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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 데 파디야 이 만리케

<colbgcolor=#ACB8C4><colcolor=#000000> 초대 산타가데아 백작
마르틴 데 파디야 이 만리케
Martín de Padilla y Manrique, I conde de Santa Gadea
성명 마르틴 데 파디야 이 만리케
Martín de Padilla y Manrique
출생 1540년
스페인 제국 카스티야 이 레온 칼라타냐소르
사망 1602년
스페인 제국 카디스주 엘 푸에르토 데 산타마리아
아버지 안토니오 만리케 데 라라
어머니 루이사 데 파디야 엔리케스
배우자 루이사 데 파디야 이 아쿠냐
자녀 후안, 마르코 안토니오, 마르틴, 에우제니오, 마리아나 만리케, 아나 마리아, 루이사
직위 초대 산타가데아 백작, 초대 아델란타도 백작, 제8대 부엔디아 백작, 국무장관과 전쟁 장관, 스페인 해군 제독.
1. 개요2. 생애3. 가족

1. 개요

스페인 제국의 백작, 군인. 레판토 해전영국-스페인 전쟁에서 활약했다.

2. 생애

1540년경 스페인 제국 카스티야 이 레온의 칼라타냐소르에서 출생했다. 그의 가문은 부르고스와 소리아 지방에 있는 저명한 카스티야 귀족 집안이었으며, 그의 조상은 산타카데아 델 시드, 파디야, 칼라타나소르의 영주였다. 어머니 루이사 데 파디야 엔리케스는 산타가데아의 여성 영주였다. 1569년, 마르틴은 돈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가 이끄는 제2차 알푸하르 반란 진압 작전에 참여했다. 1571년 레판토 해전에 참가해 갤리온 선장으로서 오스만 제국 함대 4척을 나포하는 전공을 거뒀다. 이후 지중해에서 20여 년간 바르바리 해적, 잉글랜드 해적 토벌전에 잇달아 참여했으며, 1585년 스페인 제국의 군주 펠리페 2세에 의해 스페인 갤리선 함대 사령관으로 선임되었다.

1587년 1월 29일, 산타가데아 별장의 백작 작위를 받았다. 1589년 에식스 백작 로버트 데버루, 프랜시스 드레이크, 존 노리스가 이끄는 잉글랜드 대함대의 스페인 원정에 맞서 갤리선 9척을 이끌고 리스본을 지키는 임무를 수행했다. 이후 잉글랜드군이 리스본 공략을 포기하고 대서양으로 물러나자, 즉시 갤리선 7척을 이끌고 6월 20일에 그들을 추격했다. 그는 자기가 가진 갤리선이 잉글랜드 해군이 보유한 큰 범선에 정면 대결하면 승산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바람이 불지 않으면 범선이 사실상 움직이지 못하고 해류의 변화에 좌우되지만, 갤리선은 노의 추진력을 이용해 범선의 선미 쪽으로 기동한 뒤 제한된 화력으로 적 함선을 세로로 관통하도록 해, 적 함선의 현 측에 있는 포탄에 노출되지 않고도 큰 피해를 줄 수 있었다.

파디야의 갤리선 7척은 잉글랜드 함대와 거리를 두고 추격하면서, 바람이 불지 않는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이때 그는 드레이크가 1587년에 그랬던 것처럼 카디스를 또다시 습격하는 것을 걱정했다. 그는 밤에 적 함대 중앙으로 들어가서 잉글랜드 출신 가톨릭 선장을 스키프에 태워서 잉글랜드 선원들과 접촉해 그들의 계획을 알아내려고 했다. 하지만 그 선장은 잉글랜드 선원들이 아프고 사기가 저하되었다는 것만 파악하고 돌아왔다. 이후 바람이 매우 약하게 불어서 범선의 기동이 어려워지자, 파디야는 본격적으로 공격하기로 했다. 그는 함선들에 잉글랜드 함선의 선미로 이동한 뒤 연이어 포격을 가하고, 교대로 대포를 재장전하도록 했다. 또한 병사들은 머스킷 총으로 잉글랜드 함선의 갑판을 맹렬히 공격했다.

