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12-08 20:50:54

암브로조 스피놀라

<colbgcolor=#ACB8C4><colcolor=#000000> 스페인 대공
초대 로스 발바세스 후작
초대 세스토 공작
암브로조 스피놀라
Ambrogio Spinola
파일:Peter_Paul_Rubens_-_Portrait_of_Ambrogio_Spinola_(ca._1625,_National_Gallery_in_Prague).jpg
성명 암브로조 스피놀라
Ambrogio Spinola
출생 1569년
제노바 공화국 제노바
사망 1630년 9월 25일
만토바 공국 카스텔누오보 스크리비아
아버지 필리포 스피놀라
어머니 폴리세나 그리말디
형제 페데리코, 렐리아
배우자 조반나 바치아돈네, 마리 드 로렌오말레
자녀 필리포, 폴리세나, 아구스티노
직위 스페인 육군 장성, 밀라노 공국 총독, 스페인 대공, 초대 로스 발바세스 후작, 초대 세스토 공작, 산티아고 기사단의 기사, 황금양모 기사단의 기사.
1. 개요2. 생애
2.1. 초년기2.2. 오스텐트 공방전2.3. 1605-1606년 스피놀라의 원정2.4. 네덜란드와의 평화 협상 중재2.5. 휴전기2.6. 30년 전쟁과 네덜란드 공화국과의 전쟁 재개2.7. 브레다 공방전2.8. 말년
3. 가족

1. 개요

제노바 출신 스페인 제국의 육군 장성. 영국-스페인 전쟁, 네덜란드 독립 전쟁, 30년 전쟁에서 맹활약한 인물로, 17세기 스페인 제국 최고의 장군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명장이다.

2. 생애

2.1. 초년기

1569년경 제노바에서 세스토와 베나프로의 후작인 필리포 스피놀라와 살레르노 공 니콜로 그리말디의 딸 폴리세나 그리말디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동생으로 페데리코 스피놀라가 있었고, 누이 렐리아 스피놀라는 벨몬테 공가의 후손인 제2대 갈라토네 후작 굴리오 카사르 스콰르치아피코와 결혼했다. 스피놀라 가문은 제노바에서 무역과 은행업으로 막대한 돈을 쌓고 정계에 오랫동안 영향력을 행사한 강력한 귀족 집안이었다.

동생 페데리코가 플란데런으로 가서 스페인 해군 제독으로 활약하는 동안, 암브로조는 스피놀라 가문의 재산 대부분을 상속받은 뒤 제노바 공화국의 권력을 놓고 도리아 가문과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그러나 조부의 궁전 상속을 놓고 벌인 법정 싸움에서 도리아 가문에게 패배하면서 제노바에서의 입지가 약화하자, 그는 제노바에선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여기고 그곳을 떠나 스페인 군주를 위해 일하면서 가문의 운명을 개선하기로 했다. 그는 자비로 용병 1,000명을 모집한 뒤 동생과 합류하러 떠났다.

그러나 1603년 5월 26일, 동생 페데리코 스피놀라가 슬로이스 해전에서 슬로이스 항구를 봉쇄한 네덜란드 함대와 교전했다가 전사했다. 그 후 암브로조는 마드리드로 가서 국왕 펠리페 3세를 알현한 후 2년째 질질 끌고 있던 오스텐트 공방전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오스텐트에서 왕실군 최고 지휘권을 얻는 조건으로 군자금을 지원하겠다고 제안했다. 또한 그는 이탈리아 장교 몇 명을 보내 포위 공격의 성공 가능성을 조사하게 했다.

2.2. 오스텐트 공방전

1603년 10월, 펠리페 3세와 스피놀라는 합의에 도달했다. 당시 오스텐트 공방전을 진두지휘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던 스페인령 네덜란드 총독 알브레히트 7세는 오스텐트 공방전 지휘권을 내려놓았고, 스피놀라는 오스텐트 방면군 최고 지휘권을 얻었다. 스피놀라는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즉시 군대를 개편했다. 그는 장교를 교체하고, 미지급 임금을 지급하고, 병사들의 실태를 조사했다. 조사 결과, 현재 급료를 받기로 한 병사보다 3천 명 이상 적은 병사가 복무 중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또한 스피놀라는 군대에 속한 여러 국가 연대에 각기 다른 위치에서 토목 공사를 벌이는 등 자체적으로 임무를 수행하도록 했다. 이 때문에 연대 간의 경쟁이 심화하고 효율성이 향상되었으며, 군대의 기강이 바로잡히고 병사들의 사기도 상승했다.

1604년 1월, 스피놀라는 공격을 재개하기로 했다. 그는 게울레강과 웨스트헤이븐 강어귀에 포대를 설치하여 적의 보급을 완전히 차단하기로 했다. 또한 그는 해자 아래에 터널을 파고, 화약을 사용하여 성벽을 폭파하기로 했다. 이후 벌어진 공성전에서, 서쪽 반 경사면의 요새는 맹렬한 포격을 받고 점점 파괴되었고, 스페인군은 3월까지 반 경사면 전체를 접수했다. 한 달 후, 폴더 요새 인근 라벨린이 왈롱인에게, 서트라벨린은 이탈리아인에게 점령되었다. 이리하여 스페인군이 오스텐트 요새의 주요 성벽을 직접 공격할 길이 열렸다.

