문모 야고보
Beatus Iacobus Zhou Wenmo
파일:주문모 야고보.jpg
주문모 신부의 초상화[1]
본명 주문모()
출생 1752년
청나라 소주부 곤산현
사망 1801년 5월 31일
한성부 서부 용산방 새남터
(現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촌로 80-8, 새남터성지)
국적 파일:청나라 국기.svg 청나라
종교 가톨릭
사인 참수형 & 군문효수형
직업 사제
세례명 야고보
시복 2014년 8월 16일, (교황 프란치스코)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

1. 개요2. 생애
2.1. 성장과 조선 선교2.2. 을묘박해와 재기2.3. 신유박해와 순교
3. 시복4. 기타

1. 개요

청나라 출신의 가톨릭 사제, 조선에 입국한 최초의 외국인 선교사였다. 그와 동시에, 조선에서 최초로 순교한 외국인 선교사이기도 하다.

2. 생애

2.1. 성장과 조선 선교

1752년 청나라 장쑤성(江蘇省) 쑤저우(蘇州) 쿤산현(崑山縣)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7세에 어머니를 잃고 8세에 아버지를 잃었다. 고모 슬하에서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과거를 보았으나 계속 낙방하자 20살 때 결혼하였다. 3년 만에 아내와 사별하고 홀로 지내다가 늦은 나이에 북경교구 신학교에 들어갔으며, 제1회 졸업생이 되었다.

당시 조선에서 신앙 생활을 이어가던 신자들은, 복자 윤유일 바오로[2]의 활동으로 청나라 교구에 사제 파견을 요청했고, 그에 대한 화답으로 주문모 신부가 파견되었다. 동양인인 주문모 신부는 윤유일의 인도 아래 1794년 말 무사히 조선에 입국[3]하여 포교 활동을 하기 위해 최인길 마티아[4]의 집에서 거점을 마련한다. 이와 같은 조건은 한양의 고위 계층들에게 포교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었으며, 정약종과 같은 남인들과 교류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2.2. 을묘박해와 재기

1795년 배교자 한영익의 밀고[5]로 순식간에 관계자들이 모두 위험해지는 일이 발생한다. 이에 1795년 6월 포졸들이 최인길의 집을 덮쳤으나, 최인길 마티아가 청나라 사람처럼 주문모로 위장하여 시간을 벌었고, 이미 주문모는 당시 조선 천주교인 여회장이었던 강완숙 골롬바[6]의 집으로 피신해있었다. 하지만 주문모 신부가 아님을 안 관군들에게 끝까지 행방을 알려주지 않던 윤유일(바오로), 지황(사바), 최인길(마티아)는 모두 체포 다음 날 순교한다. 이를 을묘박해라고 부른다.[7]

강완숙 골롬바에 의해 재정비한 조선 천주교는 다시 한번 포교 활동에 나섰으며,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신유박해가톨릭/대한민국 항목에서 자세히 볼 수 있다. 주문모 신부는 당시 조선 천주교인을 4,000명에서 1만명으로 늘리는 등 큰 활약#을 하게 된다. 특히 조선 정계에 진출한 남인 정치인에게 많이 포교되었다.

하지만 그나마 천주교 탄압에 상대적으로 온건하던 정조가 죽고, 순조의 즉위와 정순왕후 김씨수렴청정이 시작되면서 피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2.3. 신유박해와 순교

정조 15년
(1791년)
순조 1년
(1801년)
헌종 5년
(1839년)
헌종 12년
(1846년)
고종 3년
(1866년)

정순왕후 일파의 정치적 숙청 목적도 얽혀, 정약종무부무군(無父無君) 사건이 터지며 조선 천주교에는 박해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이를 신유박해라고 부르며, 강완숙 골롬바는 주문모 신부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황해도의 바닷길을 이용하여, 주문모 신부를 청나라로 피신시키려 한다.

이때 주문모 신부는 황해도 황주까지 갔다가, 피신할 바에는 자수하겠다는 생각으로 서울로 돌아와 의금부에 자수하였다.[8]

이에 조선 조정과 정순왕후 김씨청나라 국적을 가지고 있는 주문모 신부를 함부로 처형할 수 없어 고심하였다. 그러나 주문모가 조선인 신도들에게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겠다'라는 말을 들은 것을 확인하고, 청나라로 보낼 경우 현지 관원들에게 곡절을 밝히는 와중에 트집을 잡힐까 우려하였다. 이에 결국 군법으로 빠르게 참하기로 결정했다.

1801년, 주문모 신부는 새남터에서 군문효수로써 순교하였다.

이후 황사영 백서 사건이 발생하자 다시 한번 언급되는데, 조선 정부는 이때 청나라에 주문모를 베었다고 조윤대의 연행사 편에 상주한다. 청나라 가경제는 주문모가 애초에 중요한 인물도 아니고, 이미 가경제도 천주교를 탄압하는 동병상련(?) 입장이었기에, 북경 천주교당과 조선 천주교의 연루만 부정하고 조용히 덮고 넘어간다.#

3. 시복

많은 박해를 딛고 버틴 한국 천주교는 이후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시성식을 무사히 마쳤다. 훗날 한국 천주교회는 교황 프란치스코방한과 함께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 시복식을 무사히 치름으로써, 주문모 신부는 복자품에 올랐다.

4. 기타

  • 2025년 영화 지충일기에서는 이효겸이 연기했다.
  • 조선에 파견된 최초의 외국인 가톨릭 사제임에도 불구하고 개인 문서는 여러 선교사들보다 늦게 작성되었다.

[1] 가회동 성당 공동 주보성인에 대한 초상화[2] 역관으로, 훗날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에 포함되었다.[3] 엥베르 주교와 같은 프랑스인 사제들은, 외모가 서양인이라 조선 입국부터 애를 먹어야 했다. 그래서 보통 서양인 신부들은 밤에 압록강을 넘거나, 배를 타고 밀입국해야 했다.[4]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에 포함되었으며, 윤유일 바오로처럼 역관이었다.[5] 이벽의 동생 이석이 가문의 풍비박산 원인을 천주교로 생각했기 때문에, 한영익을 통해서 조선 천주교의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6]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에 포함되었다.[7] 참고로 이 사건 2개월 뒤 대사헌 권유가 이 사실을 알고, 세 사람을 일찍 죽게 해서 주 신부 체포의 기회를 놓쳤다는 상소를 올려 문제를 재연시켰다. 그리고 이 사건이 알려지면서 부사과 박장설 등이 천주교와 관련해서 이승훈·이가환·정약용을 성토하는 상소를 계속해서 올리자 마침내 이승훈은 예산으로 유배되고, 이가환은 충주목사, 정약용은 금정찰방으로 각각 좌천되었다.[8] 이때의 모습이 베드로의 순교와 흡사하다고 생각되었는지, 2차 창작에선 쿠오 바디스의 이미지를 차용하는 경우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