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18 03:15:23

인민의용군

파일:인민의용군.gif
6.25 전쟁 당시 북한군에게 강제 징집된 남한 출신 의용군

1. 개요2. 내용3. 역할4. 현황5. 평가6. 출처

1. 개요

인민의용군은 정규군을 지원하기 위해 조직된 군대 또는 군인으로서 1950년 7월 1일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가 선포한 ‘전시동원령’에 근거해 모집되었다.

2. 내용

북한은 1950년 7월 1일 만 18세부터 36세까지의 주민을 동원 대상으로 하는 동원령을 선포하였다. 이와 더불어 같은 날 북한의 군사위원회 제4차 회의에서는 의용군 모집 사업을 원만히 추진하기 위해 상설기구로서 인민의용군조직위원회를 설치하고, 서울을 비롯한 주요 도시훈련소를 설치, 의용군 입대자들에 대한 단기군사정치훈련을 시켜 북한군에 편입한다는 방침이 결정되었다. 조선로동당7월 6일 ‘의용군 초모 사업에 대하여’라는 결정서를 각급 당조직에 하달하였다. 이 결정서에서는 의용군은 18세 이상의 청년군으로 하되 빈농 출신의 청년을 많이 끌어 들일 것, 각도에 할당된 징모 수는 책임을 완수할 것, 전 남로당 당원으로서 변절자도 의무적으로 참가시킬 것등을 밝히고 있다. 이 결정에 따라 각급 당조직에서는 의용군 모집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하고 이를 민청을 비롯한 각급 사회단체에 지시했다.

의용군 모집 대상과 모집 방식은 전선의 변화 추이에 따라 달리했다. 개전 초기에는 주로 출옥한 좌익사범, 지하활동가, 보도연맹원 등을 대상으로 자원이라는 형태로 이루어지다가 7월 2일부터 궐기대회('군중대회'로도 불린다)을 통한 집단적인 방식으로 추진되었다. 궐기대회 형태의 모집방식은 개인적 영웅심과 군중심리를 이용하여 일시에 다수의 인원을 모집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북한은 의용군 모집을 위해 복구된 당조직과 노동·청년·학생·여성단체들을 총동원했는데, 특히 청년과 학생단체인 민청과 민주학련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 단체들은 궐기대회를 조직하는가 하면 신문이나 방송 등의 언론매체와 강연회, 가두연설 등 조직적인 선전과 홍보활동을 통해 의용군을 모집했다.

침공당시 인민군의 병력은 20만인데 이는 북한지역에서 끌고올수있는 최대한의 병력이었다. 이에 따른 소모를 벌충하기 위해 인력이 넘쳐하는 남한지역에서 의용군이란 명목하에 강제징집을 실시했고

3. 역할

이러한 과정을 통해 징집된 인원은 재교육을 위해 북한으로 보내지는 경우도 일부 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최전선의 전투병 내지 노무자로 활용되었다. 이들은 정해진 장소에서 2∼10일간의 훈련을 받고 최전방낙동강 전선에 배치된 후 그곳에서 재편성되었다. 즉 전투병으로 최전선에 참가하는 경우와 물자수송과 전시복구사업에 동원되는 병력으로 분류되었다.

한편, 각도에서는 1950년 9월 초에 의용군을 중심으로 여단을 편성하기도 했다. 경북에서는 안동여단, 충남에서는 대전여단, 전남에서는 광주여단 등이 만들어졌으며, 이를 총지휘하는 의용군 총사령관에는 로동당 부위원장인 이기석이 임명되었다.

4. 현황

한국전쟁 기간 중 인민의용군으로 참가한 인원은 현재까지 정확하게 밝혀진 바가 없지만, 적게는 10만에서 많게는 4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5. 평가

전선의 확대와 급증하는 전투보충병의 수요는 무리한 의용군 모집사업을 더욱 촉진시키는 계기였다. 전쟁 초기의 활발한 모집실적과는 달리 7월 말부터는 모집실적이 급속히 감소하기 시작했다. 자발적으로 지원할 인력의 고갈과 전쟁의 결과에 대한 불확실성은 의용군 모집실적의 저하로 나타났다. 이 때문에 더 많은 인원을 조직적으로 동원하기 위해 책임동원의 성격이 강한 할당제로 의용군 모집방식이 바뀌었다. 가두모집과 호별 할당 등 강제성을 띤 징집이 동원되었는데, 무리한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민청과 직업동맹 등의 간부들이 각지에 파견되어 가두모집을 추진하였다. 마을 단위에서는 제비뽑기나 마을의 논의구조를 통해 대상자를 선정하는 방식이 빈번해지기도 했다.

침공 당시 인민군의 병력은 20여만이었는데 이는 북한지역에서 끌고올수있는 최대한의 병력이었다.[1] 인천상륙작전후에 패퇴한 인민군이 주력으로 다시는 나서지 못했던 점과 반대로 국군은 남아도는 인력을 미국이 지원해준 군수품으로 무장시켜 60만 대군을 굴린것과 비교하면 왜 북한이 남한지역에서 의용군을 모집했는지를 알수있다.

한편 남한지역 장정들이 의용군이란 명목하게 끌려온 것을 보게된 대한민국 정부는 1.4후퇴때 국민방위군이란 병크를 터트리게 된다.

6.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인민의용군 人民義勇軍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1] 공업화가 먼저 진행되었다곤 하지만 예전부터 척박하고 인구가 적은 지역이었다 반대로 남한에 속한 삼남지방은 옛부터 인력과 물자가 풍부한 지역이었다. 임진왜란때 반대상황이 되어 조선군이 병력수급에 어려움을 겪었던 것과 비교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