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13:45:38

이재웅(기업인)

<colbgcolor=#3f98ba><colcolor=#ffffff> 이재웅
Lee Jae-woong
파일:Lee_Jae_woong__.jpg
출생 1968년 10월 22일 ([age(1968-10-22)]세)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영동고등학교 (졸업)
연세대학교 이과대학 (전산학 / 학사)
연세대학교 대학원 (전산학 / 석사)
파리 제6대학교 대학원 (인지과정 박사 수료)
현직 주식회사 쏘카 이사
경력 주식회사 쏘카 대표이사
소풍 창업주
다음커뮤니케이션 창업주
배우자 황현정

1. 개요2. 생애3. 형사재판4. 이야깃거리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기업인.

다음커뮤니케이션(카카오에 합병)의 창업자다.[1] 다음커뮤니케이션에 손을 뗀 이후로는 소풍(sopoong)을 창업하며 사회적 기업 육성에 힘쓰고 있다.

2018년에는 쏘카 대표를 맡았다. 쏘카는 타다를 운영하고 있는 VCNC[2]의 모회사다.

2020년 일명 '타다금지법'으로 알려진 여객자동차운수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고 3월 13일 쏘카 대표에서 물러났다.

2. 생애

1968년, 인천광역시에서 이철형(1940~2008, 전 한국종합건설 대표)과 박은숙(1943~)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아래로 3살, 5살 터울의 여동생이 두 명 있으며, 본관은 경주 이씨이다. 서울영동고등학교, 연세대학교 공과대학 컴퓨터과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에서 인지과학을 공부했다.[3]

이 시절부터 인터넷과 예술의 조합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고 대학후배인 이택경과 파리에서 같이 유학하던 사진작가 박건희[4]와 함께 귀국, 1995년 다음커뮤니케이션을 설립했다. 사업초기에는 말 그대로 일개 중소기업 사장이었지만[5] 외부개발용역을 통해 사업 확장을 해나갔고 1997년 무료메일 서비스인 한메일을 런칭하면서 당시까지만 해도 유료서비스였던 이메일을 무료로 풀었다는 점으로 한바탕 센세이션을 일으키면서 주목받는 기업인이 되었다.

이후 다음 카페 등을 런칭하면서 다음을 단순히 커뮤니티 사이트 수준을 넘어 포털사이트로 탈바꿈시키고 야후를 앞지르며 다음이 1위 포털사이트로 등극했다. IT버블 붕괴로 인한 주가 폭락 때문에 크게 곤욕을 치르기도 했지만 여하튼 2000년대 초반까진 포털계의 1인자로 손꼽혔고, 당연히 포털업계 1인자였던 만큼 벤처기업으로 성공한 대표적인 부호로도 손꼽혔다.

NHN 전 사장을 지냈던 이해진과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이웃사촌으로 친분을 쌓았다고 하며, 이해진이 네이버컴을 만들 때에도 상당한 도움을 주면서 한때 다음에서 네이버 검색엔진을 쓰기도 했을 정도다. 물론 네이버가 다음과 결별한 뒤로는 다음을 제칠 정도가 되어버렸으니 호랑이 자식 키운 꼴에 가까워지기는 했지만 네이버에게 역전당하면서 격차를 좀체 좁히지 못하고 콩라인으로 전락했다. 그런데 그 상황에 대해 좌절하거나 그런 것은 없는걸로 보인다. 지금도 자주 연락 할 정도로 친하다고 한다. 그래도 사이트 자체가 아예 몰락해버린 네이트, 드림위즈, 코리아닷컴이나 완전히 사라져버린 야후 코리아, 파란, 네띠앙, 프리챌, 엠파스, 심마니 등등에 비하면 양반이다.

2000년대 초반 이후론 삽질의 연속으로, 사옥 이전 위치를 전주로 예정했다가 갑자기 자기 결단으로 제주도로 옮긴다던가, 오너경영 흉내내면서 회사문화를 데코레이션 한답시고 돈안되는 일을 벌이다 망쳐먹거나, 업무시스템을 개판쳐서 네이버에 인재 다 털리거나, 사업 분석이나 사람들 얘기를 듣기는 커녕 독재자인양 받아적고 내린 명령대로 일이나 하라고 하면서 다음을 망쳐버렸다.

결국 2008년 다음을 퇴사하고 대주주 지위만을 유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퇴사 후에도 이명박-박근혜 정부로부터 은연중에 압력을 많이 받았던 모양으로[6] 이명박과 박근혜 정부에 대해 억하심정을 드러내는 글을 적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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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과 카카오가 합병한 후로는 카카오의 소액주주라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이재웅 다음 창업주, '카톡 검열' 관련 시민 운동가와 '설전'. 김범수가 26.3%를 가지고 있고 본인이 3.3%인 185만 4,000주를 가지고 있다니 소액이라면 소액이겠고 다음에서 손을 뗀지 꽤 오래되었기는 했지만 이래봐도 한때는 벤처 부호 1위를 기록했던 인물인 만큼 나름대로 재벌급은 되는 수준이다.


2001년에 기아 옵티마 TV 광고 모델로 나온 바 있었다.

