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11-28 19:43:28

알바로 데 바잔 이 베나비데스

<colbgcolor=#ACB8C4><colcolor=#000000> 제2대 산타크루스 후작
알바로 데 바잔 이 베나비데스
Álvaro de Bazán y Benavides, II marqués de Santa Cruz
파일:Portret_van_de_commandant_Don_Álvaro_de_Bazán,_RP-P-OB-16.433.jpg
성명 알바로 데 바잔 이 베나비데스
Álvaro de Bazán y Benavides
출생 1571년 9월 12일
스페인 제국 나폴리
사망 1646년 8월 17일
스페인 제국 마드리드
아버지 알바로 데 바잔 이 구즈만
어머니 마리아 마누엘 데 베나비데스
배우자 귀오마르 만리케 데 라라 (1590년 결혼)
자녀 알바로, 마리아 에우게니아, 마이라 아나, 막달레나
직위 제2대 산타크루스 후작, 스페인 제독.
1. 개요2. 생애3. 가족

1. 개요

스페인 제국의 후작, 군인. 스페인 역사상 최고의 해군 제독으로 손꼽히는 알바로 데 바잔 이 구즈만의 아들이다.

2. 생애

1571년 9월 12일, 스페인 제국 나폴리에서 초대 산타크루스 후작이며 레판토 해전의 영웅인 알바로 데 바잔 이 구즈만과 마리아 마누엘 데 베나비데스[1]의 아들로 태어났다. 1588년 2월 초 스페인 대함대의 1차 잉글랜드 원정을 준비하던 아버지가 급사한 뒤 아버지의 작위와 영지를 계승했다. 1596년 하워드의 카디스 습격 때 카디스 항구 입구를 함선들로 봉쇄해 적 함대가 카디스만에 상륙하는 걸 저지했지만, 카디스가 점령당하는 걸 막지 못했다.

1597년 포르투갈 갤리선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1603년까지 그 직책을 유지했으며, 1603년 세심브라만 해전에서 잉글랜드-네덜란드 연합 함대에 맞선 페데리코 스피놀라의 함대에 가담하여 갤리선 3척을 이끌었다. 그러나 전투 도중 가장 큰 잉글랜드 갤리온의 포격으로 크게 다쳐 후방으로 이송되었고, 그의 소함대는 지휘관 부재로 혼란에 빠져 북쪽에서 후퇴했다. 부상에서 회복한 뒤, 나폴리 갤리선 사령관으로 재배치되었다.

1604년, 산타크루스 후작은 스페인 국왕 펠리페 3세오스만 제국 공격 명령에 응해 나폴리에서 함대를 이끌고 그리스로 항해해 잔테, 파트모스, 롱고 섬을 약탈했으며, 1605년 같은 군도에 있는 에스타르코 마을을 공격했으며, 알바니아 해안에 있는 오스만 요새이자 오스만 해적이 자주 나폴리를 습격하는 근거지였던 두라초를 약탈했다. 1606년 오스만 제국 선박에 대한 나포 허가서를 발급해 달라고 궁정에 직접 요청했지만, 사략선 행위는 제국의 위엄에 걸맞지 않은 관행이라는 궁정의 판단 때문에 거부되었다.

1608년 무어인 요새인 라리슈를 점령하는 임무를 맡았지만, 상륙 중 날씨로 인해 원정에 취소되었고, 취약한 상태로 적의 반격에 노출되고 싶지 않아서 후퇴했다. 이듬해에 스페인에서 추방된 모리스코인들을 북아프리카로 수송했으며, 1610년 라리슈가 스페인 제국에 자발적으로 양도되는 동안 그곳의 군대를 관리했다. 1611년 9월, 제노바, 몰타, 그리고 옥타비아 데 아라곤이 지휘하는 시칠리아 함대와 함께 케르케네스 제도를 약탈하고 300명 이상의 적을 죽이고 500명을 생포했다.

