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12-04 22:30:40

페데리코 스피놀라

<colbgcolor=#ACB8C4><colcolor=#000000> 페데리코 스피놀라
Federico Spinola
파일:Federico-Spinola.jpg
성명 페데리코 스피놀라
Federico Spinola
출생 1571년
제노바 공화국 제노바
사망 1603년 5월 26일
스페인령 네덜란드 슬로이스 해상
아버지 필리포 스피놀라
어머니 폴리세나 그리말디
형제 암브로조, 렐리아
직위 스페인 해군 제독.
1. 개요2. 생애

1. 개요

스페인 제국의 해군 제독. 영국-스페인 전쟁, 네덜란드 독립 전쟁에서 활약했다. 17세기 스페인 제국 최고의 장군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암브로조 스피놀라의 동생이다.

2. 생애

1571년 제노바에서 세스토와 베나프로의 후작인 필리포 스피놀라와 살레르노 공 니콜로 그리말디의 딸 폴리세나 그리말디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형으로 암브로조 스피놀라가 있었고, 누이 렐리아 스피놀라는 벨몬테 공가의 후손인 제2대 갈라토네 후작 굴리오 카사르 스콰르치아피코와 결혼했다. 스피놀라 가문은 제노바에서 무역과 은행업으로 막대한 돈을 쌓고 정계에 오랫동안 영향력을 행사한 강력한 귀족 집안이었다.

일찍이 살라망카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했고, 공부를 마친 후 제노바로 돌아갔다가 플란데런으로 가서 파르마 공작 알레산드로 파르네세의 아들인 라누초 1세와 함께 플란데런 방면 스페인군이 복무했다. 이후 위그노 전쟁이 발발하자 프랑스 가톨릭 동맹 편에 서서 앙리 4세와 대적했다.

1592년 제노바에서 가져온 갤리선 4척을 이끌고 네덜란드 총독으로 부임한 이들을 계속 섬겼다. 그는 자기가 가진 배로 됭케르크에서 네덜란드 공화국잉글랜드 왕국의 무역을 방해했다. 1597년, 그는 갤리선 함대를 편성하고 군대를 수송해 잉글랜드 항구를 점령함으로써, 잉글랜드 사략선들의 약탈을 종식하고 평화 협정을 맺도록 강요하자고 제안했다.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는 그의 계획을 승인했지만, 실행하기 전인 1598년에 사망했다. 이후 페데리코는 갤리선들을 이끌고 잉글랜드-네덜란드 양국을 오가는 선박들을 상대로 사략 행위를 지속했다.

1599년, 페데리코는 잉글랜드 함대의 훼방을 뚫고 영국 해협을 무사히 통과하여 플란데런 방면 스페인군에게 물자를 전달하는 공적을 세웠다. 이 공적으로 스페인 궁정을 주목받은 그는 스페인의 새 국왕 펠리페 3세, 총신인 레르마 공작 프란시스코 고메스 데 산도발 이 로하스, 그리고 산타가데아 백작이자 스페인 제독 마르틴 데 파디야 이 만리케에게 플랑드르에서 함대를 꾸려서 잉글랜드를 침공하려 하니 자금을 지원해 달라고 요청했다.

1602년,펠리페 3세는 페데리코의 계획을 승인한다고 통보했다. 이에 페데리코는 스페인 왕실에 필요한 군자금 47만 두카트를 빌려주는 조건으로, 자기가 직접 지휘권을 맡는 걸 허락받았다. 잉글랜드 항구의 상륙과 정복에 참여할 군인 6,000명은 그의 형 암브로조가 이탈리아에서 데려올 예정이었다. 그는 갤리선 8척을 건조한 뒤, 산 루카르에서 리스본으로 향했다가 포르투갈 총독에 의해 세심브라만에 정박한 포르투갈 카락선 상 발렌티뉴(São Valentinho) 호를 지키는 임무가 주어졌다.

