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CBE0A7><colcolor=#000> 초대 노퍽 공작 존 하워드 John Howard, 1st Duke of Norfolk | ||
| ||
이름 | 존 하워드 John Howard | |
출생 | 1421년 또는 1428년 | |
잉글랜드 왕국 | ||
사망 | 1485년 8월 22일 | |
잉글랜드 왕국 보스워스 평원 | ||
배우자 | 캐서린 드 몰린스 (1442년 또는 1443년 결혼/1465년 사망) 마거릿 챈드워스 (1467년 결혼) | |
자녀 | 토머스, 앤, 이사벨라, 조앤, 마거릿, 니콜라스, 캐서린 | |
형제 | 캐서린, 마거릿 | |
아버지 | 스토크 네일랜드의 기사 로버트 하워드 | |
어머니 | 마거릿 모브레이 | |
직위 | 노퍽 공작, 잉글랜드 백작 원수, 가터 기사단 단원 |
1. 개요
잉글랜드 왕국 공작, 군인. 장미 전쟁 시기 요크 왕조 편에서 랭커스터 왕조에 대적했고, 1483년 에드워드 4세가 사망한 후 리처드 3세의 왕위 계승에 적극적으로 협조한 공으로 노퍽 공작 작위를 받았다. 이후 버킹엄 공작의 반란 진압에 기여하는 등 리처드 3세를 위해 싸웠으나, 보스워스 전투에서 전사했다.현재까지도 잉글랜드의 첫 번째 공작(Premier Duke)이자 애런델 백작으로서 잉글랜드의 첫 번째 백작(Premier Earl)이며 문장원 총재(Earl Marshal)직을 세습하는 노퍽 공작 하워드 가문의 시조이기도 하다.
2. 생애
하워드 가문은 전승에 따르면 윌리엄 1세가 잉글랜드를 정복할 때 이에 맞선 앵글로색슨족 저항 운동의 지도자 헤리워드 더 웨이크의 후손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전승의 진위는 불분명하다. 이 가문의 기록상에서 알려진 가장 오래된 대표자는 1295년 대법원장이자 하원 의원을 지낸 위겐홀의 윌리엄 하워드 경(? ~ 1308)이었고, 그의 아들인 위겐홀의 존 하워드(? ~ 1331)는 노퍽과 서퍽의 보안관이었다. 그는 콘월의 리처드의 사생아였던 조앤과 결혼했다. 이후 하워드 가문은 14세기 중반까지 이스트 앵글리아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들은 성공적인 결혼 동맹과 매입을 통해 비숍스 린 인근 5개 영지를 확보했다.기록상에서 세 번째로 알려진 존 하워드(1366 ~ 1437)는 가문의 영지를 대폭 늘렸다. 제5대 플레이스 남작 존 플레이스의 딸이자 상속녀인 마거릿 플레이스와 첫번째로 결혼하여 토프트의 플레즈, 위딩, 노퍽 지방의 냅튼 영지를 물려받았고, 이스트 앵글리아 외부의 스탠세드 마운트피셋, 베네필드 버리, 에식스의 오클리와 모스, 서식스의 첼스워스, 캠브리지셔의 파울미어를 상속받았다. 그는 이러한 영지에서 117파운드의 연간 수입을 받았다. 1391년 첫번째 아내 마거릿이 사망한 후에도 영지를 계속 관리했다. 그 후 스토크바이넬이랜드의 기사 윌리엄 텐드링 경의 딸인 앨리스 텐드링과 재혼해 에식스와 서퍽의 경계에 있는 추가 영지를 얻었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이 스토크 네일랜드였다. 그는 결혼을 통해 획득한 토지 덕분에 잉글랜드 의회의 3개 주에서 하원 의원 선거에 출마할 수 있었으며, 1404년에는 연간 순소득이 500파운드를 초과한 몇 안 되는 잉글랜드 영주 중 한 명이었다.
이렇듯 가문의 영지를 대폭 늘린 존 하워드의 두번째 아들인 스토크 네일랜드의 기사 로버트 하워드는 백년전쟁 시기 헨리 5세가 프랑스 원정을 단행할 때 군대를 유럽 대륙으로 수송하는 함대를 이끌었으며, 토머스 모브레이의 장녀 마거릿 모브레이와 결혼했다. 이 결혼에서 태어난 외아들 존 하워드가 이 문서의 주인공이다. 로버트 하워드는 마거릿 모브레이와의 사이에서 두 딸 캐서린과 마거릿을 추가로 낳았는데, 장녀 캐서린은 초대 에버게이브니 남작 에드워드 네빌의[1] 두 번째 부인이 되었고, 마거릿 하워드는 토머스 다니엘 경의 아내가 되었다.
