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02 16:52:02

영국령 우간다 계획

1. 개요2. 전개 과정3. 실현되었다면?4. 비슷한 계획들5. 매체6. 같이 보기

1. 개요

British Uganda Programme/Uganda Scheme

20세기영국유대인들에게 제안한 아프리카 유대인 국가 수립 계획.

2. 전개 과정

발단은 러시아반유대주의에서 시작되었다. 러시아에서는 시온 의정서 사건으로 반유대주의가 극에 달하고 유대인들에 대한 탄압이 이어졌다. 견디다 못한 유대인들은 러시아 제국을 빠져나와 유럽 각국과 미국으로 이주했는데, 당시 러시아 제국을 탈출한 유대인 중 약 7%에 해당하는 14만여 명이 영국으로 난민이 되어 몰려왔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당시 영국 식민지 장관 조지프 체임벌린이 시오니즘의 지도자였던 테오도르 헤르츨에게 영국으로 몰려드는 동유럽 출신 유대인들을 수용하기 위해서 영국령 동아프리카 마우 고원의 약 13,000제곱킬로미터의 땅을 줄 테니 그곳에 유대인 국가를 건설하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1] 당시 러시아 제국에서 영국으로 이주한 유대인 상당수가 남아공 식민지로 재이민하던 상황이었기에[2] 영국 입장에서 완전 터무니없는 제안을 한 것도 아니었다.

테오도르 헤르츨은 1903년 바젤에서 열린 제6차 시오니즘 총회에 이 문제를 안건으로 올렸고 회의에서는 이 안건을 놓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비록 1897년 바젤에서 열린 제1차 시오니즘 총회에서 유대인 국가를 팔레스타인에 건설하기로 결정을 내렸고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 이주가 진행 중이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굳이 영국의 제안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느냐는 반대 의견도 있었지만, 팔레스타인이 본질적으로 오스만 제국의 통치 아래에 있고 이미 그곳에는 유대인들보다 수적으로 훨씬 많은 아랍인들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이들이 외부에서 이주해오는 유대인들과 충돌할 위험성도 컸기 때문에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를 재건하는 게 요원하다는 현실론도 만만치 않았다. 그 과정에서 러시아 유대인 대표가 강력하게 반발하며 퇴장하는 일도 있었지만 결국 투표 결과 총원 295명 중 177명의 찬성으로 이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1904년, 시오니즘 총회는 세 명의 대표를 영국이 제안한 마우 고원으로 보내서 현지 사정을 파악하게 했다. 마우 고원은 적도 바로 아래 지점이긴 했지만 해발고도가 높은 편이라 유럽인들이 거주하기에는 온화한 기후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사자 같은 맹수들이 많고 현지 원주민인 마사이족 등이 유대인들의 이주를 반길 것인가에 대해 대표들은 의구심을 가졌다.

결국 내부 논의를 거쳐 1905년 시오니즘 총회는 이 제안을 정중하게 거절하기로 최종 결정했다. 그러나 헤르츨에게 체임벌린을 소개시켜주면서 우간다 계획 떡밥을 연 이즈레일 장윌 같은 인물들은 '유대인 국가 세우는 게 중요하지, 그 나라의 위치가 꼭 팔레스타인일 필요는 없다'고 격하게 반발하면서 아시아아프리카 어디든 적당한 곳에 유대인 국가를 세우자고 주장하며 '유대 영토주의 협회'를 조직하고 세계 각지에 유대인 국가 수립을 모색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때는 윈스턴 처칠홀로코스트를 피해 망명한 유대인들의 피난처로 영국령 우간다를 다시 제시했지만 시오니즘 총회는 "팔레스타인 유대인 이주 제한 철폐가 중하지 우간다가 대수냐!"라면서 거부했다.

3. 실현되었다면?

이스라엘아프리카에 존재했을 것이다. 현재의 이스라엘보다 더 크고 강력한 국가가 되었을 가능성과 반대로 국제사회의 무관심 속에 현지인들과 싸우면서 현재의 이스라엘보다 더 상황이 나빠졌을 거라는 관측이 엇갈린다.