당시 스피놀라 가문은 제노바 공화국의 권력을 놓고 도리아 가문과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그러다가 권력 분쟁에서 패하자, 스피놀라 가문의 수장인 암브로조는 제노바에선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여기고 그곳을 떠나 스페인 군주를 위해 일하면서 가문의 운명을 개선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형과 합류한 페데리코는 1602년 6월 3일 리처드 레베슨과 윌리엄 몬슨이 이끄는 잉글랜드 갤리온 5척의 공격에 맞서 제2대 산타크루스 후작 알바로 데 바잔 이 베나비데스와 함께 항전했다.(세심브라만 해전) 그 결과 그가 이끌던 전함 트린다드와 오카시온 호가 침몰했고, 나머지 갤리선들은 잉글랜드 대포 사정거리 밖으로 물러났으며, 상 발렌티뉴 호를 빼앗겼다.

세심브라만 해전에서 패배하고 북쪽으로 퇴각한 페데리코는 남은 갤리선 6척을 리스본에 정박한 뒤, 플란데런 방면 스페인군에게 지급할 급여인 은화를 담은 상자로 배를 채웠다. 그해 9월 플란데런으로의 여정을 시작한 그는 잉글랜드 상선을 도중에 나포하여 라코루냐로 보냈다. 이후 산탄데르에서 병사 400명을 추가로 데려가면서, 함선에 1,600명에 달하는 테르시오를 갖췄다.

한편, 잉글랜드 당국은 스피놀라가 또다시 영국 해협을 돌파해 플랑드르의 스페인군에게 물자를 전달하려 한다는 첩보를 접수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이를 막기로 마음먹고, 윌리엄 맨셀 경에게 됭케르크와 슬로이스 앞바다에서 네덜란드 함대와 연합한 뒤 스피놀라를 저지하라고 지시했다. 이 시기, 네덜란드 함대는 야콥 반 다위벤보르데 중장이 이끄는 함대 9척을 파견해 스피놀라를 요격하려 했지만, 이 함대가 스페인 근처에 도착했을 때 스피놀라는 이미 떠난 뒤였다. 그 후 야콥은 천연두에 걸려 버렸고, 얀 아드리안스존 칸트에게 함선 4척을 맡겨서 스피놀라를 추격하는 임무를 맡겼다.

잉글랜드 해군 장성 윌리엄 맨셀은 함선 3척을 이끌고 켄트주의 던저니스곶에서 출항했다. 그는 페데리코가 잉글랜드 해안에 근접하여 항해할 거라고 예측하고, 각 함선 사이의 거리를 충분히 벌리고 플리부트를 사용해 플랑드르 해안에서 네덜란드 함대와 통신이 원활하게 했다. 10월 3일, 맨셀은 곧 2척의 네덜란드 플리부트 삼손과 문 호와 합류하여 통신을 개선했다.

1602년 10월 3일 자정 직전, 윌리엄 맨셀은 도버 해협에서 달빛이 비치는 가운데 페데리코의 갤리선을 탐색한 끝에 발견했다. 이후 벌어진 도버 해협 해전에서 페데리코는 적을 피해 도주했지만, 불행히도 때마침 얀 아드리안스존 칸트 이끄는 네덜란드 함대가 근처를 항해하던 중 포격 소리를 듣고 달려와 정면에서 가로막으면서 갤리선 2척이 모든 선원, 군인, 갤리선 노예와 함께 침몰했고, 약 2,000명의 사상자와 포로를 잃었다. 잉글랜드-네덜란드 연합 함대의 피해는 미미했다. 네덜란드 선박 2척이 적 갤리선과 정면충돌하면서 손상되었지만, 나머지 네덜란드 선박들은 사소한 피해만 보았다.

페데리코 본인과 그가 가져간 급여용 은화 상자 36개를 가져간 산 루이스 호는 됭케르크에 상륙하려고 시도했지만, 조수가 낮아서 모래톱 너머에서 기다려야 했다. 그러다가 네덜란드 선박 10척이 접근하자, 페데리코는 네덜란드 선박 사이를 빠르게 항해해 됭케르크에 상륙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산 후안호와 하신토 호가 니우포르트 항에서 다시 항해해 됭케르크로 이동해 페데리코와 합류했다. 이리하여 3척이나마 건질 수 있게 된 페데리코는 슬로이스 항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슬로이스 항을 곧바로 봉쇄한 네덜란드 해군의 압박에 시달리다가, 1603년 5월 26일 봉쇄를 뚫기 위해 슬로이스 해전을 치르던 중 전사했다. 그는 생전에 결혼하지 않아서 자녀를 낳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