1604년 4월, 네덜란드 공화국스타트허우더 마우리츠가 이끄는 네덜란드-잉글랜드 연합군이 함대를 이끌고 출격해 오스텐트와 슬로이스 사이의 해안가에 상륙했다. 이에 스피놀라는 군대 일부를 보내 마우리츠를 견제하게 했다. 이후 마우리츠는 슬로이스 공략 쪽으로 눈길을 돌렸고(2차 슬로이스 공방전), 스피놀라는 오스텐트에 대한 공격을 계속했다. 5월 28일, 스피놀라는 포르츠에스픽 요새를 점령했다. 6월 말에는 폴더볼베르크, 베스트볼베르크, 헬몬트 요새도 점령하면서 서쪽 요새 전체를 수중에 넣었다. 그 과정에서 수비대 1,200명이 전사했다. 다음 목표는 북쪽의 구시가지였다. 이때 슬로이스에서 구원 요청이 전해지자, 스피놀라는 마지못해 군대를 모아 구원하려 했지만, 마우리츠가 견고한 포위망을 구축했기에 구원하지 못했다. 8월 20일, 슬로이스 수비대가 항복하면서, 네덜란드는 오스텐트 외에 또 다른 플란데런 내 항구 도시를 확보했다.

슬로이스 함락 며칠 후인 1604년 8월 28일, 잉글랜드와 스페인은 런던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당시 잉글랜드 국왕 제임스 1세는 선왕 엘리자베스 1세가 벌인 영국-스페인 전쟁을 더 이상 이어가고 싶지 않아서 이 조약을 강행했다. 이렇게 조약이 성립된 후, 잉글랜드군은 네덜란드 공화국과 오스텐트에서 철수했다. 이후 스피놀라는 오스텐트로 돌아온 뒤 공세를 재개하면서, 적군이 슬로이스에서 오스텐트로 공격할 것을 대비해 슬로이스와 오스텐트 사이에 일부 병력을 배치했다.

1604년 9월 13일, 잔딜 보루가 함락되었다. 이후 구시가지 주변의 다른 보루들이 하나둘씩 함락되었다. 9월 중순, 주 성벽보다 약한 첫 번째 차단벽이 함락되었고, 9월 19일 구시가지가 마침내 스피놀라의 수중에 들어왔다. 이제는 뉴 트로이만 남았다. 상황이 돌이킬 수 없다는 걸 깨달은 오스텐트의 마지막 총독 다니엘 드 에르타잉은 네덜란드 정부에 항복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했고, 네덜란드 의회는 수락했다. 에르타잉은 9월 20일부터 스피놀라와 항복 협상을 벌였고, 스피놀라는 관대한 조건으로 항복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9월 22일, 스페인군은 오스텐트에 입성했다.

이리하여 3년째 질질 끌며 막대한 인명 피해와 군사 비용을 소모하던 오스텐트 공방전을 승리로 이끈 스피놀라는 노고를 인정받아 1605년 스페인 국왕 펠리페 3세에 의해 황금 양모 기사단의 일원으로 발탁되었고, 네덜란드령 스페인 총독 알브레히트 7세의 칭찬을 받았다. 그 후 스피놀라는 스페인으로 가서 당시 바야돌리드에 있던 국왕과 알현했고, 국왕은 그에게 플란데런 방면 스페인군 총사령관에 선임했다. 이후 플란데런으로 돌아온 스피놀라는 오스텐트 공방전을 치르면서 막대한 인력과 비용을 소모한 군대를 재편성하고자 유럽 각지에서 용병들을 모집했고, 그 과정에서 막대한 사비를 사용했다.

2.3. 1605-1606년 스피놀라의 원정

1605년 7월 6일, 스피놀라는 1만 5천여 병력을 이끌고 오스텐트에서 출발해 카이저스베르트 인근에서 라인 강을 건넜다. 그는 제2대 부코이 백작 샤를 보나방튀르 드 롱그빌의 지원받으며 독일 영토를 따라 북상하다가 네덜란드 동부 오버레이설의 올덴잘을 향해 진군했다. 8월 8일 올덴잘에 도착한 그는 곧바로 참호를 판 뒤 다음 날 포격을 퍼부었고, 올덴잘 수비대는 그 날로 항복했다. 그 후 링겐으로 진군한 스피놀라는 8월 10일 500~1,000명의 수비대가 버티던 링겐을 포위 공격했다. 링겐 수비대는 마우리츠가 구원하러 올 거라고 여기고 버텼지만, 9일이 지나도록 구원이 오지 않고, 스피놀라가 당장 항복하지 않으면 도시를 함락한 뒤 약탈을 벌이겠다고 협박하자 결국 항복했다.

