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그레이 감독의 주요 수상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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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gray><colcolor=#1f2023,#fff> 제임스 그레이 James Gray | |
출생 | 1969년 4월 14일 ([age(1969-04-14)]세)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뉴욕 뉴욕 | |
직업 | 영화감독 |
데뷔 | 1994년 ([age(1994-07-01)]주년) |
학력 |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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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임스 그래이는 미국의 영화감독이다. 영화계의 또 다른 황금기로 불리는 1990년대에 대거 쏟아져 나온 미국의 젊은 영화 감독 중 하나였다.[1]2. 상세
뉴욕 브루클린 출신으로 러시아계[2] 유대인이다. 집안은 전기공사 도급자로 예술하고는 별로 상관이 없었다고. 어렸을 땐 그림에 관심이 많았으나 10대 시절에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같은 미국 영화감독들을 접하면서 영화 감독이 되기로 했다고 한다. 본인이 밝히길 감독이 되겠다고 하니 아버지가 반대하면서[3] "우리는 부자가 아니다. 연줄도 없다[4]. 할리우드 출신도 아니다. 넌 절대 감독이 되지 못할 거다."라고 했다.이후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 영화과에 진학해 단편 영화를 만들었고 이게 프로듀서에게 주목을 받아 24살에 리틀 오데사로 감독 데뷔에 성공한다. 게다가 베니스 국제 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해 은사자상을 받는 기염까지 토하며 빠르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막상 그 후론 상당히 힘들게 영화를 만든 편이다. 두 번째 영화 더 야드는 1997년에 촬영을 마쳐놓고 2000년 칸 영화제에서야 공개되었고 위 오운 더 나잇은 7년 만에, 이민자는 5년 만에 만든 영화였다. 때문에 흥행하고도 거리가 멀어서 유일한 흥행작이 위 오운 나잇일 정도.
주로 미국에 이민 온 유대인 커뮤니티 속에서 고뇌하는 개인들을 다루는 감독으로, 경력 초기엔 범죄물에 집중했다. 인터뷰에서 밝히길, 자신이 범죄물을 몇 편 찍은 것은 '현실과의 타협'이었다고 한다. 개인적으론 범죄물에 큰 관심이 없다고. 그래서인지 경력 초기의 범죄영화들이 크게 호평 받은 이후, 멜로 영화인 투 러버스를 기점으로 조금씩 달라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아메리칸 뉴웨이브 시네마의 적통을 이어 고전적인 연출 기조가 강하며, 전반적으로 멜로/누아르 영화의 어법을 많이 빌려와 분위기는 우울한 편이다.[5] 캐릭터 간의 감정과 분위기 묘사가 뛰어나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 편. 실제로도 시나리오 작업에 상당히 심혈을 기울이는 편이다.
더 야드 이후 호아킨 피닉스를 빠짐없이 캐스팅하는 편이었다. 단 잃어버린 도시 Z 이후 작품엔 캐스팅되지 않았다.
3. 평가
제임스 그레이의 남다른 점은 그가 두드러진 스타일을 구사하지 않을 뿐더러, 특정한 사건을 앞세우지 않으면서도, 연출의 영역에 속한 갖가지 요소들의 유기적 조합을 통해 유례를 찾기 힘든 높은 밀도와 강한 전염성을 지닌 감정의 강도에 이른다는 것이다. 그레이의 영화를 말할 때야말로 감정 대신 정동(情動)이란 단어를 쓰고 싶게 된다. 그런 점에서 그레이는 동세대의 어떤 감독보다 고전적인 작가라 할 수 있으며, 그가 영화적 스승으로 거론하는 인물에 속하진 않지만, 니콜라스 레이의 진정한 후예라고 나는 생각한다.
- 허문영 #
- 허문영 #
제임스 그레이는 장르에서 시작하지만 이야기의 무대를 조금씩 고전적인 무대로 옮겨온 다음 주인공이 수난이라고 부를 만한 시련에 빠져들 때 거의 비극의 원형이라고 할 만한 광경으로 옮겨놓는다. 이때 그는 이야기를 확장하지 않고 점점 더 가족 안으로 좁혀 들어온다. 그렇게 함으로써 장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갑자기 단순한 장소의 형태를 갖추면서 보기 드물게 인물에로 우리를 집중시킨다. 그 점에서 나는 제임스 그레이가 폴 토머스 앤더슨보다 좀더 고전적인 방식을 취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 정성일 #
- 정성일 #
자국에서는 대접을 못 받지만 반대로 유럽에서는 상당한 지지를 받는 감독으로 특히 프랑스에서 지지도가 높은 편이다. 그래서인지 일부 프랑스 평론가들로부터 현존하는 최고의 미국 영화감독이라는 표현을 듣기도 한다. 더 야드 이후 이민자까지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했을 정도. 잃어버린 도시 Z는 칸 대신 베를린 영화제 비경쟁에 초청되었다. 다만 매니아 층이 형성되어 있는 폴 토머스 앤더슨이나 웨스 앤더슨, 대런 애러노프스키와과 달리 국내 영화광들 사이에서 지지도는 약간 부족하다.
심지어 국내 평론가들 기준으로도 상당히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 상황이다. 그나마 언급을 하는 평론가는 위에 인용된 허문영과 정성일 그리고 대부분 호평을 아끼지 않는 평을 내리는 이동진 정도고, 그나마도 아직 제대로 된 감독론이 정립되지 못하였다.
4. 필모그래피
||<tablewidth=100%><tablebordercolor=#181818><tablebgcolor=#181818>
제임스 그레이 감독 장편 연출 작품
||<rowcolor=#FFFFFF> 개봉 연도 | 제목 | 수익 (USD) | 흥행[6] |
1991년 | 카우보이들과 천사들 | [단편영화] | |
1994년 | 리틀 오데사 | 110만 | 실패 |
2000년 | 더 야드 | 92만 | 실패 |
2007년 | 위 오운 더 나잇 | 5,530만 | 성공 |
2008년 | 투 러버스 | 1,630만 | 실패 |
2013년 | 이민자 | 590만 | 실패 |
2016년 | 잃어버린 도시 Z | 1,930만 | 실패 |
2019년 | 애드 아스트라 | 1억 3,540만 | 실패 |
2022년 | 아마겟돈 타임 | 650만 | 실패 |
TBA | 페이퍼 타이거 | ||
TBA | 에즈키엘 모스 | ||
TBA | 존 F. 케네디 전기 |
[1] 그레이 감독 외에 폴 토머스 앤더슨, 제임스 맨골드, 웨스 앤더슨, 대런 애러노프스키, 소피아 코폴라, 알렉산더 페인 등이 주로 거론된다[2] 정확히는 증조할아버지가 우크라이나 오스트로풀 출신. 본래 성은 그라이에우스키Grayevsky나 그레이제르스테인Greyzerstein으로 추정된다.[3] 아버지는 코로나19로 2022년 타계했다고 한다.[4] 이 말은 아마겟돈 타임에도 똑같이 나온다.[5] 새드 엔딩이 대다수라 비교적 긍정적으로 끝난 애드 아스트라는 상당히 행복한 축에 들 정도다. 그레이 영화 세계를 분석하면서 비극은 꽤 중요한 키워드로 다뤄질 정도.[6] 손익분기점 기준.[단편영화] 졸업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