존 하워드는 일찍이 아버지 로버트 하워드를 여의고, 외사촌인 제3대 노퍽 공작 존 모브레이의 궁정에서 지냈다. 1452년 잉글랜드군의 아키텐 구원전에 참여했으며, 1453년 7월 17일 카스티용 전투에 참전했다가 목숨을 가까스로 건지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 후 그는 노퍽 공작 휘하에서 복무하기 시작했다. 장미 전쟁이 발발했을 때 노퍽 공작을 따라 요크 왕조 편에 서서 기사로서 여러 전투에 참여했다. 일설에 따르면, 1461년 3월 29일 토우턴 전투에서 노퍽 공작을 대신해 군대를 이끌고 가서 요크군의 대승에 일조했다고 한다. 에드워드 4세가 1461년 잉글랜드 국왕에 등극한 후 기사 작위를 받고 콜체스터 성의 보안관과 노퍽 및 서퍽의 보안관으로 선임되었다. 같은 해 8월 노리치에서 열린 노퍽 공작과 존 패스턴의 분쟁에 가담해, 국왕 에드워드 4세가 노퍽 공작 편을 들도록 유도했다.
1462년, 존 하워드는 노리치 성의 보안관에 선임되었고, 1461년 3월 29일 토우턴 전투에 랭커스터 왕조 편에서 참여했다가 체포된 뒤 5월 1일 처형된 제5대 오몽드 백작 제임스 버틀러의 옛 영지를 받았다. 1465년, 노퍽 공작 존 모브레이와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과 함께 웨일스에서 발발한 반 에드워드 5세 반란 진압에 참여했다. 7월 23일, 그는 랭커스터 왕조의 마지막 거점이었던 뱀버러 성 공방전에 참여해 성 공략에 일조했다.
1466년 부제독에 선임되었으며, 1466년부터 1467년까지 프랑스 왕국과 부르고뉴국에 파견되어 외교 임무를 수행했으며, 1468년 6월 에드워드 4세의 누이인 요크의 마거릿 공주를 플란데런 백국으로 데려가서 부르고뉴 공작 용담공 샤를과 결혼시켰다. 1470년 헨리 6세가 랭커스터파와 결탁한 워릭 백작에 의해 복위하자, 그 해 10월 15일 하워드 남작으로 의회에 소환 된 뒤 헨리 6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하지만 1471년 3월 에드워드 4세가 용담공 샤를의 지원을 받고 잉글랜드에 돌아오자 즉각 그에게 가담했고, 바넷 전투와 튜크스베리 전투에 모두 참여해 에드워드 4세의 승리에 힘을 보탰다.
1472년 칼레의 부총독으로 임명되었고, 가터 기사단의 일원이 되었다. 1475년 에드워드 4세의 프랑스 원정에 참여했으며, 이후 프랑스와 잉글랜드 간의 휴전 협상 체결에 참여했고, 이후 조약 조건을 보장하기 위해 파리에 인질로 남았다. 그 후 잉글랜드로 돌아온 그는 이전에 13대 옥스퍼드 백작 존 드 베레가 소유했던 서퍽과 케임브리지셔의 여러 영지를 받았고, 다시 노리치 성의 보안관이 되었으며, 왕실 재무관을 겸임했다. 1477년에서 1479년까지 휴전 연장과 관련된 외교 사절로서 프랑스에 여러번 방문했다. 1479년 스코틀랜드 원정에 파견된 함대를 지휘했으며, 1480년 5월 다시 프랑스 외교 사절단에 참여했다.
한편, 제3대 노퍽 공작 존 모브레이가 1461년 46세의 나이로 사망한 뒤, 외아들 존 모브레이가 제4대 노퍽 공작으로서 모든 토지와 작위를 상속받았지만 1476년 3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이후 제4대 노퍽 공작 존 모브레이의 외동딸 앤이 다섯 살의 나이에 노퍽 여공작이 되었고, 에드워드 4세의 차남인 슈루즈버리의 리처드와 결혼했다. 그러나 앤은 1480년 9살의 나이에 사망했다. 이에 초대 노퍽 공작 토머스 모브레이의 딸들의 후손들, 즉 존 하워드[2], 제2대 바클리 남작 윌리엄 버클리[3]가 노퍽 공작령의 상속권을 주장했다.
