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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웅 산 [[영국령 버마| 영국령 버마 총리 ]] | 우 누 [[버마 연방| 버마 연방 총리 ]] | 네 윈 [[버마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연방혁명위원회 위원장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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틴 초 [[미얀마| 대통령 ]] | 윈 민 [[미얀마| 대통령 ]] | ||||
※: 아웅 산 수 치는 헌법 조항 때문에 대통령 출마가 금지되어 측근을 대신 대통령 선거에 내보냈다. 미얀마 최고지도자는 공식적인 직책이 아니라 미얀마의 권력을 장악한 최고 실권자를 의미한다. |
우 누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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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07년 5월 25일 | ||
인도 제국 와케마 | |||
사망 | 1995년 2월 14일 (향년 87세) | ||
미얀마 양곤 | |||
재임기간 | 미얀마 총리1기 | ||
1948년 1월 4일 ~ 1956년 6월 12일 | |||
미얀마 총리2기 | |||
1957년 2월 28일 ~ 1958년 10월 28일 | |||
미얀마 총리3기 | |||
1960년 4월 4일 ~ 1962년 3월 2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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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 산산누, 타웅 흐타익, 마웅 아웅, 탄탄누, 킨아예누 | ||
소속 정당 | ''' 연방당 ''' (1958~1964)''' 의회민주당 ''' (1969~1973) | ||
학력 | 랑군 대학교 | ||
종교 | 상좌부 불교 | ||
주요 경력 | 미얀마 총리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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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얀마의 총리. 독립운동가이자 사회주의 운동가로 독립영웅인 아웅 산 사후 버마 연방의 초대 총리가 되어 미얀마를 이끌었다.민주주의를 정착시키려 나름 노력했지만 재임 기간 반군들의 저항, 중국국민당 잔당들의 게릴라전 등으로 인해 정치 혼란에 시달렸다. 그러다 결국 네 윈 장군이 군사반란을 일으켜 쫒겨났고, 이후 여러 차례 정권 탈환을 시도했으나 모조리 실패한 뒤 87세의 나이에 양곤에서 사망했다.
2. 생애
2.1. 독립운동가
우 누는 영국령 버마의 와케마 지방에서 태어났다. 그는 1929년 랑군 대학교에서 학사 학위를 받았다. 우 누의 정치 생활은 바로 이 랑군 대학교에서 시작된다. 우 누는 랑군 대학교 총학생회장을 맡았고, 그 아래에서 홍보부장을 맡았던 사람이 바로 그 유명한 아웅 산이다. 둘은 학교 총장을 비판하는 기사를 썼다가 1936년 강제퇴학당했고, 이 때문에 그해 2월에 대규모 대학생 파업이 일어나기도 했다.1937년에는 '나가니 북클럽'을 창립해 마르크스의 저서들을 처음으로 버마어로 번역해 퍼뜨렸다. 반식민주의와 사회주의에 관심이 많던 우 누는 '반파시스트 인민자유동맹'을 창립하고 영국으로부터 버마를 해방시키기 위해 애썼다. 그를 아니꼽게 보던 영국 식민당국은 1940년에 우 누를 감옥에 처넣었지만 얼마 안가 일본군이 미얀마에 쳐들어오며 풀려났다.
영국을 쫒아낸 일본은 괴뢰 버마국을 세우고 우 누를 외무장관으로 임명했다. 1944년에는 정보부장관으로 승진했는데, 고위직을 전전한 것을 보면 적극적인 대일본 독립 투쟁에 참여하지는 않은 모양. 아웅 산이 대놓고 게릴라를 펼치며 일본과 맞서던 것과는 달리, 우 누는 반군 지도자들과 연락을 유지하긴 했지만 대놓고 일본을 적대하지도 않았다.
1945년 연합군이 일본군을 몰아내고 미얀마에 진주하자 우 누는 일본군과 함께 퇴각했다. 이때 8월 12일에는 연합군의 폭격으로 죽을 뻔 하기도 했다고. 일본이 공식적으로 항복하자 우 누 역시 정계에서 완전히 은퇴하고 회고록이나 쓰면서 시간을 때웠다.
하지만 우 누가 아웅 산 등 권력 실세와 연줄이 있는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던 만큼, 우 누는 얼마 못가 다시 정치로 끌려들어왔다. 그는 반파시스트 인민자유동맹으로 돌아와 당내 공산주의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1947년 7월 아웅 산이 폭탄 테러로 사망하자 우 누가 실권을 잡았고, 10월에 영국 총리 클레멘트 애틀리와 독립 협정을 체결했다.
2.2. 미얀마의 초대 총리
미국을 국빈방문한 우 누 총리.
미얀마는 1948년 1월 4일 영국으로부터 독립했고 우 누는 버마 연방의 초대 총리로 취임했다. 하지만 우 누 앞에는 온갖 시련들이 닥쳐오고 있었는데, 하나는 전국적인 무장 반란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중국국민당의 잔재 세력이었다. 국공내전에서 패배한 국민당 잔당들이 미얀마로 도망쳐 동부에 터를 잡고 게릴라전을 펼쳤기 때문. 우 누는 1950년대 초에야 겨우 국민당 세력을 일소할 수 있었다.
우 누는 민주주의에 입각한 공화국을 만들려 노력했다. 여러 차례 총선이 안정적으로 치러졌고, 우 누는 50년대 내내 복지국가 설립 프로젝트인 '파이도타 계획'에 매달렸다. 그러다가 1956년에 자발적으로 총리직에서 내려와 잠시 휴식기를 가지다가 1957년 2월에 다시 총리직으로 복귀했다.
