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11-21 01:40:24

제5보병여단(짐바브웨)

1. 개요

짐바브웨 육군의 보병여단이다.부대 별칭은 구쿠라훈디.[1]

로버트 무가베 집권기에 무가베의 친위대로 악명을 떨쳤으며 반무가베 성향 부족인 은데벨레족에 대한 제노사이드를 자행했다.나치 독일의 제3SS기갑사단이나 아인자츠그루펜과 유사한 조직.

의외로 한국과 연계점이 있는데,조선인민군군사 고문단이 훈련시킨 부대이기 때문.

2. 편성

제5보병여단은 짐바브웨 육군본부의 직할부대로,5개의 보병대대와 T-54 전차로 무장한 전차중대가 예하부대로 편성되어 있으며 BTR-152 장갑차가 배치되어 부분적으로 기계화되어 있다.

3. 역사

3.1. 배경

짐바브웨 국군(ZNA)은 로디지아군을 전신으로 로버트 무가베가 주도한 짐바브웨 아프리카 민족해방군(ZANLA),짐바브웨 인민혁명군(ZIPRA)이 통합되어 창설되었다.

새로 편성된 군의 훈련은 기존 로디지아군의 인원들과 영국군에서 파견된 군사 고문단이 담당하였다.

1981년까지 짐바브웨군의 주력 전투부대는 37개 경보병대대,37만 명이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군부 내 파벌 경쟁이 시작되었는데,ZANLA와 ZIPRA는 통합에 저항하며 자신들만이 정통한 짐바브웨의 국군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일부 대원들은 국군에 합류하지 않고 별도의 준군사조직을 창설했다.

특히 ZIPRA 세력의 반발이 극심했는데,짐바브웨의 사실상의 국가 수반인 무가베의 파벌,ZANLA가 군부 내 주요 파벌을 형성하고 요직을 독점했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각종 군사 조직들이 군웅할거하며 짐바브웨는 수렁에 빠져들었다.당대 총리였던 로버트 무가베는 군의 규모를 경보병대대 37개에서 34개로 감축하고 나머지 34개 경보병대대를 일시적으로 해체한 뒤 이들을 4개의 보병여단으로 통합하려 시도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각 대대 병영에서 무장 해제가 이루어졌는데,ZIPRA 측 간부들은 이에 대해 군부 내 권력 구조를 더욱 단단히 하려는 ZANLA의 음모라 불평하고 ZIPRA 측 게릴라들은 무기를 소지한 채 탈영하여 다양한 무장 단체들을 결성했다.

탈영한 ZIPRA 장병들은 마테벨랜드 남부와 북부에 거점을 잡고 세력을 키워나갔다.무가베와 군부 내 ZANLA 파벌은 이들을 '반체제주의자'로 공언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군부 내에는 다수의 ZIPRA 출신 장병들이 잔류해있었고,로디지아군 출신들도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구체제의 잔당이었던 이들은 정권에 대한 잠재적인 위협이었다.

안그래도 아프리카 국가들은 역사적으로 중앙집권 체제보다는 부족장들이 권위를 가지고 각 부족을 이끄는 형태였던지라 서구 국가들의 민주주의 체제가 성숙하지 않아 엘리트들인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뒤엎는 사례가 판치는데,짐바브웨는 당시 건국된지 얼마 안 된 신생국이었기에 이 위협이 더욱 가시화되었다.

이에 무가베는 자신이 신뢰할 수 있는 군부 내의 친위대 겸 반란 진압용 특수부대의 창설을 추진하게 된다.

3.2. 창설

1981년 8월,무가베는 ZANLA의 2개 대대를 차출하고 여기에 ZANLA 출신 게릴라 대원 3000명을 더해 기존에 창설하기로 계획한 4개의 보병여단과는 별도로 1개의 여단을 증설했다.이것이 바로 5여단의 기원이다.

장교들은 기존 ZANLA 내에서 교육 시설의 부족으로 장교 양성 코스를 거차지 못한 사관후보생 출신들을 선발해 장교단을 구성하였다.

ZIPRA 출신들이 주로 소속된 제4보병여단에서도 일부 병력들이 차출되어 5여단 내에 배치되었다.

다른 4개의 여단들과는 다르게,5여단은 무가베의 친위대였기에,북한에서 초빙된 조선인민군 군사 고문단에게서 88식 소총 등의 무기 등을 보급받고 훈련을 받았다.[2]5여단은 다른 4개의 여단들과는 다르게 짐바브웨군 최고사령부의 직할부대였다.

1981년 8월,조선인민군 군사 고문단짐바브웨에 도착한 즉시 훈련이 시작되어 1982년 6월까지 지속되었다.훈련은 짐바브웨-모잠비크 국경 인근에 위치한 이냥가 지방의 고립된 산속의 훈련소에서 이루어졌다.[3]

5여단은 짐바브웨군의 최정예 부대답게 당시 짐바브웨군이 소련군에게서 공여받은 최신형 장비들을 지급받았다.T-54 전차들로 구성된 전차중대가 여단 직할에 편성되어 있었으며 BTR-152 장갑차와 BRDM-2 정찰 장갑차가 보급되어 있었다.

이외에도 대전차 견인포 포대와 다연장 로켓 발사기 등이 다수 보급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런 장비들은 다른 4개의 여단에서는 사용되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에 타부대 장비들과 호환이 제대로 안 되고 정비와 군수의 어려움이 심각했다고 한다.

3.3. 실전

1982년 8월,제5보병여단은 모잠비크 내전에 처음으로 개입하여 실전을 겪는다.