1612년 5월, 시칠리아 총독인 오수나 공작 페드로 텔레스기론의 후원으로 라 골레타에 대한 습격 작전을 수행한 후 시칠리아로 돌아온 안토니오 피엔텔과 함께 합동 작전을 기획했다. 두 사람은 튀니스의 오스만 함대가 무장하고 있던 비제르테 항구를 습격해 약탈을 자행했다. 1614년 제2대 로스 벨레스 후작 루이스 파하르도 이 차콘의 지휘하에 모로코의 라 라모라 요새를 점령하는 데 일조했다. 그 후 스페인 갤리선의 함장이 된 그는 1617년 베네치아 공화국이 고용한 네덜란드 용병 함대가 지브롤터 해협을 통과하는 것을 막는 임무를 맡은 분견대에 가담했다. 그러나 왕실 명령의 조정 실패로, 네덜란드 함대를 포획하지 못했다.

1617년 11월 22일 오수나 공작 페드로 텔레스 히론이 라구사 해전에서 베네치아 함대를 섬멸한 뒤, 미겔 데 비다사발은 베네치아가 1618년에 지원군으로 소집한 또 다른 네덜란드 함대의 통행을 막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산타크루스 후작이 궁정에서 그들을 구금하지 말라고 명령했다는 것을 그에게 알렸다. 베네치아에 주둔한 네덜란드 용병들은 2개월 후 오수나 공작이 그들 사이에 반란을 선동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은 모호한 베네치아 음모에 참여했다. 한편, 산타크루스 후작은 1620년에 해군 중장이자 시칠리아 총독 마누엘 필리베르토 데 사보야의 고문으로 선임되어, 시칠리아 갤리선과 함께 여러 척의 네덜란드 갤리온을 나포했다.

그 후 그는 무슬림과의 전쟁에 집중했다. 1622년 연합 갤리선 함대가 레반트를 습격하여 알렉산드리아 인근에서 소형 선박 42척을 나포했다. 1624년 5월, 비제르테와 알제리에서 온 해적 함대가 기지에서 출항했다는 소식을 듣고, 시칠리아 갤리선 14척과 몰타 갤리선 14척을 이끌고 출항해 팔레르모 해전에서 격파했다.

네덜란드 갤리온선을 나포한 후, 그는 튀니스만 해전에서 전 갤리산 노예인 무어인 해적 알리 아라에즈 아바진의 대형 갤리온선 3척을 파괴했다. 그가 이 전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함선에 장착된 이탈리아-스페인 대포로, 이를 통해 무슬림 함선에 포탄을 퍼부어 그들이 탈출을 시도하다가 좌초될 때까지 공격할 수 있었다. 이후 산타크루스 후작은 좌초된 배 선미에 뛰어 들어간 뒤 적 선원 대부분과 아바진을 생포했다. 그 후 산타크루스 후작은 이비자로 돌아가던 중 알렉산드리아에 막 도착한 튀니지 갤리온선 4척을 만나 그들을 포획하고 많은 양의 전리품을 보냈다.

얼마 후, 산타크루스 후작은 바르바리 해적 함대 13척이 알바니아 해안에 나타났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는 현장으로 달려간 뒤 바르바리 해적들에게 항복할 기회를 줬지만, 그들이 거부하고 격렬하게 저항하자 달마티아 해안 해전에서 모든 적선을 침몰하거나 나포했다. 그 후 프랑스 전선으로 투입된 산타크루스 후작은 프로방스 해역에서 프랑스 함선 3척을 침몰했다.