스페인 해군이 고작 갤리선 7척으로 공격을 퍼부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잉글랜드 해군은 제대로 대응하지도 못하고 막대한 희생을 치렀다. 300~500톤급 함선 4척, 60톤급 보트 1척, 노를 젓는 보트 1척이 나포되었고, 잉글랜드군 570명이 전사하고 130명이 포로 신세로 전락했다. 포로 중에는 선장 3명, 기관장 1명, 선원 여러 명이 포함되었다. 스페인 측 사상자는 전사자 2명, 부상자 10명에 그쳤다.

그러나 다시 산들바람이 불기 시작하자, 드레이크는 기함을 조종하여 다른 대형 함선 4척을 이끌고 리스본으로 전리품을 견인하던 스페인 갤리선 쪽으로 향했다. 이에 파디야는 전리품을 처분하기로 하고, 대형 함선들을 불태우고 소형 함선들을 포격으로 격침하라고 명령했다. 이후 스페인 갤리선들은 적의 대형 범선들과 거리를 유지하며 후퇴했고, 드레이크는 바람이 충분히 불지 않아서 그들을 따라잡지 못했다. 오후 5시경, 강풍이 불기 시작하자 잉글랜드군은 비로소 돛을 올리고 북쪽으로 향했다. 이후 카디스가 공격당할 것을 우려한 파디야는 갤리선 3척이 추가로 합류했지만, 더 이상의 전투를 포기하고 카디스로 가서 방어를 준비하기로 했다.

1591년, 파디야는 알메리아만 해전에서 함선 20척을 이끌고 잉글랜드-네덜란드 연합 함대 35척을 습격해 네덜란드 선박 20척과 잉글랜드 선박 3척을 나포했다. 그는 나포한 배를 이끌고 알메리아 항구에 입항해 스페인 주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1596년, 그동안 거둔 전공을 인정받아 스페인 함대의 총사령관이 되었고, 펠리페 2세로부터 해양 대장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같은 해 펠리페 2세의 명령으로 스페인 대함대의 2차 잉글랜드 원정을 이끌었다. 당시 스페인 함대는 갤리온 30척을 포함해 175척의 함선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함대는 피니스테레곶 인근에서 악천후에 직면해 막대한 피해를 보고 도로 귀환해야 했다.

1597년, 파디야는 스페인 대함대의 3차 잉글랜드 원정 함대를 조직하여 웨일스의 항구 도시인 팰머스에 상륙하려 했지만, 또다시 악천후에 직면해 큰 손실만 입고 퇴각해야 했다. 1598년, 멜피 공작 안드레아 도리아가 이끄는 스페인 함대에 가담하여 제노바에서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 여대공을 모시고 스페인으로 데려와서 스페인의 새 국왕 펠리페 3세와 결혼시키는 임무를 맡았다. 1601년 프랑스 해적의 지원을 받은 네덜란드 함대를 알메리아 해역에서 격파했으며, 같은 해 스페인 함대의 아일랜드 원정 지휘관으로 거론되었지만, 병에 걸려서 응하지 못했다. 1602년경 카디스주 엘 푸에르토 데 산타마리아에서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3. 가족

  • 루이사 데 파디야 이 아쿠나(?~1614): 산타가데아 백작 마르틴 데 파디야의 형제인 후안 데 파디야 이 만리케의 딸. 제7대 부엔디아 여백작.
    • 후안 데 파디아 만리케(?~1606): 제2대 산타가데아 백작, 제9대 부엔디아 백작.
    • 마르코 안토니오 데 파디야 만리케
    • 마르틴 데 피디야 만리케: 예수회 신부.
    • 에우제니오 데 파디야 만리케(?~1622): 제3대 산타가데아 백작, 제10대 부엔디아 백작.
    • 마리아나 만리케 데 파디야 이 아쿠냐(?~1611): 초대 레르마 공작이자 펠리페 3세의 총신인 프란시스코 고메스 데 산도발 이 로하스의 아들인 초대 우체다 공작 크리스토발 고메스 데 산도발 이 로하스의 부인. 그들의 아들인 제2대 레르마 이 우세다 공작 프란시스코 고메스 데 산도발 이 로하스가 뒤를 이어 부엔디아 백작이 되었다.
    • 아나 마리아 데 파디야 만리케: 제7대 앨버커키 공작 프란시스코 페르난데스 데 라 쿠레바의 부인.
    • 루이사 데 파디야 만리케(1590~1646): 제5대 아란다 백작 안토니오 히메네스 데 우레아의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