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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윤진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오윤진
吳允珍[1]1927년 9월 22일 조선일보 기사 또는 吳允1948년 3월 3일 조선일보 기사 등으로 표기한 자료도 있다.]
파일:오윤진.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오근(吳槿)[2]
출생 1909년 10월 15일
평안북도 강계군 읍서면 서부동[3]
(현 자강도 강계시 구정동·남산동·충성동)
사망 1993년 2월 27일
서울특별시 강동구 둔촌동 중앙보훈병원
학력 강계 사립영실학교[4] (졸업)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444호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3. 광복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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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2. 생애

1909년 10월 15일 평안북도 강계군 읍서면 서부동(현 자강도 강계시 구정동·남산동·충성동)에서 태어났다. 이후 강계 사립영실학교(英實學校)를 졸업했다. 영실학교 재학 중이던 1924년 11월 20일부터 22일까지 개최된 강계 소년소녀 현상문예대회에 참여해 논문 부문 1등에 입선하기도 했다.

그는 영실학교 졸업 후 조선일보사 강계지국에 기자로 입사했고, 1927년 5월 12일 강계군 '송아지'회(會) 정기총회에서 위원에 선임되었고, 9월 20일 회원 20명[5]의 강계청년동맹을 창립했다. 9월 22일에는 조선일보사 강계지국 기자직을 사임했다.

그 뒤 1928년 1월 3일 강계청년동맹 제9회 집행위원회에서 준비위원에 선임되었고, 1928년 11월 13일 동아일보사 강계지국에 기자로 입사했다.

1928년 12월 2일 상경하여 송(宋)모씨와 만나 그로부터 쳥년운동의 방향 전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고, 1929년 1월 전후로 강계청년동맹 위원장에 취임하면서 강계청년동맹과 농민사(農民社), 신간회, 직공동우회(職工同友會) 등을 배경으로 사회주의를 선전하며 사회운동의 방향을 전환하고자 했다. 1929년 2월 25일에는 강계군 천도교종리원(宗理院) 강당에서 강계 사월회(四月會)를 조직하고 임시의장으로서 집행위원 선출을 참관했다.

특히 그는 1929년 5월 1일 노동절을 계기로 '일본 제국주의 타도' '농민 로동자 ◯◯을 ◯◯하라' '자본가 디주 ◯◯를 ◯◯하라' '피압박 민족을 ◯◯하라' '만국 로동자는 단결하라' '약소민족을 해방하라'는 등의 포스터를 강계군 읍내 각처에 부착했다가 같은 날 소위 불온 포스터를 부착한 혐의로 동지 황영호(黃永浩)[6]·김경원(金炅元)[7]·김찬빈(金贊斌)[8]·강석민(姜錫玟)·김성길(金成吉)·김창현(金蒼鉉)·이석호(李錫浩)[9] 등과 함께 강계경찰서 소속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오윤진은 7명의 동지들과 미결수로 5개월간 구금되어 있으면서 그 사이 8월 11일 기자 직책을 사임했고, 10월 30일 강계지방법원지청에서 예심이 종결되어 황영활·김경원과 함께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신의주지방법원 공판에 회부되었다.

오윤진과 그 동지들은 일본 경찰에 의해 비슷한 시기 평안북도 영변군에서 활동하다가 체포된 신흥청년회(新興靑年會) 회원들과 소위 '영변공산당'를 조직해 활동한 것으로 간주되었으며, 결국 1930년 8월 19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8개월형을 선고받고 투옥되었다.

이후 총 1년 3개월 19일간의 옥고를 치른 뒤 출옥한 그는 1930년 9월 30일 동지 김경원과 함께 동아일보사 강계지국에 기자로 재입사했다. 그 뒤 강계도립의원에서 의료급여환자의 투약을 거절한 기사를 썼다가 강계도립의원장 키쿠치 겐조(菊池源造)에게 고소당했고, 이에 강계경찰서에 구류되었다가 쌍방 합의하에 12월 8일 고소가 취하되어 석방되었다. 12월 20일에는 동아일보사에서 기획한 주요도시순회좌담 강계편에 강계지국 기자로 참여했다. 12월 27일에는 금주군(禁酒軍) 야학에서 개최한 현상웅변대회에 심사위원으로 참석했다.
파일:강계기자단(1931년).png
1931년 2월 16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실린 강계기자단원들의 사진. 오윤진은 오른쪽에서 세 번째 인물로 추정된다.

1931년 2월 8일 강계군 지역 언론계의 권위를 높이고자 조선일보 강계지국에서 강계기자단 창립대회가 개최되었고, 이날 임시집행부 기록위원에 선정되어 강령·규약·의안 등을 기록하고, 조사부 위원에 선임되었다. 2월 15일에는 그해 3월 초에 예정된 강계문제강연회의 준비위원에 선임되었다. 9월 18일에는 동아일보사 강계지국장에 취임했고, 그해 10월 20일부터 23일까지 3차례에 걸쳐 동아일보에 '江界山蔘(강계산삼)은 어떠캐 採取(채취)할가'라는 글을 연재했다. 한편, 9월 18일 기존에 김경원 등과 함께 운영해오던 유신(由信)야학[10]을 강계군 당국으로부터 인가가 없었다는 것을 구실로 야학의 폐쇄를 요구받기도 했다. 또한 11월 17일 강계 명신학교(明新學校)를 후원하는 면학회(勉學會)의 신임이사에 선정되기도 했다.