1605년 가을, 스피놀라는 뒤스부르크와 루를로르트 사이의 루르 지역에 군대를 주둔했다. 이후 스페인군 4,000명이 뮐하임 안 데어 루르와 브로이히 성으로 진군해 그곳을 점령했다. 당시 베젤 근처에 주둔했던 마우리츠는 이 소식을 접하자, 4,000 병사를 이끌고 몰래 진군해 10월 9일 뮐하임에 주둔하던 스페인군을 기습 공격했다. 그러나 스피놀라가 제때 대응해 맞받아친 데다, 마우리츠의 이복동생인 프레데릭 헨드릭의 전술적 실책으로 위험에 처하자, 마우리츠는 프레데릭을 구조한 뒤 퇴각했다.

묄하임 전투에서 승리한 스피놀라는 쿠보르덴으로 눈을 돌렸지만, 그곳의 방어가 견고하자 포기하고, 대신 와흐텐동크 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부쿠이 백작에게 6,000 병력을 맡겨 그곳을 공략하게 했다. 부쿠이 백작은 7일 안에 운하와 참호를 파냈고, 날씨가 좋은 걸 이용해 도시를 몇 차례 습격했다. 이윽고 스페인군이 장기 주둔할 요새까지 세워지면서 버틸 수 없게 되자, 와흐텐동크 수비대는 10월 27일 항복을 위한 협상을 시작했고, 다음 날 항복했다. 스피놀라는 뒤이어 부코이 백작은 크레펠트 인근의 크라카우 성으로 보냈다. 11월 8일 포위 공격을 시작한 스페인군은 적군이 일찌감치 저항을 포기하고 항복하면서 손쉽게 승리했다.

한편, 기예르모 베르두고가 이끄는 스페인 분견대가 자기들을 네덜란드 공화국군이라고 속이고 브레드부르트에 입성한 뒤 도시를 약탈했다. 이에 주변 도시에서 병력이 급히 차출되어 브레데부르트로 보내, 스페인군이 도시 내에서 세력을 강화하는 것을 막았다. 스피놀라는 루르로르트에서 브레데부르트에 고립된 스페인군을 지원하려 했지만, 네덜란드군이 이미 경고한 포위망을 구축했기에 구원할 엄두를 못 내고 물러났고, 결국 베르두고는 식량난에 직면하자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여 항복했다.

1605년 전역 이후, 스피놀라는 다음 해의 전역을 계획하기 위해 바야돌리드의 궁정으로 돌아갔다. 1606년, 그는 펠리페 3세로부터 알브레히트 7세나 그의 아내이자 펠리페 3세의 누이인 이사벨 클라라 에우헤니아가 사망할 경우 그가 플란데런의 지배권을 유지하라는 비밀 지령을 받았다. 이후 플란데런으로 돌아가던 그는 먼저 가족과 사업을 돌보기 위해 제노바에 들렀고, 새로운 원정을 벌이기 위해 80만 에스쿠도를 대출받았다. 도중에 심각한 질병에 걸렸고, 그가 죽었다는 소문이 파다했지만, 며칠 만에 회복한 뒤 플란데런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80만 에스쿠도가 이미 사용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고, 군사 작전을 시작하기 위해 225만 에스쿠도를 또다시 대출해야 했다.

스피놀라는 군대를 2개로 나눠서 한 부대는 자신이 직접 아이젤 강을 건너고, 다른 부대는 부코이 백작의 지휘하에 발 강을 건너 네덜란드로 진군하기로 했다. 그러나 부코이 백작은 악천후로 인해 발 강을 건너지 못했고, 스피놀라도 반대편 강둑에 적군이 있어서 강을 건너는 데 애를 먹었다. 이에 스피놀라는 계획을 바꿔서 1597년 2차 흐룬로 공방전으로 네덜란드 공화국에 빼앗겼던 흐룬로를 탈환하기로 했다.

1606년 8월 3일, 스피놀라는 흐룬로를 포위했다. 그는 며칠간의 총격전 끝에 8월 10일 도시의 두 개의 라벨린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 과정에서 장교 12명을 포함한 6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러던 중 마우리츠가 흐룬로 수비대에게 사흘만 더 버티면 지원군을 이끌고 그들을 구해주겠다고 약속한 서신이 도중에 가로채어 스피놀라에게 전해졌다. 이에 스피놀라는 구원군이 오기 전에 총력을 다해 공세를 퍼붓기로 했다. 스페인군은 3차례나 격퇴되었지만, 네 번째 공격을 퍼부은 끝에 8월 14일 도시 함락을 목전에 두었다.

스피놀라는 병력을 집결하면서, 흐룬로 주민들에게 항복하지 않으면 모든 주민을 죽이고 도시를 완전히 파괴하겠다고 협박했고, 주민들은 도시 수비대장 디에데릭 반 도르트에게 달려가 제발 항복해 달라고 애원했고, 반 도르트는 마지못해 스피놀라에게 도시를 넘기기로 했다. 스피놀라는 마우리츠가 도착하기 전에 도시를 점령하려고 서둘렀던 탓에 거의 1,000명의 병사를 잃었다. 그렇게 흐룬로를 접수한 뒤, 스피놀라는 부코이 백작에게 전략적 요충지인 라인베르크를 공략하라고 지시했다. 8월 24일, 스페인군이 라인베르크 앞에 도착하여 도시를 포위하고 참호를 팠다. 마우리츠는 라인베르크를 탈환하려고 시도했지만, 스피놀라가 부코이 백작을 돕기 위해 설치한 요새가 너무 강력해서 감히 접근할 수 없었다. 수비대는 악착같이 저항했지만, 10월 1일 굶주림에 시달린 끝에 항복했다.

