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lbgcolor=#cd0000><colcolor=#ffe400,#ffe300> 소비에트 연방 제2기갑사단 사령관 예고르 솔랸킨 егор солянкин | Yegor Solyankin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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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명 | 예고르 니콜라예비치 솔랸킨 егор николаевич солянкин Yegor Nikolaevich Solyankin | ||
| 출생 | 1901년 4월 21일 | ||
| 러시아 제국 모스크바 (現 러시아 모스크바) | |||
| 사망 | 1941년 6월 26일 (향년 40세) | ||
| 소련 리투아니아 SSR 라세이냐이 | |||
| 재임기간 | 소련군 제2기갑사단장 | ||
| 1940년 12월 9일 ~ 1941년 6월 26일 |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cd0000><colcolor=#ffe400,#ffe300> 가족 | 배우자 바르바라 바실리에브나 딸 라이사 아들 알렉산더 | |
| 학력 | 모스크바 군사정치학교 | ||
| 최종 당적 | [[소련 공산당|]] | ||
| 최종 계급 | 소장 (소비에트 지상군) | ||
| 주요 참전 | 러시아 내전 독소전쟁 | ||
| 주요 서훈 | 대조국전쟁훈장 1급 붉은군대20주년훈장 | }}}}}}}}} | |
1. 개요
소련의 군인.2. 생애
1901년 3월 모스크바에서 태어난 예고르 솔랸킨은 4세에 부모를 잃고 스몰렌스크 주의 친척 집에서 목동으로 일했다. 12살 때부터 대장장이로 일했다. 1918년에 예고르는 붉은 군대에 징집되었고, 거기서 그의 군 경력이 시작되었다. 그는 1920년 6월 17일 붉은 군대에 입대했으며, 남부 전선에서 백군 장군 표트르 브란겔의 군대 및 네스토르 마흐노가 이끄는 마흐노우슈치나와 싸운 러시아 내전에도 참전했다.예고르 니콜라예비치는 지휘관 양성 과정을 다양하게 수료했으며, 처음에는 보병으로 복무하다가 1931년 12월부터는 전차병으로 전과했다. 그는 자신의 부대에 배치된 모든 전투 차량을 운전하고 수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1936년에 카잔에서 제1소총사단의 전차대대 지휘관으로 복무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대대에는 러시아어를 전혀 모르는 타타르족이 많았다. 전차에 대한 기술 지침이 타타르어로 번역되지 않았기 때문에 솔랸킨은 러시아어를 공부하기 위한 과정을 마련한다. 1년 동안 단 한 번의 사고나 고장도 발생하지 않은 승무원 지휘관들은 사단 당대회에 파견되었다. 그리고 부하직원들과 더 나은 소통을 위해 그는 타타르어를 배웠다. 예고르 니콜라예비치는 카잔에서 3년 남짓을 보냈다. 그러던 중의 일화가 있는데, 그가 카잔에서 복무하던 시절, 병사들 중 타타르족 병사들에게 돼지고기가 지급되었는데, 이슬람교도였던 그들은 이를 먹기를 거부했다. 이에 솔랸킨은 한 집단농장과 협의하여 부대에 타타르인들이 높이 평가하는 말고기를 공급받았다. 부하들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그는 직접 타타르어까지 배웠다. 1937년 6월, 그는 레닌그라드 군사 지구로 전속되어 전차 연대의 사령관이 되었다. 1940년 발트 3국이 소련에 합병되자 그는 제18전차여단을 지휘하여 에스토니아의 수도인 탈린에 입성한다.
1941년 6월, 솔랸킨은 이미 소련 국경 바로 옆에 주둔한 전차 사단의 사령관을 맡고 있었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날인 6월 21일, 솔랸킨은 전쟁이 머지 않았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자신의 부대 지휘관들의 아내와 자녀들을 대피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전쟁이 발발하자 상부로부터 라세이냐이 마을로 이동하고 리가를 목표로 하고 있던 독일군 제41기계화군단의 부대를 그 지역에 억류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6월 23일, 제2기갑사단은 독일 전차 부대에 필사적인 공격을 가했다. 소련 전차 사단 1개가 독일 제41전차군단의 공격을 받았다. 이 사단에는 전차, 기계화, 보병 사단 2개가 있었으며, 병력은 약 5만 명이었고, 소련군은 1만 명이었다.
거의 3일 동안 소련군은 측면 엄호 없이 공중에서 끊임없이 공격을 가해 적의 맹공을 막아내고 적에게 피해를 입혔다. 6월 25일까지 사단은 막대한 손실을 입어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상 남아 있는 탱크가 하나도 없고 포병과 차량도 손실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솔랸킨은 엄청난 손실을 감당하지 못하고 포로가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자살했다. 사단의 생존 참전 용사들이 전하기로는, 그를 숲속에 묻으면서 적의 눈을 피하기 위해 무덤에 봉분조차 만들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 근처에는 사단의 문서가 들어 있는 금고도 땅에 묻었다고 전해진다.
3. 여담
- 그의 전우들이 회상하기를, 솔랸킨은 사냥용 엽총을 가진 지휘관들을 불러 함께 사냥을 나가곤 했다고 한다. 그렇게 잡은 사냥감은 모두 부대의 공동 취사용 솥에 넣어 병사들과 함께 나눠 먹었다. 또한 이들은 들판과 숲에서 사냥을 하며 동시에 지형을 정찰하기도 했는데, 이는 훗날 성공적인 야전 행군이나 기동 훈련에 큰 도움이 되었다.
- 예고르 솔랸킨의 가족은 독소전쟁을 무사히 살아남았다. 2025년 4월 12일 기준, 그의 92세 된 딸 라이사와 86세 아들 알렉산드르는 모스크바에 거주하고 있다. 아들 알렉산드르 역시 아버지의 길을 따라 전차 부대에서 복무하며 인생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