1933년 2월 11일에는 강계체육회 창립준비위원으로 창립에 참여했고, 10월 4일부터 10월 10일까지 2차례에 걸쳐 '江界의 山蔘이란 어떠한 것인가'라는 글을 연재했다. 10월 9일에는 강계문제좌담회를 주최했고, 11월 2일 강계상무회 제13회 정기총회에서 서기에 선임되었다. 11월 16일에는 육영사업가 원파(圓坡) 김기중(金琪中)[11]의 동상을 중앙고등보통학교 교정에 건립하고자 기념동상건설회를 발기하자, 발기인 중 한 사람으로 참여했고, 12월 25일에는 고향 강계군을 알리기 위해 2년에 걸쳐 저술한 『강계총관(江界總觀)』을 동아일보 강계지국을 통해 간행했다.

1935년 1월 6일에는 강계군 지역의 언론인들과 함께 구성원들의 건강한 정신 함양, 지식 향상, 사회 여론의 연구·검토를 목적으로 북진회(北辰會)를 창립하고 간사에 선임되었다. 5월 초에 석주(石州)체육회 제2회 정기총회에서 서북축구정구대회 간사에 선임되었다. 12월 1일에는 강계지국장 직책을 사직했고, 12월 말 강계빙상대회 통고원(通告員)에 임명되었다.

1936년 5월 24일 석주체육회 제3회 정기총회에서 다시 간사에 선임되었다.

1937년 신사참배 문제로 모교인 영실학교가 존폐 위기에 처하자, 학교 사수를 위해 그해 9월 22일 유지회가 조직되었고, 당일 오윤진은 상무이사[12]선출되었고, 이어 10월 26일에는 유지회 서기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12월을 전후해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강계지국장에 취임하면서 친일로 전향한 정황이 포착된다.

1938년 3월부터는 강계군에 '문우당(文友堂)'이라는 문구점을 개업했고, 5월 15일 석주체육회 제5회 정기총회에서는 서기에 선임되었다. 그 뒤 1938년 9월 4일 친일 전향자 단체인 시국대응 전조선사상보국연맹(時局對應全朝鮮思想報國聯盟) 신의주지부의 결성식에서 강계군 지역 간사에 선출되면서 본격적으로 친일로 전향했다. 1939년 11월 말부터는 강계 우마차조 이사에 취임했다.

3. 광복 후

광복 후에는 주로 천도교 간부로 활동했다. 1947년 5월 4일 천도교 중앙대교당 대강당에서 어린이날 축하 아동예술제가 열리자 천도교소년회 소속 사회자로 참석해 연혁을 보고하는 등 원활한 행사 진행에 기여했다. 1948년 3월 3일 천도교 총본부에서 3.1절 기념식이 거행되자 사회자로 참석했다. 1950년 11월 6.25 전쟁 발발로 전시체제에 순응하기 위해 천도교보국연맹 기획처 위원에 선임되었다.

이후 서울특별시 도봉구 수유동[13] 172-47번지 자택에서 거주하다가 199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에 수여되었다.

그 뒤 1993년 2월 27일 서울특별시 강동구 둔촌동 중앙보훈병원에서 위암으로 별세했다. 그의 유해는 1993년 3월 2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에 안장되었다.

[1][2] 이 이름으로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다.[3] #[4] 英實學校. 일제강점기 평안북도 강계군에 있던 유일한 4년제 사립 중학교였다. 1907년 미국 북장로교의 후원으로 강계군의 장로교 수령 김태희(金泰羲) 등의 발기로 그해 8월 1일 창립된 미션스쿨로, 초대교장은 캠벨(Campbell, A.)이었다. 1908년 대한제국 정부의 인가를 받은 뒤 계속 경영되어 오다가, 1937년 신사참배 거부 문제가 불거지자, 1937년 9월 미국 북장로교 선교회에서는 교육사업을 모두 종료하기로 해 폐교 위기에 처해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당시 설립자 명의가 강계군 유지 이준겸(李俊謙)으로 되어 있어 강계군 유지들은 유지회를 결성하고 학교를 인수해 나름대로 학교를 경영하고자 했다. 그러나 1939년 2월 평안남도 당국으로부터 '학교내용이 충실하지 못하다'는 구실을 들었고, 또한 '강계군 유지들이 끝까지 영실학교의 존속을 고집한다면 이번에 강계군에 신설될 공립중학교 설립을 취소하겠다'고 폐교를 권고해 결국 신입생 모집을 중단하고 재적생들을 선천의 신성중학교(信聖中學校)에 편입시킨 뒤 폐교 절차를 밟았다. 이후 3월부터 다시 이준겸을 중심으로 영실학교 부활운동이 일어나기도 했으나 결과는 알 수 없다.#[5] 1929년 1월 16일에는 회원이 32명에 이르렀다.[6]浩라고도 한다.1929년 1월 15일 동아일보 기사[7] 1929년 11월 9일 조선일보 기사에는 金元으로 오기되어 있다.[8] 1929년 11월 7일 동아일보 기사에는 金贊로 오기되어 있다. 직공동우회 위원장을 역임했으며, 오윤진 등과 함께 4개월간 구금되어 있다가 1929년 11월 7일 면소를 받고 병보석으로 출옥했다.[9]石虎라고도 한다.1929년 11월 9일 조선일보 기사 본래 남만주에서 남만청년총동맹을 조직한 뒤 1926년 7월 강계군으로 들어와 강계청년동맹에 가입하게 되었다고 한다.[10] 1931년 9월 24일자 동아일보 기사에는 維新야학으로 기재되어 있다. 1927년에 오태호(吳泰昊)·송관옥(宋官玉)·이창문(李昌文)·계익표(桂益杓) 등이 발기해 개교한 야학이라고 한다.[11] 인촌 김성수의 아버지이다.[12] 1937년 9월 26일 조선일보 기사에는 상무위원으로 적혀 있다.[13] 1995년부터 강북구에 소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