1606년 10월 초, 스페인군이 급료 미지급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이 브레다로 가서 네덜란드군과 합류하려 하자, 스피놀라는 서둘러 이들을 저지하러 진군했다. 스피놀라가 반란 수습에 분주한 틈을 타, 마우리츠는 흐룬로를 탈환하기 위해 공세를 개시해 10월 30일부터 포위 공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스페인 수비대 2,000명은 맹렬히 저항했고, 스피놀라는 반란을 진압한 뒤 흐룬로를 구원하러 출진했다. 이 소식을 접한 마우리츠는 흐룬로 수비대와 스피놀라의 구원군 모두를 대적하기엔 곤란하다고 여기고 11월 9일 철수했다.

스피놀라는 올덴잘, 링겐, 흐룬로, 그리고 라인베르크를 접수하면서 네덜란드 공화국의 동부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약화했다. 마우리츠는 스피놀라를 상대로 연이어 패하면서 장군으로서의 명성이 추락했고, 앙리 4세는 네덜란드 의회에 대사를 통해 네덜란드군이 스피놀라의 군대보다 2배나 많은데도 오랫동안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아 스피놀라가 그 지역에서 중요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고 비판했다. 심지어 공화국에 빌려준 돈을 국경 방어에 쓰지 않은 것을 몹시 후회한다고 비난했다. 이에 대해 마우리츠는 자신의 군대는 추위와 질병으로 너무 약해져 적과 정면 대결하기엔 무리이며, 나중에 절호의 기회가 올 테니 조금만 더 인내해 달라고 호소했다.

2.4. 네덜란드와의 평화 협상 중재

스피놀라는 일련의 원정에서 큰 성과를 거두면서 전 유럽에 훌륭한 장군으로서 명성을 떨쳤다. 하지만 스페인은 재정난으로 파산을 선언해 네덜란드를 향한 공세를 더 이상 벌일 여력이 없었다. 마우리츠는 이를 틈타 도시 몇 곳을 탈환했으며, 네덜란드 해군은 대서양을 종횡무진하며 스페인 해군에 큰 타격을 입혔다. 이에 스피놀라는 1606년 말부터 장기간의 협상을 벌여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는 매달 약 30만 에스쿠도에 달하는 자금을 조달하지 못한다면 원정을 단행하는 건 고사하고 군대를 유지할 수도 없다며, 네덜란드와 화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스페인령 네덜란드 총독 알브레히트 7세도 평화 조약 체결에 적극적으로 찬성했다.

네덜란드와의 첫 번째 협정은 1607년 3월에 체결되었다. 양측은 지배하는 영토를 유지하고, 8개월 동안 전투를 중단하며, 양측 대표단 간의 협상을 이어가기로 했다. 스피놀라는 스페인 대표단에 포함되어 헤이그로 직접 갔고, 1609년까지 그곳에 쭉 지내면서 네덜란드 대표단과 협상을 이어갔다. 그 결과 1609년 12년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그는 휴전 후에도 직위를 유지하면서 프랑스와의 협상을 지휘하는 등 여러 임무를 맡았다. 콩데 공이 아내 샤를로트 마르그리트 드 몽모랑시와 함께 플란데런으로 도피했을 때, 그는 프랑스 국왕 앙리 4세에게 콩데 공 거취 문제와 관련한 협상을 주도했다.

2.5. 휴전기

스피놀라는 자기가 이토록 큰 공적을 세운 만큼 스페인 대공에 선임될 거라고 기대했지만, 스페인 궁정은 외국인인 그에게 대공 작위를 순순히 주지 않았고, 은행가들이 스페인 왕실에 자금을 제공하기 전에 전쟁 수행을 보장하기 위해 전 재산을 담보로 제공해야 했다. 그는 이 돈을 갚지 못해 결국 파산했고, 스페인 정부는 그를 스페인에서 떼놓으려 했다. 그러다가 1611년 3월 왕의 허락을 받아 제노바로 여행을 떠났고, 그곳에서 빚을 변제받는 데 성공한 뒤 마드리드로 가서 펠리페 3세의 신임을 회복한 뒤 스페인 대공에 비로소 선임되었다. 또한 그는 영구 평화 협정에 서명하는 대가로 왕실 보호령에 복종하겠다는 네덜란드 공화국의 비밀 제안을 주제로 논의했는데, 네덜란드의 진의가 의심스러우니 섣불리 받아들이지 말라고 조언했다.