2017년 9월,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을 '오만하다'라고 정면으로 비판했다. 김상조 위원장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네이버 창업자 이해진을 “미래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다”라고 비판하자 이재웅은 '김 위원장이 얼마나 대단한 일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기업가를 이렇게 평가하는 것은 오만. 동료 기업가로서 화가 난다'라는 내용의 글을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렸다. 이해진과 이재웅이 사적으로 절친한 사이이기도 하지만, 네이버를 준대기업 집단으로 지정하는 문제로 공정위와 이해진이 대립하자 이재웅은 “네이버같이 지배구조가 투명한 기업은 정부가 과잉 규제해선 안 된다”라며 이해진 측을 옹호한 적이 있다. 김상조에 대한 비판도 이것의 연장선에 가깝다. 이후 이재웅은 '오만하다'라는 표현이 잘못되었다고 밝히고 '부적절하다'라는 표현으로 바꿨다. 한편 김상조 위원장도, 인터뷰 내용에 대해 비판을 받은 뒤 "이재웅 창업자의 지적을 무겁게 받아들인다. 변명의 여지가 없다”며 “부적절했다는 지적을 명심하고 자중하겠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2019년 2~3월경에는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장관의 혁신성장 관련 정책들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밝혔다. 홍남기 문서의 3.3문단 참조.

2021년 기준 카카오가 시가총액 40조원을 돌파하게 되면서 카카오의 지분 3.3%를 갖고있는 이재웅의 재산도 급격히 늘어나서 1월 20일 기준 현재 재산이 1조 2,965억원으로 억만장자가 되었다.

3. 형사재판

서울중앙지검 형사5부(부장검사 김태훈)는 2019년 10월 28일 이재웅 쏘카 대표와 박재욱 브이씨앤씨 대표 그리고 두 법인을 여객자동차운수사업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고 밝혔다. 검찰 관계자는 "'타다' 스마트폰 어플리케이션을 통해 11인승 승합차와 운전기사를 이용하여 면허 없이 여객자동차운송사업을 운영하고, 자동차대여사업자로서 법률상 허용되지 않는 유상여객운송을 한 혐의를 적용했다"고 설명했다. 법률신문

서울중앙지법 형사18단독 박상구 부장판사는 2020년 2월 19일 여객자동차 운수사업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이재웅 쏘카 대표와 박재욱 VCNC 대표, 그리고 각 법인 등에 무죄를 선고했다(2019고단7006). 법률신문

서울중앙지검(지검장 이성윤)은 2020년 2월 25일 공소심의위원회를 열고 이 판결에 항소할 것을 결정했다고 밝혔다. 법률신문

서울중앙지법 형사1-1부(장찬, 맹현무, 김형작 부장판사)는 2022년 9월 29일 여객자동차운수사업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이재웅 전 쏘카 대표와 박재욱 VCNC 대표, 각 법인 등에 1심과 같이 무죄를 선고했다(2020노845). 법률신문

2023년 6월 1일 대법원에서 무죄를 확정했다.#

4. 이야깃거리

  • 아내가 아나운서 출신인 황현정이다. 아직까지 자녀가 없다는 점 때문에 연예 찌라시가 많이 나돌아서 맘고생을 심하게 했다고.(...)
  • 2018년 9월에 열리는 2018 제3차 남북정상회담에 경제인 대표단 일원으로 방북하였다.
  • 쏘포터즈와 핸들러를 통해 전국민의 탁송기사화를 이루어낼 것으로 보인다.
  • 핸들러앱의 경쟁콜시스템으로 극한의 인건비 절감 혁신을 이루어내고있다.
  • 녹색당(대한민국) 지지자로 녹색당 상당한 액수의 당비를 내주는 이른바 큰 손이다. 2021년 재보궐선거에서는 녹색당을 탈당하고 무소속으로 나온 신지예를 지지했다.
  • 노회찬재단에 가입해있다.
  • 유명한 박경철의 아주대 강연에서 언급된 경제연구소 강연자 W의 주인공이 이재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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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단독으로 창업한 건 아니고 연세대 후배인 이택경과 사진작가 박건희와 같이 했다.[2] 비트윈의 개발사인 VCNC쏘카M&A된 후, 타다를 런칭했다.[3] 이때 감명깊게 본책이 촘스키와 체 게바라의 저서[4] 둘은 고등학교 동기동창이었으나, 함께 작업 도중 1995년 과로로 요절했다.[5] 그래도 인터넷 이용자수가 그리 많지 않았던 시절이라 그렇지, 다음 자체는 세계의 좋은사이트로 선정될 정도로 당대에도 나름대로 네임드급이긴 했다. 미국에서도 인터넷 보급률이 얼마 안 되었던 시절인지라 하루 방문자수는 1만 명 남짓이었다.[6] 2008년 촛불집회 당시부터 시작해서 세월호 사건, 메르스 사건 등 대형사건이 있을 때마다 세무조사건으로 다음을 탁탁 털어먹었다고 한다. 여하튼 묘한 시기에 세무조사를 한 것 때문에. 일각에선 진성호 의원이 2007년 대선 정국 당시에 네이버는 평정되었고 다음은 폭탄이다라는 말을 한 것에서 예고된것이 아니냐는 말을 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