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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타키 에이이치 大瀧詠一[1] | Eiichi Ohtaki | |
본명 | 오오타키 에이이치 | 大瀧 榮一 | Eiichi Ohtaki |
출생 | 1948년 7월 28일 |
이와테현 에사시군 야나가와무라[2] | |
사망 | 2013년 12월 30일 (향년 65세) |
국적 | [[틀:깃발| | ]][[틀:깃발| ]][[연합군 점령하 일본| ]]→
직업 | 싱어송라이터, 작곡가, 편곡가, 프로듀서, 기타리스트 |
학력 | 와세다대학 제2문학부 중퇴 |
레이블 | 나이아가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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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오타키 에이이치는 일본의 싱어송라이터로, 포크 록 밴드 핫피 엔도에서는 보컬과 리듬 기타를 담당했다.밴드 동료 호소노 하루오미와 함께 일본 음악에서 중요한 영향을 남긴 뮤지션 중 한명으로 손꼽힌다. 1974년 레이블 '나이아가라'를 설립해 야마시타 타츠로 등 이른바 뉴뮤직 세대를 길러내 뉴뮤직의 막후로 꼽히는 인물이기도 하다.
2. 인명 표기 관련
외래어 표기법/일본어에 따르면 장음은 표시하지 않기 때문에 '오타키 에이이치'가 된다.[3] 그러나 통용적으로는 장모음인 おお를 살려 '오오타키'라고도 한다. 그리고 이름인 '에이이치'는 연음 처리하여 '에이치'로 표기하는 경우도 간혹 있기 때문에 성과 이름에 모두 특이사항이 있어 한글 표기 바리에이션이 4가지나 된다.영어권에서는 주로 앨범 커버에 표기된 대로 'Eiichi Ohtaki'로 표기한다.
3. 생애
3.1. 성장기
1948년 7월 28일 현재의 오슈시인 에사시군 야나가와무라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뿐인 편모가정에서 자랐으며 교사였던 어머니를 따라 어린 시절 전학을 다녔다고 한다. 초등학교 5학년 처음으로 아메리칸 팝을 접한 이후 음악에 매료되어 중학교 시절 라디오를 자작해서 미군 방송이나 일본 방송을 청취했을 정도였다. 이후 음반 수집을 시작해서 엘비스 프레슬리나 비치 보이즈 음악을 분석하기 시작했다.라디오를 자작했을 정도의 굉장한 서양팝 덕후로 무려 1962년부터 1966년에 차트에 오른 곡은 전부 기억하고 있다고 말할 정도. 이는 이후 음악 스타일에도 많은 영향을 끼친다. 거기에 일본 음악에도 정통했다고 한다. 1964년 하나마키시의 현립학교에 진학하며 하숙했지만 1년치 등록금을 전부 음반 구입으로 까먹는 바람에(...) 카마이시시의 다른 학교로 편입했다. 고등학교 입학을 전후하여 비틀즈에 대해 알게 되었고 이후 리버풀에서 활동하던 밴드의 레코드를 사들이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밴드에 들어갔다. 처음 맡은 역할은 드럼. 고등학교 졸업 이후 도쿄의 제철회사에 들어갔지만 출근 20일, 총 3개월 만에 때려치고 나왔다. 퇴사 며칠 전에 있던 회사 행사
이후 짧게 밴드를 하다가 해산한 후 와세다대학 제2문학부에 입학했다. 여기서 지인 나카다 요시히코(中田佳彦)를 통해 앞으로 일본 음악계에 큰 족적을 함께 남기게 될 호소노 하루오미를 처음 만나게 된다. 호소노는 자신의 집에 찾아 온 오오타키의 수준을 테스트하기 위해 영 블러즈(The Youngbloods)의 <Get Together>의 싱글 버전을 슬쩍 방에 놓고 갔는데, 이후 돌아와보니 오오타키가 "오! 겟투게더네!"라고 반응했다고. 이후 셋은 정기적으로 팝 연구회를 열었고 1969년 호소노의 이전 밴드가 해체하려던 즈음 오오타키에게 밴드 결성을 제안하면서 전설의 핫피 엔도가 탄생하게 된다.
3.2. 핫피 엔도 시절
핫피 엔도 시절에는 주로 하드록적 색채가 강한 음악을 주로 만들었다. 핫피 엔도가 포크 록 밴드를 표방했는데, 밴드 동료 호소노 하루오미가 포크송 색채가 강한 음악을 많이 만들었다면, 오오타키 에이이치는 록 음악 사운드에 특화된 면모를 많이 보였다. 이처럼 같은 밴드 내에서는 음악적 색깔과 견해 차가 확연해지자, 핫피 엔도는 해체하게 된다. 핫피 엔도 해체 이전인 1972년에는 솔로 앨범 <오오타키 에이이치(大瀧詠一)>를 발매하기도 하였다.3.3. 솔로 뮤지션으로서
핫피 엔도 해체 이후 오오타키 에이이치는 일찍이 상업음악의 저력을 알고 1974년 '나이아가라'라는 이름의 레이블을 설립한다. 나이아가라는 자신의 성 '오오타키(大滝)'의 뜻인 '큰 폭포'에서 착안한 네이밍이다. 나이아가라의 프로듀서로 활동하며 밴드 슈가 베이브를 발굴하고 데뷔시켜 야마시타 타츠로, 오오누키 타에코의 음악 커리어에 발판을 마련해준다. 이외에도 사노 모토하루 등 재능있는 뮤지션들을 발굴했다. 그러는 한편 자신도 NIAGARA MOON과 같은 앨범 작업과 함께 라디오 DJ 활동으로 팬층을 확보해 나갔다. 하지만 흥행에는 실패하여 경영이 악화되었고 결국 1976년 레이블 전체가 콜롬비아 레코드로 이적하게 되었다.당시 조건은 좋은 음악환경을 제공하는 대신 3년 안에 12개 음반을 발매하는 조건이 걸려 있었는데, 이 당시 <NIAGARA TRIANGLE Vol.1>과 같은 몇몇 앨범이 좋은 성적을 거두었으나 전체적으로 매니악한 음악 성향 때문에 흥행에는 참패하고 1977년작인 <NIAGARA CALENDAR>는 차트 진입조차 실패했다[5]. 결국 1978년 <LET'S ONDO AGAIN>을 마지막으로 콜롬비아와의 계약을 해지하고 사실 상 휴업 상태에 들어간다.
