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왓 포의 야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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วัดโพธิ์
Wat Pho
1. 개요
태국 방콕의 불교 사원. 정식 이름은 왓 프라 체뚜폰 위몬 망칼라람 랏차워라마하위한[1]으로 길이가 46 m에 달하는 거대한 와불(臥佛)로 유명하다. 참고로 '왓 포'라는 이름은 사원의 옛 이름인 '왓 포타람'[2]의 약칭이다.왓 포는 인근의 왓 프라깨우 등과 함께 태국에서 가장 격이 높은 사찰들 중 하나이다. 라마 1세가 처음 지어 자주 법회에 참석한 것으로 유명하고, 나중에는 라마 1세의 유해도 일부 봉안하기도 했다. 이후 라마 3세 시기에 현재의 모습으로 거대하게 증축되었다. 현재 왓 포에는 거대한 와불상을 포함한 태국 최대 규모의 불교 미술품이 소장되었고, 태국 최고(最古)의 공공 교육기관들 중 하나이자 유명한 전통 타이 마사지가 시작된 유서 깊은 장소이기도 하다. 이같은 역사성 덕분에 현재 왓 포에 소장된 여러 불화와 불상들, 각종 경전들은 유네스코의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
2. 역사
왓 포는 방콕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들 중 하나로 심지어 1782년 라마 1세가 방콕으로 천도하기 훨씬 이전부터 있었다. 원래 이름은 '왓 포타람'으로, 보리수의 사원이라는 뜻이다.[3][4] 정확하게 왓 포타람이 언제 창건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있지만, 1688년부터 1703년까지 아유타야 왕국을 다스린 페트라차 국왕 시절이라는 게 중론. 1688년에 아유타야 군대가 방콕 공성전에서 프랑스 군대를 몰아낸 이후, 프랑스의 군사요새를 헐어버리고 그 자리에 새롭게 사원을 세웠다는 것이다.1767년에 아유타야 왕국이 미얀마의 꼰바웅 왕조에게 멸망당하자 태국에는 잠시 동안 난립기가 찾아왔다. 이 난립기를 끝낸 사람은 바로 톤부리 왕조의 딱신 왕이었다. 톤부리 왕국을 세운 딱신 왕은 수도를 톤부리로 정하고 차오프라야 강 인근의 왓 아룬 바로 옆에 자신의 왕궁을 지었다. 당시 왓 포는 딱신의 왕궁 바로 옆에 있었고, 임금이 직접 사찰을 자주 드나들었던 덕분에 왓 포의 권위는 고공행진을 하였다. 그러나 딱신 왕은 시간이 흐를수록 총기를 잃고 폭정을 펼쳤다. 결국 딱신 휘하의 장군이었던 라마 1세가 쿠데타를 일으켜 딱신 왕을 몰아내고 새로운 왕조를 열었으니, 이 왕조가 바로 현재 태국 왕실인 짜끄리 왕조이다.
1782년 라마 1세는 수도를 차오프라야 강 건너편인 방콕으로 옮기고, 왓 포 바로 근처에 왕궁을 지었다. 1788년에 라마 1세는 오래된 왓 포 사원을 아예 통째로 개건하라고 명령했고, 아유타야, 수코타이 등지에서 공수해온 수많은 불교 미술품들을 이 곳에 보관했다. 1801년, 공사가 시작한지 12년 만에 왓 포의 재건 공사가 끝났다. 라마 1세는 새로운 사찰의 이름을 '왓 프라 체투폰 위몬 망클라람'으로 정했고, 왕궁에서 가까운 왓 포에 자주 드나들면서 법회에 참석하고는 했다고 전한다.
왓 포는 라마 1세의 대공사 이후에도 260여 년 동안 꾸준하게 개보수 공사를 거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가장 대표적으로 라마 3세 시절에 16년에 걸려서 대규모로 개축공사가 이루어진 바 있으며 이때 사원 부지의 규모가 무려 22에이커로 크게 확장되었다. 누워있는 와불상 등을 포함한 현재 왓 포 내부의 건축물들 대부분은 이때 지어졌다. 이뿐만 아니라 사원의 외벽에 여러 기록들과 비문들을 새겨 사람들을 위한 공공교육 시설을 겸하도록 만들기도 했다.[5] 이 기록과 비문들은 후에 역사성을 인정받아 2008년 2월 21일에 유네스코의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오랫동안 공공교육시설로 기능했던 왓 포는 사실상 태국의 첫 대학으로 통하고, 한국인들에게도 익숙한 타이 마사지의 중심지기도 했다.