1625년, 산타크루스 후작은 무슬림 함대에 대한 지속적인 승리 덕분에 펠리페 4세에 의해 국가 및 전쟁 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그는 프랑스를 상대로 한 30년 전쟁에 참여한 뒤, 프랑스, 베네치아 공화국, 사보이아 공국의 포위 공격을 받는 스페인의 전통적인 동맹인 제노바 공화국을 구출하는 임무를 맡았다. 제3대 페리아 공작 고메스 4세 수아레스 데 피게로아가 육로에서 적군을 공격하는 동안, 본인은 함대를 이끌고 바다에서 도시에 진입하여 제노바를 해방했다. 스페인의 저명한 화가 안토니오 데 페레다 이 살가도는 레티로 궁전의 <왕국의 전당>에서 이때의 승리를 기념하는 그림을 출품했다. 이후 산타크루스 후작은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알벤가, 벤티밀리아 및 지중해의 프랑스 해안 요새들을 하나씩 정복했다.

1630년 밀라노 공국의 총독 겸 사령관으로 선임되었다. 네덜란드 전선에서 활약하던 암브로조 스피놀라가 사망하자, 스페인령 네덜란드는 헨드릭 반 덴 베르흐 백작의 통치를 받았지만, 프레데릭 헨드릭이 지휘하는 네덜란드 공화국의 맹공으로 전세가 위태로워졌다. 이에 스페인 당국은 산타크루스 후작은 네덜란드 전선으로 보내 네덜란드군에 맞서게 했다. 그러나 그는 혼란스럽고 조직화되지 않은 스페인군을 지휘해야 했고, 이 때문에 프레데릭 헨드릭이 마스트리흐트를 포위 공격하는 걸 막지 못했다. 이후 팔츠에서 도착한 곤살로 페르난데스 데 코르도바 이 카르도나로 대체되었지만, 곤살로 페르난데스 역시 마스트리흐트를 구원하지 못했다.

산타크루스 후작은 왕비의 수석 집사 직책을 맡아 스페인으로 돌아왔지만, 곧 나폴리로 돌아갔고, 그곳에서 롬바르디아에 대한 프랑스군의 압력을 완화하기 위해 프랑스 해안에 대한 해상 침공 작전을 조직했다. 그러나 그가 이끈 함대는 이에르 제도를 공략하려던 중 폭풍을 만나 심하게 손상되었다. 1635년 가르시아 데 톨레도와 함께 레렝 섬을 점령하고 프랑스 상선을 공격하는 기지로 삼았다. 이 전략은 성공적이었고, 롬바르디아인들이 프랑스를 상대로 봉기하는 걸 부추기는 데 일조했다.

1636년 멜초르 프란시스코 안토니오 데 보르하의 지휘 아래 코르시카 해협 전투에 참전하여 수적 열세를 극복하고 네덜란드 함대를 격파했다. 이후에도 여러 전선을 오가며 전쟁에 참여했고, 1639년에는 오랑의 총독으로 선임되었으며, 1643년 오랑을 점령하려던 무어인 함대를 격파했다. 3년 후인 1648년 8월 17일에 마드리드에서 사망했다.

3. 가족

  • 귀오마르 만리케 데 라라(?~1652): 제2대 나헤라 공작 베르나르디노 만리케 데 라라의 딸.
    • 알바로 데 바잔 이 만리케 데 라라(?~1660): 제3대 산타크루스 후작, 제2대 비소 후작. 1627년 제노바 해군 제독 후안 안드레아 도리아의 손녀인 마리아 프란체스카 도리아 이 스피놀라와 결혼했다.
    • 마리아 에우게니아 바잔 이 베나비데스(?~1667): 제5대 산타크루스 여후작 및 4대 비소 여후작. 1620년 사르데냐 총독 제로니모 피멘텔의 부인.
    • 마리아 아나 데 바잔 이 베나비데스: 엘리자베스 드 프랑스시녀. 1631년 산티아고 기사단 기사이자 플란데런군 원수인 초대 가르시에스 백작 페르난도 케사다 멘도사의 부인.
    • 마달레나 이 바잔: 제2대 비카리 백작, 제3대 미실리메리 공작, 알칸타라 기사단 기사이자 시칠리아 민병대 지사 프란시스코 델 보스코 이스파 이 빌라라구트의 부인.

[1] 제5대 산티스테반 델 푸에르토 백작 프란시스코 데 베나비데스의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