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30 15:20:52

앙투안 드 샤반

파일:앙투안 드 샤반.jpg
성명 앙투안 드 샤반
Antoine de Chabannes
생몰년도 1408년 ~ 1488년 12월 25일
출생지 프랑스 왕국 생텍쥐페리 레 로슈
사망지 프랑스 왕국 파리
아버지 로베르 드 샤반
어머니 할릭스 드 보르트
형제 에티엔, 자크 1세
아내 마르그리트 드 넝뙤이
자녀 장 드 샤반
직위 담마르탱 백작, 프랑스의 그랜드마스터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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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의 귀족, 장군. 백년전쟁 시기에 잉글랜드군에 맞섰으며, 샤를 7세, 루이 11세, 샤를 8세 3대에 걸쳐 프랑스군에 복무했다.

2. 생애

1408년경 프랑스 왕국 생텍쥐페리 레 로슈에서 샤를뤼 르 파이유 영주인 로베르 드 샤반과 피에르피트 성의 여주인인 할릭스 드 보르트의 세 아들 중 막내로 출생했다. 1415년 아쟁쿠르 전투에 참가했다가 전사한 로베르는 유언장에 장남 에티엔 드 샤반에게 전 재산을 물려주기로 했으며, 에티엔이 상속인 없이 죽을 경우 둘째 아들인 자크 1세에게 재산을 넘긴다고 밝혔다. 에티엔은 1423년 크라방 전투에서 후손을 남기지 못한 채 사망했고, 자크가 샤반 가문의 재산을 물려받았다. 이후 샤반 가문의 재산은 자크의 후손들에게 대대로 물려받았지만, 앙투안은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7살 때 방타두르 자작의 시종이 되었고, 13살 때 용병대장 라 이르의 종자가 되었다. 15살 때 크라방 전투에 두 형과 함께 참전했고, 1424년 라 이르, 장 포통 드 생트라유와 함께 베르뇌유 전투에 참전했다. 그는 이 전투에서 생포되었지만, 베드퍼드 공작 존은 그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몸값을 받지 않고 풀어줬다. 이후 부르봉 공작 샤를 1세의 군대에 들어갔고, 1428년 오를레앙 공방전이 벌어졌을 때 보셰롱을 급습했지만 잉글랜드군에게 잡힌 뒤 위르푸아의 샤토 드 두르당에 감금되었다가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났다.

1429년 잔 다르크의 군대에 가담해 오를레앙 공방전의 승리에 견인했으며, 이후 루아르 원정, 파테 전투, 랭스 행진에 참여했고, 1429년 7월 17일 샤를 7세대관식에 참여했다. 1429년 여름 트루아의 집행관으로 임명되었고, 1430년 5월 잔이 포로가 된 콩피에뉴 공방전에 참여했다. 1432년 크레유의 수비대장으로 임명되었다. 1434년 보몽 쉬르 우아즈 인근에서 존 탈보트의 잉글랜드군을 기습 공격해 타격을 입혔지만 그 과정에서 중상을 입고 몇 달간 요양 생활을 했다. 1436년 2차 파리 공방전에 참여한 뒤 샤를 7세의 파리 입성식에 함께 했다.

이후 프랑스 정규군을 떠난 앙투안은 자유 용병대에 가담해 그들의 지도자 중 한 명이 되어 용병대를 이끌고 부르고뉴, 샹파뉴, 로렌 일대를 돌아다니며 심각한 약탈을 자행했다. 1438년 부르봉 공작 샤를 1세의 용병으로 고용되어 샤브로슈의 수비 대장이 되었으며, 1439년 프랑스 무관장 아르튀르 드 리슈몽에게 고용되어 모 공방전에 참여했다. 또한 1438~1439년 용병대장 앙트안 드 보데몽에게 고용되어 앙주의 르네와의 전쟁에서 활약했다.

1439년 9월 8일, 파리 총독이자 잔 다르크와 함께 싸운 기사였던 앙브루아즈 드 로레의 주재 하에 아시의 영주 르노 드 넝뙤이와 마르탱 여백작 마리 드 페이엘의 외동딸인 마르그리트 드 넝뙤이와 결혼했다. 이로써 그는 아내가 소유하고 있던 담마르탱 성의 주인이 되었고, 담마르탱 백작 칭호를 획득했다. 이후 용병 생활을 청산한 그는 형제 자크 드 샤반이 일부 영주권을 소유한 부르봉 지방을 관리하던 부르봉 공작 샤를 1세와 교류했고, 1440년 7월 22일 부르봉 공작에게 10,000 크라운을 빌려주는 대가로 차베로슈 땅을 동일한 수입을 얻을 때까지 가지는 계약을 체결했다. 같은 해 형제 자크 역시 부르봉 공작령에 속한 샹텔의 성주가 되었다.

