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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만수


1. 개요2. 생애
2.1. 남송에서2.2. 원나라에서
3. 기타

1. 개요

昝萬壽, 1242~1299
송말원초 시기의 항원순무(抗元巡撫)로, 자는 천경(天慶)이며 호는 남계(南溪)이다. 안후이성 쉬안청시 선주구(宣州區) 이교진(狸橋鎮) 잠촌(昝村) 사람이다. 계잠촌(系昝村) 잠씨(昝氏)의 10세손이다. 원나라에 투항한 후 잠순(昝順)으로 개명한다. 그 뒤, 원나라의 사천 통치 안정화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2. 생애

2.1. 남송에서

1261년 200여 척의 전함을 이끌고 사천 지역의 남충(南充)에서 나와 청거(青居)를 공격했다가 왕양신(汪良臣)에게 패하였다. 이듬해에는 완안석주(完顏石柱)와 첩가(帖哥)가 이끄는 몽골군이 가정을 공격하지만, 이를 격퇴하였다.

1264년 양대연(楊大淵)[1]의 부장 왕중(王仲)이 잠만수의 서신을 받았다는 이유로 양대연에게 죽게 되었다. 양대연은 이로 인해 문책을 받았고 세조 쿠빌라이는 왕중의 가족들을 구휼한다. 또한 이 해에는 사천안무제치사 겸 지중경부 하귀의 지휘 하에 장각, 손립과 함께 장정서가 지키는 호소산을 공격하지만, 초덕유의 원군이 당도해 실패하게 된다.

1265년에는 남송 조정으로부터 운정산(雲頂山)과 금당협(金堂峽)[2]의 공로로 표창과 장려를 받았다.

1267년 7월 사천도통(四川都統) 직책을 담당하던 중 통제(統制) 조보(趙寶)와 양립(楊李) 등에게 조서를 내려 주사(舟師)를 이끌고 달거성(達渠城)의 양곡을 보호하게 한다. 동년 9월에는 석말걸아(石抹乞兒)[3]가 봉계채(蓬溪寨)[4]를 공격하지만 잠만수가 이끄는 군대와 조우하였고, 석말걸아는 전사하였다.

1268년 동천안무부사(潼川安撫副使)로서 면주(沔州)에 주둔하던 중 우무대부(右武大夫)로 승진한 데 이어 좌효위대장군(左驍衛大將軍)의 직책과 금대를 하사받는다.

1270년에는 가정(嘉定)[5]을 지키며 새전적(賽典赤)[6]의 군대와 대치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새전적이 소환되어 잠만수는 술을 청하는 것이 좋다 생각했고 그것이 좌우간 난처한 일이라 생각하였으나 새전적은 의심하지 않았다.

술이 다해 좌우로 답해도 마실 것이 없게 되자 새전적이 웃으며 말하였다.
"어찌 보면 작은 것을 볼 수 있군요. 잠 장군은 나를 독살할 수 있고, 조정의 사람들을 독살할 수 있습니까!"
잠만수가 이에 탄복한다.

1271년 6월에는 지가정부(知嘉定府)로 재직 중이었는데, 남송 조정으로부터 백만 전과 은 오천 냥을 지원받는다.[7] 그 해 성도를 공략하지만, 엄충범이 보낸 보로합답(步魯合答)에게 패했다.

이듬해인 1272년 성도를 기습하지만 석말구구(石抹狗狗)[8]에 의해 격퇴당하였다.

1273년 정월에는 성도를 공격했고 동년 3월에는 영원군승선사(寧遠軍承宣使)가 더해졌고 임무를 계속 수행한다.

동년 6월에는 성도안무사(成都安撫使)로서 군대를 동원해 성도의 대성을 공략했다. 이때 잠만수는 성도의 외성을 점령하였고 원나라 군사들은 성도의 내성으로 퇴각했다. 동년 9월 가정의 오우산(烏尤山)을 지킨다.

1274년 왕양신이 가정을 공격하였을 때 잠만수는 자리를 지키지 못하였다. 왕양신은 군대를 여러 경로로 나뉘어 산골짜기를 대대적으로 수색하며 각지에 주둔한 송군을 하나하나 격파 해 나간다. 왕양신이 박성(薄城)으로 진군했고 잠만수는 병사들이 다하여 패했고, 병사들의 시체가 강을 막을 지경이었다. 이에 잠만수가 항복을 청하였고 거민들이 안도했다.

1274년 11월 원나라 조정에서 조서를 내려 잠만수를 달래고 성을 지키는 장군들이 돈을 내고 항복하도록 명령했다. 또한 정치 공세를 펼치며 항복자의 과거는 탓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1275년 2월 원나라 군대가 가정의 구정산(九頂山)을 공격하여 도통(都統) 후흥(侯興)이 전사했다. 이때 잠만수는 남송 조정으로부터 보강군절도사(保康軍節度使)로 임명되어 장병들을 호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9]

1275년 5월에는 예속답아(也速答兒)[10]에게 패하여 500명의 전사자가 발생했다. 그 이후 부장 이립(李立)을 보내 투항을 요청하였고 동년 6월 가정과 삼귀(三龜), 구정(九頂), 자운성(紫雲城)을 바치고 원나라에 투항하게 된다.