그 후 스피놀라는 프랑스로 가서 루이 13세와 그의 어머니이자 섭정 왕비인 마리 드 메디시스를 알현했으며, 뒤이어 프라하로 가서 신성 로마 제국의 새 황제로 등극한 마티아스에게 축하 인사를 건넸다. 이때 그는 브란데부르크와 노이부르크의 영주들이 클레베 공국에 대한 소유권을 놓고 다투는 걸 중재했다. 1614년, 그는 클레베와 율리히 공국의 상속과 관련된 분쟁에 참여했고, 이를 위해 브뤼셀과 베셀 사이에 있는 본부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 후 클레베 공국과 율리히 공국을 무력으로 접수하려는 펠리페 3세의 지시에 따라 스페인군을 지휘한 그는 베셀 공략전과 아헨 공략전을 이끌었고, 율리히 공국 대부분을 점령했다. 1615년 1월, 아내 조반나 비치아돈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깊은 슬픔에 빠져 수도원에 들어가 수년간 조용히 지냈다.

2.6. 30년 전쟁과 네덜란드 공화국과의 전쟁 재개

1618년 30년 전쟁이 발발한 후, 스피놀라는 1620년에 팔츠 선제후국을 노리는 스페인군의 공세를 지휘하여 라인팔츠 일부를 정복하고 대장 계급을 받았다. 그 후 네덜란드와의 휴전 협정이 만료될 때가 다가오자, 알브레히트 7세와 함께 휴전 기간을 연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미 독일에서의 군사 작전을 벌이는 와중에 네덜란드와 또다시 전쟁을 치르는 건 자금이 부족하다며, 네덜란드와 평화를 이어가는 게 현명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펠리페 3세는 스페인 제국의 영토였던 네덜란드를 완전히 정복하길 원했고, 후계자인 펠리페 4세도 아버지와 같은 의견을 공유했다.

1621년 4월, 스피놀라는 왕의 지시에 따라 네덜란드 칼뱅파 연합과 휴전 협정을 맺고 플란데런으로 이동했다. 그해 12월 7일, 그는 로스 발바세스 후작에 선임되었다. 이후 네덜란드와 휴전 기간이 만료되었지만, 그는 군인에게 줄 급료와 나머지 군사 비용을 보장할 자금을 마련하는 데 어려움을 겪어서, 네덜란드를 정면에서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 대신 1622년 클레베 공국에 군대를 파견했고, 율리히 공국을 완전히 정복했다. 이후 브뤼셀에서 평화 협상을 벌여서 네덜란드로 망명한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와 화해하려 했지만, 프리드리히 5세가 자기 영토를 짓밟은 침략자들과 조약을 맺을 수 없다며 이를 거부하면서 무산되었다.

그해 6월, 스피놀라는 다름슈타트 영지를 약탈하고 네덜란드 남부 노르트브라반트 주의 스틴베르겐을 포위 공격했지만, 네덜란드 해군이 바다를 통해 도시에 원조해 주고 스페인 진영에 정기적으로 포격을 가했기 때문에 쉽사리 공략하지 못했다. 네덜란드 의회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를 상대로 항전하던 만스펠트 백작 에른스트 폰 만스펠트와 브라운슈바이크 볼펜뷔텔의 크리스티안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이들이 스틴베르겐으로 이동하자, 스피놀라는 곤살로 페르난데스 데 코르도바에게 별동대를 맡겨 이들을 요격하게 했다. 그 결과 8월 22일 플뢰뤼스 전투가 벌어졌고, 만스펠트 백작과 크리스티안은 수천 명의 사상자를 내고 퇴각했다.

1622년 9월, 스피놀라는 스티베르겐을 공략하는 데 성공했다. 그 후 그는 베르헌옵좀 내 배신자가 "성문을 몰래 열어줄 테니 속히 이곳에 오라."라는 전갈을 보낸 것에 혹하여 루이스 데 벨라스코와 함께 베르헌옵좀 탈환 작전에 착수했지만, 마우리츠가 그의 의도를 간파하고 로버트 핸더슨 경이 지휘하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군 14개 중대, 그리고 플란데런, 왈롱, 프랑스군 11개 중대를 베르헌옵좀에 보내 강력한 방어를 펼치게 했기에 좀처럼 함락시키지 못했다. 그러다가 마우리츠가 에른스트 폰 만스펠트의 용병대와 연합하여 베르헌옵좀 근방에 이르자, 스피놀라와 벨라스코는 별수 없이 10월 2일에 포위를 풀고 물러났다. 마우리츠는 퇴각하는 스피놀라를 추격하지 않고 함선 400척을 이끌고 헐스트나 안트베르펜을 탈환하기 위해 진군했다. 그러나 악천후에 직면해 함대가 뿔불이 흩어지자, 원정을 취소했다. 스피놀라는 이때를 틈타 베르헌옵좀 공방전의 실패로 실추된 위신을 되찾기 위해 새로운 공세를 준비했다.

2.7. 브레다 공방전

1624년 7월 21일, 스피놀라는 브뤼셀에서 출발해 5일 후 길체 인근에 이르렀다. 그는 적을 혼란에 빠뜨리기 위해 군대를 세 부대로 나누었다. 스피놀라 본인은 보병과 함께 길체로 갔고, 기병대는 다른 길을 통해 살리자르 백작과 함께 길체로 이동했으며, 헨드릭 반덴베르흐는 별동대를 이끌고 네덜란드 공화국의 동부 영토로 이동했다. 군대는 차암, 바를러, 길체 마을 사이의 평원에 주둔했다.