우선 낙관론으로는 유대 자본의 적극적인 지원과 미국의 원조 하에 우간다에 만들어진 유대인 국가가 현대 무기를 갖추고 소수의 인력으로도 다수의 아프리카인들과 맞설 수 있는 역량을 갖추면서 아프리카 지역의 중심부로 급부상했을 것으로 평가한다. 또한 아프리카 지역에 터전을 잡은 신생 유대인 국가가 아프리카 내부 분쟁에 개입하는 등 대륙의 경찰 역할을 했을 가능성도 제기한다. 즉, 현재 이스라엘보다 더 강력히 주변부에 수시로 기계화된 군대를 파병하여 질서를 잡았으리라는 것이다.

반대로 비관론으로는 서방의 무관심 속에 유대인들이 우간다 지역에서 제대로 된 지배 체제를 확립하지 못하거나 또는, 무력으로 주변국을 평정한 막장 패권국가가 되었으리라는 것이다. 중동과 달리 아프리카 국가들의 무장 수준이 형편없기에 유대인의 지배 체제는 일단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물론 아프리카에 세워진 유대인 국가의 경우에는 국민소득이야 주변국들에 비할 바가 아니겠지만, 현재의 이스라엘처럼 외부 원조를 적극 받지도 못하고 그저 아파르트헤이트 시기의 남아프리카 공화국이나 백인 정권 당시의 로디지아 수준의 국가를 유지하면서 불안정한 지위에 놓였으리라는 주장이다.

이스라엘 건국 시점만 해도 무관심 하던 미국이 지원을 시작한 이유는 소련이 중동전쟁에서 아랍 국가들을 지원했기에 반대급부로 이스라엘을 지원한 것이다.[3] 이스라엘이 우간다에 있었다면 이전처럼 미국의 지원을 받을지 여부는 불확실하다.

이 계획이 실현되었다면 아프리카 대륙 내부의 국제관계는 자연스럽게 아프리카에 건국된 유대인 국가에 가까운 지역을 중심으로 부유한 지역과 빈곤한 지역이 갈리는 형태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고, 아니면 로디지아에서 벌어진 것과 같은 지배층 이주민과 피지배층 토착민 간 내란이 발발했을 수도 있다.

4. 비슷한 계획들

묘하게도 이 계획은 나치 독일에게도 영감을 줬는지 유대인들을 마다가스카르 섬으로 옮기는 계획이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추진되었지만, 강력한 영국 해군의 포위망을 뚫고 마다가스카르 섬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서 계획은 폐기되었다.

기묘하게도 일본 제국도 유대인들을 만주로 이주시키는 이른바 '복어계획'이란 것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부유한 유대인들을 만주로 이주시켜 만주 개발을 촉진시키려던 것이 이 계획의 원래 목표였다. 그러나 부유한 유대인은 안 오고 빈곤한 유대인들만[4] 이주해오는 바람에 역시 실패로 돌아갔다.

시나이 반도 역시 유대인 국가 건설지역으로서 제안된 적이 있었으나 이집트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물론 이스라엘이 세워진 이후 여러차례의 중동전쟁으로 이스라엘의 침략을 받거나 시나이 반도가 이스라엘의 영토가 된 적도 있었다. 하지만 1982년 이집트와 이스라엘이 관계 개선을 하면서 시나이 반도는 이집트에게 돌려주었고 대다수의 유대인 정착촌들도 폐지되었다.

1차 대전 중이던 1917년에는 자신을 러시아 유대인 출신 의사라 밝힌 로트슈테인이라는 사람이 영국 측에 유대인들이 영국군과 함께 오스만에 맞서 싸우는 대가로 걸프 연안의 알-하사에 유대인 국가를 세우게 보장해줄 것을 제안했는데,[5] 이렇게 되었다면 아라비아 지역에 이스라엘이 세워졌을 것이다. 이미 해당 지역은 사우드 가문의 사우디아라비아에 수중에 들어간 상황에서 다른 걸프 아랍인 세력들과 협상한 것도 있기에 거절했다. 그로부터 얼마 뒤, 영국 외무장관 아서 밸푸어는 팔레스타인 유대인국가 건설의 지지의사를 밝힌다.