2.2. 원나라에서

원나라에 투항한 이후에는 잠순(昝順)으로 개명하였다.

1275년 11월부터 검서사천행추밀원사(簽書四川行樞密院事)를 지냈는데, 그 와중 소경부(紹慶府), 시주(施州), 남평(南平) 및 여러 오랑캐(蠻)인 여고(呂告), 마몽(馬蒙), 아영(阿永) 등과, 파주(播州) 안무사 양방헌(楊邦憲), 사주(思州) 안무사 전경현(田景賢) 등 사천 남부의 소수민족들을 안정시키는 데 주력했다.

1277년에도 검서사천행추밀원사로 재직 중이었는데, 동지융주사(同知隆州事) 조맹희(趙孟烯)를 보내 칙서를 가지고 남평군(南平軍) 도장만(都掌蠻), 라계만(羅計蠻) 및 봉황(凤凰), 중롱(中垅), 라위(羅韋), 고애(高崖) 등 네 개 요새를 달래어 모두 항복시킨 뒤 전씨(田)와 양씨(楊) 두 가문과 저아이민(豕鵝夷民)도 각각 사신을 보내 조공(納款)했다고 아뢰었다.

1278년 12월에도 검서사천행추밀원사로 재직하고 있었고, 도장만(都掌蠻) 오랑캐와 그 부속 110명을 불러들여 내부에 귀속시켰다. 그들의 우두머리인 아영(阿永)을 서남번만안무사(西南番蛮安抚使)로 삼고, 득란뉴(得蘭紐)를 도장만안무사(都掌蛮安抚使)로 삼아 호부(虎符)를 하사했으며, 나머지는 선칙(宣敕)과 금은부(金銀符) 등을 차등 있게 수여했다.

이듬해인 1279년에는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지냈는데, 잠순은 그 해 정월 강진현에 180가구를 하사받았다.

동년 4월 왕양신이 말하였다.
옛날 잠순은 군대를 이끌고 성도를 범하여 백성을 약탈하고 돌아갔습니다. 오늘날에 이르러 항복했으니 백성들에게 성도를 돌려주는 것이 좋겠습니다.
세조가 이에 옳다고 답하였다.

1286년 2월 안남행중서성좌승상(安南行中書省左丞相) 아릭카야(阿里海牙)와 평장정사(平章政事) 오로적(奥鲁赤), 참지정사(参知政事) 도원수 오마아(烏馬兒), 역리미실(亦里迷失), 아리(阿里), 번즙(樊楫)과 함께 정사에 참여한다.

3. 기타

  • 청나라 광서제 시기 편찬되었던 《선성현지(宣城縣誌)》에서는 원나라 군사가 도착하여 항복하지 못하고 울분으로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 유정의 아들 유해(劉垓)의 상소에서 잠만수가 언급되기도 하였다.
    선신이 양양에 있을 때 여문환(呂文煥)이 귀항하였고, 현재 우승을 담당하고 있사옵니다. 여주에서는 관여덕(管如德)이 투항하여 지금은 좌승을 맡고 있사옵니다. 신이 서천에 있을 때, 잠만수가 귀항하여, 현재도 우승을 맡고 있사옵니다.



    先臣在襄陽,呂文煥歸降,今為右丞;在瀘州,管如德歸降,今為左丞。臣在西川,以昝萬壽歸降,現在也為右丞。

[1] 그는 본래 남송의 장수였으나 몽케 칸에게 투항하여 사천 방면을 공격하는 데 앞장선다.[2] 운정산과 금당협은 성도의 관할 하에 있는 금당현 경내에 있으며, 청두 시내에서 약 35km 떨어져 있다.[3] 석말상산(石抹常山)의 아들이다.[4] 오늘날 가릉강의 일대이다.[5] 오늘날 쓰촨성 러산시(樂山市)이다.[6] 그는 회족 출신의 원나라 정치가였다. 이때 새전적은 진을 나누어 사천을 진수하라는 명을 받는다.[7] 이때 원나라양양을 공격하는 중이었는데, 각지의 지원군이 양양성을 지원하지 못하도록 각지를 견제해야 했다. 이때 새전적은 정정(鄭鼎)과 함께 수륙 병진하여 가정에 도착했고, 송나라 장군 두 명을 붙잡아 뗏목을 타 부교를 끊고 전함 28척을 얻는다. 원군의 주력 부대와 협력하여 양양을 포위하기 위해, 새전적은 송군을 견제하고 가정으로 출전했다.[8] 거란족 출신의 원나라 무장으로, 석말걸아(石抹乞兒)의 아들이다.[9] 이때 장각(張珏)은 영원군절도사(寧遠軍承宣使), 장세걸(張世傑)은 화주방어사(和州防禦使)의 직책을 받았다.[10] 뉴린(紐璘)의 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