네덜란드에서는 스피놀라의 스페인군이 브레다 인근에 접근하는 상황에 대한 걱정을 거의 하지 않았다. 브레다는 강력한 방어력을 갖췄고, 많은 병력이 주둔했기 때문이다. 베르헌옵좀 공방전에서 스피놀라를 막아낸 것 또한 이러한 과소평가에 일조했다. 게다가 스피놀라 본인도 베르헌옵좀을 다시 공격할지, 브레다를 공격할지, 그라브를 공격할지 정하지 못하고 오랫동안 진영에 머물며 부하들과 논의를 거듭했다. 그러다가 1624년 8월 24일, 스피놀라는 근방의 브레다를 목표로 삼기로 결심하고, 포위 공격에 착수했다.

스페인군은 브레다를 완전히 봉쇄하고 전략적 요충지에 진지를 설치했으며, 진지 사이에 참호를 건설해 누구도 몰래 도시를 드나들지 못하게 했다. 또한 8월 26일 보병 4,000명과 기병 1,000명을 기네켄으로 보내 그 지역을 점령하여 브레다를 압박하도록 했다. 또한 바글리오네 장군은 7,000보병과 다수 기병을 이끌고 테르헤이덴으로 이동했으며, 이중 상당수가 테르헤이덴 남쪽의 강 사구인 하르텔베르겐으로 파견되었다. 브레다 총독 유스티누스 반 나소는 이에 대응해 800명의 머스킷 병사를 하르텔베르겐으로 파견했지만, 이들은 포격과 기병 공격으로 쫓겨났다.

다음 날, 스피놀라는 병사 1만 명과 모든 기병대를 이끌고 기네켄으로 진격했다. 기네켄의 스페인군은 브레다 주변이나 필요시 보급로에 배치될 수 있는 예비 병력 역할을 했다. 스피놀라는 첫 며칠 동안 포위 작전에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병력을 배치하여 군영을 더 빨리 구축할 수 있었다. 기네켄, 테르헤이덴, 하르텔베르겐의 군영이 준비되자, 추가 병력은 다른 지역을 점령하고 군영을 구축하는 데 투입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8월 29일에는 기네켄에서 테테링겐으로 병력을 파견했고, 9월 1일과 6일에는 기네켄, 테테링겐, 테르헤이덴에서 하게 구역으로 병력을 파견했다. 군영은 마을이나 촌락 바로 외곽의 고지대에 세워졌고, 해자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병사들은 나무, 진흙, 갈대로 지은 오두막에 머물렀다. 또한, 모든 캠프에는 장교들을 위한 천막이 있었다.

스피놀라에게 있어 가장 어려운 문제는 플란데런에서 보내지는 전쟁 물자와 식량의 취약한 공급이었다. 물품을 실은 차량은 네덜란드 군대의 공격을 견뎌내기 위해 많은 수의 군인의 호위를 받으며 호송대를 이루어 이동해야 했다. 네덜란드군이 물품을 정기적으로 약탈한다면, 스페인군은 포위 공격을 포기해야 했다. 게다가 비가 오면 도로는 사실상 통행이 불가능해졌다. 식량과 기타 물품을 모아두는 주요 창고는 브라반트주의 리에르에 있었다. 보급품은 마차로 수송되어 시속 4~5km의 최고 속도로 안트베르펜까지 운송되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기네켄으로 이동했다.

이 경로는 1624년 10월 23일까지 유지되었지만, 그때 네덜란드군이 마테호른에서 호송대를 공격하기에 더 유리한 베르헌옵좀으로 이동했다. 이에 스피놀라는 네덜란드 진영에서 더 멀리 떨어진 리에르에서 라이케보르셀에서 하룻밤을 묵은 후 기네켄으로 가는 새로운 경로를 택하도록 했다. 그러나 스페인군은 공성전을 치르면서 굶주림에 시달렸다. 브레다의 항복 당시, 일반 예비군 사령관 콜로마는 브레다 수비대가 아군보다 상태가 더 양호하다고 지적했다. 영양실조는 이동 중에 발생한 물품 도난, 포위 공격 초기의 보급 체계 문제, 네덜란드군의 습격, 그리고 열악한 도로 사정 때문이었다.

9뤟 10일, 네덜란드 동부로 이동했던 마우리츠는 브레다가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군대를 이끌고 브레다로 이동했고, 9월 30일 스페인 방어선에서 북쪽으로 약 3~4km 떨어진 마데에 도착했다. 그는 그곳에서 어를 위해 진영 주변에 흙벽을 쌓았고, 거기서 스페인 포위선을 향해 접근 참호를 팠다. 당시 네덜란드군은 보병 25,000명과 기병 2,400명으로 구성되어 도시를 포위한 55,000명에 달하는 스페인군과 정면 대결하기엔 너무 적었기에, 마우리츠는 그곳에서 버티면서 스피놀라에게 압박을 가하기로 했다. 스피놀라는 네덜란드군이 언제라도 쳐들어올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마데 방면 스페인 방어선에 예비군을 보내 더욱 단단히 지키게 했다.