하지만 반파시스트 인민자유동맹이 우 누 총리의 'Clean' 파벌과 그 반대파인 'Stable' 파벌로 나뉘며 우 누에게도 큰 난관이 닥쳤다. 우 누 총리는 가까스로 의회의 불신임을 피할 정도로 입지가 위태로워졌다. 결국 그는 군부의 네 윈에게 내각의 총리를 맡아 정국을 잠시만 안정시켜달라는 요청을 했고, 네 윈은 이 제안을 받아들여 정권을 복원시킨 다음, 1960년 2월 6일에 치러진 총선거에 승리한 우 누에게 1960년 4월 4일에 권력을 다시 이양하게 된다. Clean 파벌은 총선 승리 직후 명칭을 '연방당'으로 재창당했다.
유엔 사무총장으로 재임한 우 탄트 역시 이때 우 누 총리의 보좌관이었다. 그러다가 1957년 유엔 버마 대표로 임명됐고 4년 후에는 유엔 사무총장으로 선출됐다.
우 누는 1961년 베오그라드에서 열린 제1차 비동맹운동 정상회의에 참석, 비동맹운동에 참여하면서 제3세계에 설 것임을 분명히 하기도 했다.
사실 우 누 총리의 재임기는 대단히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정부는 소수민족의 권리를 보장한다고 약속했으나 4개 소수민족들의 자치권은 중앙정부에 의해 박탈됐고, 이에 꺼인족과 공산당이 봉기를 일으키면서 연방제는 사실상 와해 상태에 들어갔다. 버마족과 소수민족간 민족 분규와 끊이지 않는 정당들의 경쟁, 부정부패, 물가 폭등 등으로 국가는 내전상태에 빠진다. 특히 급진적 사회주의 도입을 주장하던 공산당과 점진적 사회주의를 추구하던 우누 정부간 대립이 극심했다. 반군이 미얀마의 거의 3분의 2를 장악하기까지 하면서 정부는 수도만 장악하는 무능한 정권이라는 뜻의 '랑군 정부'라는 별명까지 얻으며 수세에 몰렸다.
2.3. 군사 쿠데타
혼란스러웠던 우 누 정권은 1962년 버마 군사반란이 일어나 무너졌다. 네 윈 장군이 반란을 일으켜 우 누 총리, 윈 마웅 대통령, 우 민트 테인 대법원장 등 정부 요인들을 구금하고 정권을 탈취했다. 이 것이 바로 지긋지긋한 미얀마 군부 정권의 시작이었다. 이후 우 누는 4년 동안이나 갇혀있다가 1966년에야 겨우 풀려났다.
네 윈은 '연방혁명위원회'를 설립하고 스스로 총리직에 취임했다. 그러나 기존 정치권의 목소리를 듣는 척은 해야했기에, 기존 정치인 33인으로 구성된 '내부 자문 위원회(IUAB)'를 설립하고 우 누를 이 자문위원으로 임명했다. 우 누는 1969년에 권력을 다시 내놓으라는 '보고서'를 제안했는데, 당연히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은 물론 신변에 위험이 있을 것까지 예상했기에 보고서 제출 직후 인도로 튀었다.
네 윈이 아무 응답이 없자 불안을 느낀 우 누는 인도를 떠나 영국 런던으로 도피했다. 네 윈은 1969년 11월에 열린 회의에서 '자신이 우 누의 제안을 거부했다. 우 누는 권력을 갈망했지만 자신은 농민과 노동자의 복지를 원한다. 우 누의 재집권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는 것'이라고 대놓고 언급하면서 우 누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부했다. 하지만 우 누는 이에 굴하지 않고 런던에서 자신이 버마의 합법적인 총리라고 선언했다.
우 누는 스스로를 여전히 버마의 적법한 총리로 선전하며 반정부 투쟁을 전개했다. 하지만 그의 세력은 최전성기에도 고작 수 천여명에 그쳤고, 국경 지대로 침투하려던 그의 시도는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재집권에 대한 희망을 버린 우 누는 1980년 네윈의 사면 제안을 수용하고 그해 7월 29일 미얀마로 돌아왔다.
2.4. 8888 항쟁의 실패와 죽음
하지만 우 누는 끝까지 한줄기 희망을 붙들고 있었다. 그는 새 정당 '우 누'를 창당하고 1989년 다시 자신이 미얀마의 적법한 총리라는 주장을 재선언했다.우 누는 임시 정부 구성을 선언하고 야당 지도자들을 규합했다. 외부 상황도 나쁘지 않아서 인도의 라지브 간디 총리도 임시정부 승인을 준비했고 버마 군대 사이에서도 동요가 일어났다. 하지만 이때 아웅 산 수 치가 폭력에 의한 정권 교체를 거부하며 모든 게 실패로 돌아갔다. 수 치 여사의 반대 이후 군대 역시 이탈했고, 8888 항쟁의 결정적인 몇 달이 그렇게 지나간 이후 우 누의 세력은 급속하고 쭈그러들었다. 서방 평론가들은 이를 '수 치 여사 최악의 실수'라고 평하기도 할 정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 누는 윈 마웅을 대통령으로 재임명하며 임시정부를 구성했다. 1988년 신군부세력인 국가법질서회복위원회(SLORC)가 네 윈 정부를 몰아내고 새롭게 집권했는데, 이들 역시 우 누의 임시정부를 인정해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우 누는 1989년 12월 가택 연금형에 처해졌다. 아마 고령의 나이와 독립에 대한 기여도를 인정해서 사형까지는 하지 않았던 모양.
이후 국가법질서회복위원회의 소 마웅 장군이 실각하고 또다른 군부 독재자 탄 쉐가 집권하면서 우 누 역시 석방됐다.
우 누는 1995년 2월 14일, 랑군에 있는 그의 집에서 자연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