소련에서는 스탈린에 의해 유대인 자치주가 만들어졌다. 한때 유대인 인구가 3만에 이르렀지만 전통적인 인구밀집지역인 유럽 러시아우크라이나와는 지나치게 멀리 떨어져있었고, 기후조건도 영 좋지 않아 지역개발에 난항을 격었고, 스탈린 사후에 대부분 유대인들이 빠져나갔다. 현재는 거의 러시아인들만 살고있고, 유대인은 인구의 1%에 불과해서 말로만 유대인 자치주가 되었기 때문에 러시아 내에서도 존재의의가 없다며 유대인 자치주를 폐지하자는 목소리가 많다. 그래도 해당지역에서는 지역발전과 개발을 위해서라도 유대인 이주를 독려하기는 하지만 유대인이라도 러시아에 살거면 모스크바나 샹트페테르부르크같은 인프라가 발전되거나 소치같은 따듯한 지역에서 사는것을 원하지 암만 평화롭다고는 해봐야 변변한 천연자원도 없고 춥기는 추운 변방 한적한 동네로 가서 정착할 사람은 별로 없기 때문에 난항이 많다.

미국에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세웠던 '알래스카 유대인 정착촌 계획'이 있었는데 실제로 루스벨트 대통령은 2차대전 당시 나치에게 핍박받던 유대인들을 위해 알래스카에 유대인 정착촌을 건설하는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은 미 의회 상임위원회에까지 올라갔으나 결국 부결되었다.[6]

위의 계획들 대다수가 열강의 주도 하 유대인 국가를 수립시키려는 계획이었고, 시오니즘 총회에서나 유대인들도 자체적으로 꾸준한 논의를 했다. 제안된 방안으로는 키프로스, 시나이 반도, 아라비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브루나이 등지에 유대인 국가를 세우자는 계획이 있었다.

5. 매체

꽤나 흥미로운 대체역사물의 소재가 될 것 같지만 본격적으로 다룬 대체역사물은 아직 없다.

6. 같이 보기



[1] 일명 '우간다 계획'이라고 이름이 붙여진 것과 달리 정작 해당 지역은 우간다가 아니라 케냐에 있다. 물론 해당 지역이 우간다 보호령에서 케냐로 이관된 지 얼마 안 되었을 시점이었다.[2] 1880년대 약 4,000여 명이던 남아공 유대인 인구는 이에 힘입어 1920년대 4만여 명으로 증가하기 이른다. 남아공으로 이주한 유대인 절대다수가 리투아니아에서 영국으로, 다시 영국에서 남아공으로 이민한 케이스였다.[3] 물론 이러한 냉전 구도는 중동뿐만 아니라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심지어는 중남미에서도 이뤄졌지만, 미국의 안보 측면에서 미국의 핵심 이익 대비 가장 취약한 지역이 중동이었다. 유럽은 NATO가 존재하니 중요하긴 해도 자체적인 방어력을 어느 정도 갖고 있지만, 중동은 핵심 산유지이며 세계 무역의 젖줄인 수에즈 운하까지 있음에도 여기서 유의미한 미국의 동맹국은 이스라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튀르키예나 팔라비 왕조의 이란, 쿠웨이트, 요르단을 꼽을 수도 있겠지만 거리가 멀거나 국력이 한정적이며, 무엇보다 같은 이슬람권이므로 일정 수준 이상의 개입에 대해서는 큰 거부감을 나타내는 경향이 강하다.[4] 대체로 일본 제국으로 이주한 유대인들은 백군을 따라온 러시아계 유대인들이 대다수였는데, 이들은 부유한 편이 아니라 빈농 유대인들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5] 유대인들의 고향이 메소포타미아 남부인 칼데아 지역이며, 걸프 해 연안과 가까운 곳이기도 했다. 에덴동산의 위치가 그쪽 근방이라는 설도 있다.[6] 이 계획에 영감을 받아 집필된 대체역사소설이 마이클 셰이본의 유대인 경찰연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