마우리츠는 상황을 살펴본 뒤 스페인군 보급선을 끊기로 했다. 이미 기병대를 종종 보내 스페인군 수송대를 공격하게 했지만, 완전히 차단하려면 안트베르펜을 함락해야 했다. 그는 처음에는 계략을 써서 안트베르펜을 점령하려고 했다. 1624년 10월 12일에서 13일 밤 동안 스페인 군인으로 변장하고 부르고뉴 십자가로 덮인 마차를 탄 네덜란드 병사들이 앤트워프로 출발했다. 그날 밤은 매우 어두웠고, 바람이 네덜란드군 방향으로 불어서 눈에 띄지 않게 성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성문을 부수려 하자, 스페인 경비병이 머스킷 총을 쏘고 성에 경보를 울렸다. 네덜란드군의 공격은 즉시 중단되었고, 병사들은 모든 도구와 배를 버려둔 채 도주했다. 이후 네덜란드군은 다시 안트베르펜을 기습 공격하려 했지만, 밤에 요새화된 도시에 접근했을 때 성벽 위에 횃불이 환하게 빛나는 걸 보고 발각되었다고 여기고 철수했다.

10월 22일, 마우리츠는 상당한 한파가 몰아치고 강의 수위가 상승하고 있으니 스페인군이 브레다를 공략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여기고, 마데에서 더 편안하고 안전한 장소인 로젠달로 철수했다. 그러나 스피놀라는 한파가 몰아치는 와중에도 브레다 포위를 풀기를 거부하고, 병든 병사들을 후방으로 돌리고 새 병력을 충당하는 동시에 식량 확보에 사력을 다하며 포위전을 꿋꿋이 이어갔다. 1624년 12월 초순, 수비대 지도부는 1625년 5월이 되면 식량이 바닥난다는 걸 파악하고, 방어선을 돌파하여 수송선들을 도시에 들이기로 했다. 12월 10일, 보름달이 뜨고 수위가 높아져 대형 선박으로 마르크 강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었다. 그러나 결국 바람의 방향이 좋지 않아 바닷물이 마르크 강으로 흘러가지 못해 공격이 취소되었다.

1625년 4월 23일, 마우리츠가 짧은 병환에 시달린 끝에 사망했다. 후임 사령관으로 부임한 이복형제인 프레데릭 헨드릭은 브레다를 해방하기 위한 마지막 시도하기로 했다. 40,000명의 보병과 6,000~7,000의 기병으로 구성된 대규모 병력이 헤르트루이덴베르크에 집결했다. 이에 스피놀라는 보급로와 테테링겐 구역에 예비군을 증강했다. 5월 2일, 네덜란드군은 분산되었다. 프레데릭 헨드릭은 본대를 이끌고 그라벤뫼르로 진군했고, 에른스트 폰 만스펠트는 조금 더 남쪽에 있는 동엔으로 향했다. 프레데릭 헨드릭은 스피놀라와 정면 대결을 원하지 않았고, 테르헤이덴 지역에 대한 신속한 기습 공격을 하기로 했다.

5월 15일, 네덜란드군이 테르헤이덴을 급습해, 폭탄을 사용하여 요새를 쉽게 점령했다. 이후 스페인 진영에 더 가까운 드럼 요새를 점령하기 위해 군대의 일부는 측면을 공격하고, 다른 일부는 정면을 공격했다. 드럼 주위를 포위하는 동안 루넷 보루도 점령했다. 스페인군은 노출된 측면으로 접근하는 네덜란드 군대를 보고 도망쳤다. 이후 드럼의 수비군은 후방에서 공격받았고, 그들 역시 도망쳤다. 구역 사령관인 로마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보고 이탈리아인 중대를 급파해 네덜란드군의 파상공세를 저지하게 했다. 당시 네덜란드군엔 공성용 사다리가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성벽 위로 기어 올라가야 했다. 성벽을 지키던 병사들은 성벽을 기어오르는 이들을 향해 파이크를 마구 휘둘렀다. 네덜란드군이 이 고난에도 불구하고 서서히 성벽에 올라서 수비대를 압도하려던 그때, 후방 부대 지휘관 바글리오네가 기병과 보병을 이끌고 수비대를 구원했다. 결국 공격은 중단되었고, 네덜란드군은 후퇴했다. 하지만 포위선이 거의 무너져서 네덜란드군이 브레다에 재보급할 수 있었기 때문에, 스피놀라는 포위선 반대편에서 또다시 공격이 시도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고 그곳의 방어선을 강화하라고 명령했다.

전선 기습 돌파 시도가 실패한 후, 프레데릭 헨드릭은 브레다를 구원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철수를 결심했다. 5월 24일, 그는 브레다 총독 유스티누스 반 나소에게 암호화된 서한을 두 부 보내, 적군이 너무 많고 포위망이 너무 강력하므로 가능한 한 가장 유리한 조건으로 항복하라고 지시했다. 또한 그는 일련의 신호등을 사용해 도시에 식량이 며칠 남았는지 알리도록 했다. 그날 밤, 횃불 11개가 켜졌다. 따라서 6월 5일까지 먹을 식량이 남아 있었다.