3. 내부
사진 | 설명 |
프라 우보솟 (Phra Ubosot) 위의 그림에서 18번으로 표시된 주황색 지붕 건물. 결계당(結界堂)으로 한국 사찰에는 대응되는 건물이 없다. '결계당'이라는 번역어는 이 건물에 진짜로 상좌부 율장에 따른 결계를 쳤기 때문에 나왔다. 상좌부 불교 사찰에서는 결계당이 가장 중요한 곳으로, 여기서 승려들이 포살을 하고 수계식을 한다. 왓 포 전체에서 가장 신성한 건물이다. 라마 1세가 아유타야 양식으로 지었으며 이후 라마 3세 재위기에 크게 확장 공사를 거쳤다. 내부에는 기둥들이 열을 이루어 지붕을 떠받치고 있고 거대한 금동 불상이 끝 연단 위에 앉아 있다. 불상의 머리 위에는 국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9층 우산이 씌워져 있다. 건물 외벽에는 태국 전통 서사시인 '라마끼엔'의 내용이 150개 돌들에 새겨져 있다.[6] | |
위한 프라논 (Vihan Phranorn) 위의 그림에서 1번으로 표시된 푸른빛 지붕 건물. 이곳에 왓 포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와불상이 안치되었다. 왓 포를 찾은 관광객들은 결계당인 프라 우보솟과 위한 프라논 건물만 보고 돌아가는 경우가 많다. 내부에는 부처의 일생을 담은 벽화로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위한 프라논 인근에는 스리랑카에서 기증한 보리수가 있는 중국식 정원이 있다.[7] | |
와불상 (Phra Buddhasaiyas) 위한 프라논 내부의 거대한 금빛 와불상. 사실상 관광객들이 왓 포를 찾아오는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1832년 라마 3세 시기에 만들어졌으며 부처가 열반에 이르기 직전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높이는 15 m, 길이는 46 m로 태국의 온 불상들 중에서 크기로는 수위권 안에 든다. 속은 벽돌로 채우고 그 위에 금속판을 붙인 뒤 도금하였다. 불상의 발 부분은 높이 3 m, 너비 4.5 m이고 진주층으로 꽃, 코끼리 등 여러 가지 상징적인 문양들이 가득 상감되었다. 부처를 예경하고자 혹은 길한 기운을 받고자 발 부위를 어루만진다. 복도에는 그릇 108개가 놓였는데, 관광객들은 행운을 기원한다는 의미로 이 그릇들에 동전을 던지곤 한다.[8] | |
프라 라비앙 (Phra Rabiang) 라마 1세가 태국 전역에서 모아온 불상 1200좌 중 예술성이 뛰어난 400좌를 골라 전시한 회랑. 왓 포의 외부 회랑에 위치한다. 어떤 것들은 좌불상이고 어떤 것들은 입불상들로, 자세히 보면 모두 그 자세나 표정 등이 미묘하게 다르다. 원래 모두 현재처럼 황금빛 금불상은 아니었으나, 라마 1세가 통일성을 위해 금종이를 표면에 붙여 도금하여 모두 똑같은 금색을 띠게 되었다. |
[1] วัดพระเชตุพนวิมลมังคลารามราชวรมหาวิหาร[2] วัดโพธาราม[3] 보리수 아래에서 부처가 깨달음을 얻었다.[4] '왓 포'라는 이름이 바로 이 왓 포타람에서 유래했다[5] 이 기록들은 당시 라마 3세의 궁정에서 일하던 신하 50여 명과 당시 태국 불교 승왕(僧王)이던 파라마누칫치노롯이 썼다.[6] 이 돌들은 아유타야의 사원에서 가져온 것이다.[7] 이 보리수나무는 단순한 보리수가 아니다. 스리랑카 전설에 의하면 석가모니가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었던 바로 그 보리수나무의 가지에서 자라난 자목(子木)이라고 한다.[8] 이 동전들은 모두 사찰 운영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