제5보병여단은 모잠비크로 파병된 첫번째 파병부대들 중 하나였으며 짐바브웨 국경과 베이라를 연결하는 전략적 성격의 철도를 방어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당시 이 철도는 서방의 지원을 받는 반공주의 성향의 모잠비크 반군,모잠비크 민족 저항 운동(REMANO)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여담으로 당시 철도 방어전을 기획한 장교단은 짐바브웨군,모잠비크군,조선인민군 출신 장교들이었다.남북한 아프리카 외교전 당시 조선인민군의 대외 파병 사례들 중 하나다.

그러나 성공적인 첫 실전과는 별개로 5여단은 슬슬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ZANLA 출신들로 구성되었고,무가베 파벌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는 5여단의 장병들은 ZIPRA 출신 장병들을 하대하며 무시했고 이로 인해 ZIPRA 출신들이 주축인 4여단과의 갈등이 점화되었다.

그리고 사고가 터지고야 마는데,5여단 장병들이 4여단 장병들을 향해 발포한 것이다.

이에 격분한 4여단 장병들은 짐바브웨군 수뇌부에 엄벌을 주문하지만,ZANLA 파벌이 장악하던 군부는 이를 쉬쉬했고 주동자들은 짐바브웨 군사법원에서 솜방망이 처벌을 받았다.

이로 인해 4여단 장병들이 대거 전역하며 4여단 휘하 4개 대대가 해체되는 사태가 발생한다.

5여단은 정예 부대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ZIPRA 출신들만이 아닌 ZANLA 출신의 다른 부대원들도 무시하기 일수였고 이로 인해 다른 4개 여단과 5여단 간에 긴장감이 지속적으로 조성되었다.

3.4. 아프리카의 아인자츠그루펜

한편,마테벨렌드로 철수했던 ZIPRA 출신 장병들은 계속해서 마테벨렌드에서 반정부 운동을 전개했고,무가베에 반대하는 정치 파벌 ZAPU의 의장 조슈아 조코모도 사무실을 마테벨렌드에 두고 활동했다.

현지에 거주하는 반무가베 성향 은데벨레족의 반무가베 성향은 더욱 가속화되었으며 이로 인해 무가베는 마테벨레드를 반역자들의 온상지로 간주하고 대대적인 파괴작전을 계획한다.

1982년 8월,무가베는 자신의 친위대인 5여단에게 마테벨렌드로 출동해 반역자들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하다한다.이에 따라 5여단 장병들에게 ZIPRA 탈영병과 동원 해제 장병들이 명단이 지급되었으며 이들을 심문하기 위해 여단 본부로 압송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그러나 무가베의 목표는 단순한 반란 분쇄가 아닌 반체제 인사들에 대한 대대적인 절멸 정책이었다.

마테벨렌드에 도착한 5여단 장병들은 ZAPU이 사무실에서 무기가 발견되었다는 카더라 통신을 바탕으로 ZAPU는 정치 조직이 아닌 반란군이기에 합법적인 교전 대상이라 간주,ZAPU의 수장 조슈아 은코모의 사무실에 들이닥쳐 그의 수행원 3명을 살해했다.

5여단 본부는 마테벨렌드 북부에 통행 금지령을 선포한 후 작전 지역 내 민간인의 움직임을 통제하고 지역 사업체들울 강제로 폐쇄했다.5여단은 마테벨렌드의 주민들을 한 곳에 집결시켜 움직임을 통제한 후,단 2주만에 2천 명이 넘는 주민들을 학살했다.

이들은 여학교를 습격해 공부 중이던 여학생들을 강간해 임신시키고 주민들에게 무가베와 당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게 강요했고 학살을 도울 것을 강제하였다.

살아남은 주민들은 경찰 전초 기지,광산 단지,강제 수용소로 개조된 이전 로디지아군 기지로 이송되었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 5여단 장병들의 살인,약탈,강간을 겪으며 질병과 기아 속에서 수천명이 죽어나갔다.

3.5. 해체,그리고 부활

1986년,5여단은 일반부대화되어 해체되었으나,최근에 다시 부활(...)했다.

4. 평가

짐바브웨판 아인자츠그루펜,호위사령부로 무가베와 ZANLA의 비호 아래 수많은 악행들을 자행했다.정권을 위해 자국민 학살을 불사하고 우월감에 찌들어 타부대 장병들을 살해하는 등 그야말로 개막장 부대의 정수를 보여준다.

상술한 악행과 동시에 오랜 내전으로 축적된 경험을 기반으로 모잠비크 내전 당시 활약한 정예 부대라는 점에서 나치 독일 친위대의 메이커 사단인 제3SS기갑사단과 그 성격이 몹시 유사하다 볼 수 있다.그런데 경악스러운 점은 이들은 독립 운동가 출신들로 구성되었다는 점.

동시에 5여단이 최근 재창설되었다는 점에서 짐바브웨 정치의 막장성이 아직도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이 증명되기도 했다.



[1] 쇼나어로 봄이 오기 전에 먼지들을 씻어내는 이른 비라는 뜻으로 로디지아-부시 전쟁 당시 ZANLA의 전술을 의미하는 단어익도 하고 동시에 후술된 대참사릉 상징하는 단어이기도 하다.[2] 무가베는 북한의 독재 체제를 추종하여 북한에서 많은 점을 참조하여 자신의 권력을 구축했다.이로 인해 짐바브웨는 본격 종북 국가의 길을 걷게 되었는데,길거리 상점에 주체사상 전집이 놓여있기도 하고 김일성이 사망했을 때 국가애도기간을 선포하기도 했다.[3] 인민군 교관들은 조선인민군 특수작전군 소속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