그러나 에드워드 4세는 노퍽 공작의 상속인은 앤의 남편이자 자기 아들인 리처드가 되어야 하며, 리처드가 자녀를 낳지 못하면 그때서야 그들이 물려받을 수 있다는 결의안을 의회에서 통과시켰다. 이에 불만을 품은 존 하워드와 윌리엄 버클리는 1483년 에드워드 4세가 죽은 후 에드워드 4세의 동생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에게 그를 왕위에 올려주는 대가로 자신들이 노퍽 공작령을 나눠가지게 해달라고 청원했다. 글로스터 공작은 이를 받아들였고, 두 사람은 글로스터 공작이 에드워드 4세의 장남 에드워드 5세를 폐위하고 잉글랜드의 새 국왕 리처드 3세로 등극하는 데 일조했다.[4] 리처드 3세는 이에 보답하고자 5월 13일 존 하워드를 랭커스터 공국의 고위 집사와 추밀원 의원으로 선임했고, 6월 28일 새 노퍽 공작에 세웠으며, 윌리엄 버클리를 노팅엄 백작에 선임했다. 또한 존 하워드는 잉글랜드 왕실 원수로 선임되었고, 나중에는 잉글랜드, 아일랜드, 아키텐의 해군 대장이 되었다.
1483년 10월 버킹엄 공작의 반란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1484년 9월 노팅엄에서 스코틀랜드 국왕과 협상하는 수석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485년 8월 헨리 튜더가 프랑스 왕국의 지원을 받아 잉글랜드를 침공했을 때, 그는 이번에도 리처드 3세의 군대에 가담하여 헨리 튜더에 맞서 싸울 준비를 했다. 1485년 8월 22일, 그는 보스워스 전투에서 왕실군 선봉대를 이끌어 적군에 맞서 적극적으로 싸우다가 전사했다. 그의 유해는 처음에는 레스터에 안장되었다가, 나중에 노퍽주 테드퍼드 민스터에 다시 묻혔다.
보스워스 전투에서 승리한 뒤 잉글랜드의 유일한 국왕이 된 헨리 7세는 자신에게 맞서 싸운 모든 사람을 반역자로 선언했다. 그 결과 1485년 11월 7일 의회의 결정으로, 존의 작위와 토지는 몰수되었다. 이후 그의 아들이자 상속인인 토머스 하워드는 런던 탑에 갇혀 수년간 지내다가 나중에 튜더 왕조와 화해하고 풀려난 뒤 아버지의 토지와 작위 일부를 돌려받았다.
3. 가족
- 캐서린 드 몰린스(1429 ~ 1465): 윌리엄 드 몰린스 경의 딸.
- 토머스 하워드(1443 ~ 1524): 제2대 하워드 남작, 초대 서리 백작, 잉글랜드 왕실 마셜, 제2대 노퍽 공작.
- 앤 하워드: 렉솔의 에드먼드 조지 경의 부인.
- 이사벨라 하워드: 로버트 모티머 경의 부인.
- 조앤 하워드(? ~ 1508): 힌틀샴의 존 팀퍼리 경의 부인.
- 마거릿 하워드: 크라운소프의 존 윈덤 경의 부인.
- 니콜라스 하워드: 유년기에 사망.
- 마거릿 챈드워스(? ~ 1494): 존 챈드워스 경의 딸. 니콜라스 와이포드와 브레이의 존 노리스의 미망인.
- 캐서린 하워드(? ~ 1536): 제2대 버너스 남작 존 부르시에의 부인.
[1] 초대 웨스트모어랜드 백작 랄프 네빌과 조안 보퍼트의 막내아들로 솔즈베리 백작 리처드 네빌, 윌리엄 네빌의 동복동생이며, 현대까지 이어지는 네빌 가문인 애버개브니 후작가의 시조이기도 하다. 단, 애버개브니 후작가는 캐서린이 아닌 에드워드 네빌의 첫 부인인 엘리자베스 보챔프의 후손이다.[2] 초대 노퍽 공작 토머스 모브레이의 딸 마거릿곽 기사 로버트 하워드의 아들이다.[3] 초대 노퍽 공작 토머스 모브레이의 딸 이사벨라와 초대 버클리 남작 제임스 버클리의 아들이다.[4] 세간에서는 존 하워드가 '런던 탑의 왕자들'인 에드워드 5세와 슈루즈베리의 리처드를 죽인 범인으로 의심하기도 하는데, 슈루즈베리의 리처드가 모브레이 가문의 작위와 영지에 대한 경쟁자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