1440년 샤를 7세에 맞서는 프라그리에 반란 세력에 가담했다가 프랑스 무관장 아르튀르 드 리슈몽이 토벌대를 이끌고 오자 귀순한 뒤 왕의 사면을 받았다. 1442~1443년 디에프 공방전에 참여했으며, 1444년 스위스 칸톤의 반란을 진압하려는 오스트리아 공작 지기스문트의 원정을 지원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또한 1444년 왕의 중장에 선임되었고, 1445년과 1447년에 그랑 파네티에(Grand Panetier)에 선임되었다. 1445년 샤를 7세에게 불복종한 아르마냐크 백작 장 5세 다르마냐크를 정벌하는 임무를 수행했으며, 1451년 프랑스 대의회에 출석해 횡령 혐의로 기소된 프랑스 은행가 자크 쾨르에게 유죄를 평결하는 데 힘을 보탠 뒤, 공적을 인정받아 라 푸이시에 상당 부분과 샤토 드 생파르조를 수여받았다.

1446년 9월, 앙투안은 루이가 샤를 7세에게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걸 샤를 7세에게 알렸다. 이 때문에 루이 왕자는 도피네로 축출되었다. 1456년, 샤를 7세는 아들 루이가 도피네에서 자신에게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앙투안에게 아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앙투안은 그르노블로 진격해, 루이가 그곳에서 도망쳐서 부르고뉴 공작 선량공 필리프의 보호를 받도록 강요했다. 이 일로 앙심을 품은 루이 왕자는 "나를 내 집에서 쫓아낸 사람들에게 복수하겠다"고 맹세했다. 1458년 프랑스와 부르고뉴 공국-사보이아 공국 연합 간의 전쟁을 회피하기 위해 파견된 사절단의 일원으로 발탁되어, 양자간의 전쟁이 벌어지지 않도록 했다.

1461년 7월 샤를 7세가 사망한 뒤 루이 왕자가 프랑스의 새 국왕 루이 11세로 등극했다. 그에게 앙심을 품고 있었던 루이 11세는 그의 재산을 압류하고 국외로 추방했다. 1462년 8월, 앙투안은 신성 로마 제국에 있다가 프랑스로 몰래 들어왔다가 체포된 뒤 루브르 감옥에 투옥되었다. 1463년 8월 20일 파리 의회에 소환되어 청문회에 출석한 후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루이 11세는 형량을 다소 감경해 로도스 섬으로 영구 추방하게 했다. 그러다가 마음을 바꿔서 앙투안을 도로 잡아서 바스티유 감옥에 수감하게 했다. 한편, 루이 11세는 그로부터 몰수한 푸이사에 영지를 지난날 그 때문에 유죄 판결을 받아서 처벌받았던 자크 쾨르의 자식들에게 넘겼다.

1465년 3월 바스티유에서 탈출한 앙투안은 루이 11세에 맞서 반기를 든 공익 연맹에 가담했다. 이후 루이 11세와 공익 연맹 간에 콩플랑 협약이 체결되면서 내전이 종식되었는데, 협약에는 루이 11세가 앙투안 드 샤반에게 재산을 돌려준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후 루이 11세와 화해한 그는 1467년 2월 프랑스의 그랜드마스터로 선임되었고, 루이 11세는 1468년 8월에 1463년에 내렸던 그에 대한 유죄 판결을 취소했다. 이후 푸이사에 영지를 돌려받기 위해 자크 쾨르 가문을 상대로 소송을 걸었지만, 이 소송은 그가 사망한 직후인 1489년이 되어서야 최종 합의에 이르렀다.

1469년 8월 1일 생 미셸 기사단 최초의 기사 16명 중 한 명으로 지명되었으며, 1470년 잉글랜드와 내통했다는 혐의로 기소된 장 5세 다르마냐크를 공격해, 장 5세가 농성하고 있던 레크투르 성을 공략하고 장 5세가 바스크 지방의 푸엔테라비아 시에 피신하도록 강요했다. 1471~1472년 루이 11세가 용담공 샤를과 전쟁을 벌일 때 참전해 아미앵 마을을 점령한 뒤 용담공 샤를의 공세로부터 보베를 지켜내는 데 기여했다. 1474년 12월 담마르탱 성에서 왕과 왕실 인사들을 접대하는 영예를 누렸다. 1475년 8월 29일 백년전쟁의 공식적인 종식을 고하는 피퀴니 평화 협약에 서명했다. 1477년 1월 용담공 샤를이 부르고뉴 전쟁에서 전사하자, 루이 11세의 지시에 따라 부르고뉴국의 영지 중 하나인 플란데런을 침공했으며, 용담공 샤를의 외동딸 마리 드 부르고뉴와 결혼한 막시밀리안 1세로부터 케누아를 지켰다.

이후 고령의 나이를 이유로 군직에서 물러나 조용히 지내던 그는 1483년 10월 23일 새 프랑스 국왕 샤를 8세에 의해 세베라크의 대장 겸 총독으로 선임되었으며, 1484년 2월 투르에서 열린 삼부회에서 장 4세 드 리외, 루이 2세 드 라 트레무야유와 함께 샤를 8세의 오른쪽 자리에 앉았다. 1485년 프랑스 국왕 샤를 8세에 의해 파리의 총독으로 선임된 뒤 왕과 적극적으로 서신을 교환하며 통치와 관련된 귀중한 조언을 해줬다. 1488년 12월 25일 파리에서 사망했고, 담마르탱에 있는 성모 대성당에 묻혔다. 그의 외아들 장 드 샤반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담마르탱 백작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