스피놀라는 적군이 주고받는 메시지를 가로채 해독했고, 도시의 식량 상황과 브레다에서 곧 항복 제안이 도착할 것임을 파악했다. 하지만 그는 제안이 오기를 마냥 기다리지 않기로 하고, 협상을 요청하는 전령을 보냈다. 유스티누스는 도시가 곧 해방될 거라고 믿는다는 내용의 전갈을 넘기고 전령을 돌려보냈고, 해독된 편지를 손에 쥐고 브레다로 찾아온 2번째 전령도 다시 돌려보냈다. 하지만 스피놀라는 포기하지 않고 세 번째 전령을 보냈고, 유스티누스는 부하들과 논의한 끝에 결국 항복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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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고 벨라스케스 작, <브레다의 항복>, 1634년 작.

1625년 6월 2일, 스피놀라와 유스티누스는 항복 조건에 서명했다. 스피놀라는 유스티누스를 무척 정중하게 대했고, 유스티누스가 제시한 모든 조건을 기꺼이 받아들였으며, 수비대가 무기와 깃발, 짐을 챙기고 원하는 곳으로 떠나는 걸 허락했다. 6월 5일 오전 9시경, 수비대는 깃발을 휘날리고 북을 치고 트럼펫을 울리며 무장한 채 헤르트루이덴베르크로 행진했다. 스피놀라는 도시에 입성한 뒤 약탈을 엄금하고 시민들의 안전을 보장했다. 다만 개신교 신자 상당수는 주변 마을이나 네덜란드 공화국으로 이주했다. 스피놀라는 이 공적으로 스페인 국왕 펠리페 4세에 의해 성 야고보 기사단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교황 우르바노 8세로부터 축하 서한을 받았다.

2.8. 말년

스페인 국무원은 브레다 공방전 중인 1625년 5월에 네덜란드 전선에서 다른 도시를 포위하지 않기로 했다. 스페인 관료들은 네덜란드 공화국이 많이 약해졌다는 걸 인지했지만, 포위전을 벌이는 데 큰 군대를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들었기에, 공세 대신 방어전을 선택했고, 군대를 크게 감축했다. 그 후 몇 년 동안 스페인의 재정 상황은 악화했지만, 공화국의 재정 상황은 새로운 소비세와 프랑스의 재정 지원으로 개선되었다. 따라서 스피놀라는 브레다 공략 이후 더 이상 군공을 세우지 못했고, 프레데릭 헨드릭이 흐룬로를 탈환하는 걸 막지 못했다.

1628년 2월, 스피놀라는 프랑스에 방문해 라로셀 포위전을 이끌던 루이 13세리슐리외 추기경을 알현했고, 뒤이어 스페인으로 이동했다. 그는 군대를 유지할 자금을 확보하지 못하는 한 플란데런에서 지휘권을 다시 맡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마드리드 궁정에서 흐룬로를 상실한 것에 대한 책임을 그에게 물으려는 올리바레스 백작 가스파르 데 구스만의 집요한 문책에 시달려야 했다. 그 후 만토바 계승 전쟁이 발발하자, 스페인 정부는 스피놀라를 1629년 7월 밀라노 공국 총독과 전권대사로 선임했다. 그는 1629년 9월 제노바에 상륙했다. 이 시기에 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스피놀라가 탄 배에 함께 탑승해 로마로 가던 중이었는데, 일각에서는 스피놀라가 이때 벨라스케스에게 브레다 함락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스피놀라는 스페인군이 30년 전쟁과 네덜란드 독립 전쟁을 동시에 치르는 와중에 만토바 계승 분쟁까지 뛰어드는 건 지나치다며 반대 입장을 표명했지만, 올리바레스 백작이 이를 빌미 삼아 그를 참소했고, 결국 전권대사로서의 권한을 박탈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그 후 스피놀라는 건강이 악화했고, 자녀들에게 연금을 지급해달라는 요청도 거부당했다. 그런 와중에도 카살레 몬페라토 요새 공방전을 이어가던 그는 평화 협상을 하던 교황 특사의 비서 마자리노의 개입으로 카살레 시가 자신에게 넘겨지는 것에 위안을 얻었다. 그 후 카스텔누오보 스크리비아에서 칩거 생활하던 그는 1630년 9월 25일에 병사했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죽기 직전에 "명예"와 "명성"이라는 단어를 언급했다고 한다. 그의 유해는 제노바와 밀라노 사이의 시골인 카살노체토의 스피놀라 궁전에 안장되었다.

3. 가족

  • 조반나 바치아돈네(? ~ 1615): 갈라레타 백작의 딸.
    • 필리포 스피놀라(1596~1659): 밀라노 총독.
    • 폴리세나 스피놀라: 레가네스 후작이자 올리바레스 백작 공작 디에고 멕시아 펠리페스 데 구스만의 사촌과 결혼.
    • 아구스티노 스피놀라(1597~1649): 추기경, 그라나다 대주교,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주교.
  • 마리 드 로렌오말레: 오말레 공작 샤를 드 로렌오말레의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