그러던 중 야마시타 타츠로의 RIDE ON TIME이 크게 히트하면서 침체된 레이블이 활력을 찾기 시작한다. 음악 활동보다 레이블 경영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였지만 뮤지션으로서의 활동을 완전히 접지는 않았는데, 그는 핫피 엔도 시절의 전 동료인 마츠모토 타카시와 함께 의기투합해 1981년 <A LONG VACATION>를 발표해 오리콘 차트 2위에 오르는 등 큰 호응을 얻는다. <A LONG VACATION>의 히트는 현재 일본의 시티팝 유행에 선구자적인 역할을 한 앨범으로 평가받으며, 일본 대중음악 명반을 꼽을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앨범이다. 롤링 스톤 재팬 선정 100대 명반 리스트에도 7위에 올랐다. 3년 뒤 발표한 차기작 <EACH TIME> 역시 잇달아 우호적인 반응을 얻으면서, 나이아가라 사단 뮤지션들과 함께 일본 AOR 장르를 개척하는데 크게 기여한다. 이후 시티팝 열풍이 불면서 오오타키 에이이치의 솔로 활동 역시 재조명 받고 있다.
<EACH TIME> 이후 오랜 기간 음반 발표를 하지 않던 오오타키 에이이치는 프로듀서, 작곡가로 활동하면서 나이아가라 레코드의 옛 작품들을 리마스터링하며 활동하며 팝 역사 연구가로도 활동하여 새로운 이론을 발표하기도 했다. 1997년 12년만의 컴백을 선언하며 발매한 '幸せな結末(행복한 결말)'을 발표한다. 기무라 타쿠야를 주연으로 내세운 드라마 러브 제너레이션의 주제가로 사용되면서 아주 큰 인기를 끌기도 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말년에는 야마시타 타츠로의 라디오방송에 간간히 얼굴을 비추었다.
3.4. 사망 및 사후
2013년 12월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병환이나 노환이 아니고, 사과를 먹다가 사과 조각이 기도에 걸려 질식한 것이 원인이 되어 사망했다고 한다. 레전드 뮤지션이 허망하게 떠나 많은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다.이후 주변 동료들에게 평소부터 구상을 말해왔던 올타임 베스트 앨범인 'Best Always'가 발매되고, 2016년에는 유품을 정리하며 발견된 미발표 음원[6]을 모아 구성한 'DEBUT AGAIN'이 발매되기도 하였다.
2021년 3월 3일 유튜브에 음원이 풀렸다.
4. 디스코그래피
굉장히 많은 음반을 작업했으며 아래 작품 외에도 다양한 버전의 앨범이 존재한다.4.1. 정규 앨범
4.2. 컴필레이션 앨범
4.3. 인스투르멘털 앨범
발매년도 | 제목 |
1981년 | Sing A LONG VACATION[12] |
1982년 | NIAGARA SONG BOOK[13] |
1984년 | NIAGARA SONG BOOK 2[14] |
2019년 | NIAGARA CONCERT '83 |
5. 여담
- 오오타키 에이이치의 장례식에서 핫피 엔도 멤버들 세 명이 오래간만에 모였다고 한다.
- 2021년부터 그의 고향인 오슈시의 미즈사와에사시역의 발차음이 A LONG VACATION의 수록곡인 '그대는 천연색'으로 지정되었다.
- 싱어송라이터 카네노부 사치코와 친한 사이였으며, 그녀의 데뷔 싱글 時にまかせて을 프로듀싱했다.
[1] 아티스트 명으로 표기할 때는 '大滝詠一' 사용.[2] 現 이와테현 오슈시.[3] エイ는 통상 장모음으로 분류되지만 외래어 표기를 할 때는 예외적으로 표기를 살린다.[4] Rubber Soul 수록곡.[5] 다만 오오타키가 회상하길 기술적 문제가 있어서 그런걸지도 모른다고 말했다고 한다.[6] 대부분 다른 가수에게 제공했던 음악의 셀프 커버였다고 한다.[7] 3명의 아티스트가 공동으로 작업한 앨범. 오오타키 에이이치, 야마시타 타츠로, 이토 긴지가 참여했다.[8] NIAGARA FALLIN' STAR라는 이름으로 참여[9] 3명의 아티스트가 공동으로 작업한 앨범. 오오타키 에이이치, 사노 모토하루, 스기 마사미치가 참여했다.[10] 50주년 기념 앨범[11] 사후의 발매된 오오타키 에이이치 최초의 올타임 베스트 앨범.[12] A LONG VACATION에서 마지막 곡을 제외한 전곡 수록[13] A LONG VACATION과 NIAGARA TRIANGLE Vol.2 수록곡과 싱글 '青空のように','夢で逢えたら' 등의 인스투르멘털 버전 앨범[14] EACH TIME과 NIAGARA CALANDER 수록곡의 인스투르멘털 버전 앨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