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01-01 13:07:23

정승복

鄭承復
1520년(중종 15) ~ 1580년(선조 13)

1. 개요2. 생애3. 가족

1. 개요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경윤(景胤)이고 호는 옥계(玉溪)이다.

을묘왜변 때 활약한 명장이다.

2. 생애

세조 시대 계림군(鷄林君) 정지년(鄭知年)의 현손(玄孫)으로, 부친은 돈용교위(敦勇校尉:정6품 무관의 품계) 정내(鄭鼐)이고, 모친은 훈련원 습독(訓鍊院習讀:종9품) 개성 왕씨 왕침(王琛)의 딸이다. 부인은 운산군수를 지낸 죽산 안씨(竹山 安氏) 안수금(安秀嶔)과 연안 김씨 김엽(金燁)의 딸이다.

전라도 순천도호부(현 전라남도 순천시) 출신으로, 1544년(중종 39)에 별시 무과에 을과 1위, 전체 2등으로 급제하고 2년 뒤인 1546년(명종 1) 중시(重試)[1] 무과에 병과 1위로 급제하여 절충장군(折衝將軍:정3품 무관의 품계)으로 승진했다. 이후 옥구현감(沃溝縣監:종6품)을 역임하였다.

1555년, 옥구 현감에 재직하던 중에 왜구가 전라도 남부 지역에 침입하는 을묘왜변을 맞아 전라도까지 가서 왜구들에 맞서 싸워 공을 세웠다[2].

1559년, 기미왜변(己未倭變)이 터지자 어란진만호(於蘭鎭萬戶)로 출정하여 추자도(楸子島)에서 큰 승리를 거두고 왜선 1척을 포획하여, 감사 박충원(朴忠元)과 수사 최희효(崔希孝)가 포계(褒啓)를 올려 웅천현감(熊川縣監)이 되었고 얼마 안되어 영덕현령(盈德縣令)에 제수되었고, 또 자리를 옮겨 함흥판관(咸興判官)을 역임했다.

사후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증직되었고, 순천의 옥계서원(玉溪書院)에 배향되었다.

3. 가족

첫부인 죽산안씨와 2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정사안(鄭思安), 정사익(鄭思翊)이고 사위는 정유경(鄭惟敬), 한척(韓惕)이며, 둘째 부인 연안김씨와 3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정사준(鄭思竣), 정사횡(鄭思竑), 정사정(鄭思靖)이고 사위는 이명남(李命男), 안방준(安邦俊)이다. 측실에서 아들 1명을 두었는데 정사립(鄭思立) 이다.

그의 아들 정사준(鄭思竣)은 임진왜란이순신(李舜臣)의 군관으로서 조총의 제작에 공이 있었고, 조정의 식량이 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조카 정빈(鄭𢣐)과 함께 군량미 천여 석을 모아, 뱃길로 의주(義州) 행재소까지 운반하였고, 정사횡(鄭思竑)과 정사정(鄭思靖)은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다시 수백 석의 군량미를 모아 충무공(忠武公) 이순신의 휘하에 들어가서 노량해전에 참전하여 적선을 격퇴하는 공을 세웠다. 원균을 극딜하는 내용이 담겨 있는 은봉전서를 쓴 저자이자, 의병장 및 학자 안방준(安邦俊)이 그의 사위였다.

[1] 조선시대 당하관(堂下官) 이하의 문무관에게 10년마다 한번씩 보이는 과거.[2] 왜구의 습격이라 전쟁 축에도 못 끼지만 당시 전남의 10개 성이 함락되고 전라도 병마 절도사와 진도 군수가 전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