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lbgcolor=#ACB8C4><colcolor=#000000> 헨드릭 반덴베르흐 Hendrik van den Bergh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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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명 | 헨드릭 반덴베르흐 Hendrik van den Bergh |
| 출생 | 1573년경 |
| 신성 로마 제국 브레멘 | |
| 사망 | 1638년 5월 22일 |
| 네덜란드 공화국 헬데를란트 엘부르크 | |
| 아버지 | 빌럼 4세 반덴베르흐 |
| 어머니 | 마리아 반 나소 |
| 형제 | 프레데릭, 헤르만 외 13명 |
| 배우자 | 마르가레타 반 비템, 히에로니마 카타로나 반 슈파우어플라본 |
| 자녀 | 마리아 엘리사벳, 허먼 오스월드, 엘리사벳 카타리나, 아말리아 루시아, 마리아 아그네스, 안나 카롤리나, 빌헬미나 줄리아나, 안나 마리아 엘리사벳(사생아),헤르만 프레데릭(사생아) |
| 직위 | 스페인 기병대 지휘관, 오버헬데를란트 총독, 플란데런 방면 스페인군 총사령관. |
1. 개요
네덜란드의 귀족. 네덜란드 독립 전쟁 초기 네덜란드 반군에 가담했지만, 아버지와 형제들과 함께 스페인군에 귀순한 뒤 네덜란드 공화국에 맞서 싸웠다. 그러다가 1632년 스페인령 네덜란드를 네덜란드 공화국과 프랑스에 각각 넘기고 스페인군을 몰아내려는 음모를 꾸몄지만, 실패로 끝나자 1633년 네덜란드 공화국으로 망명했지만, 스페인군을 위해 봉사한 경력 때문에 의심을 받아 더 이상 군직을 맡지 못했다.2. 생애
1573년경, 신성 로마 제국의 브레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빌럼 4세 반덴베르흐이고, 어머니는 빌럼 1세의 누이인 마리아 반 나소였다. 형제로 프레데릭, 헤르만 외 13명이 있었다. 1566년, 아버지 빌럼은 여러 귀족과 함께 네덜란드 여성 총독인 파르마의 마르가레테에게 청원서를 제출해, 개신교 탄압을 중단해달라고 호소했다. 그 후 알바 공작 페르난도 알바레스 데 톨레도가 신임 총독으로 부임하여 청원서에 서명한 인사들을 탄압하자, 빌럼은 가족들을 데리고 브레멘으로 피신한 뒤 빌럼 1세의 휘하에 들어가 네덜란드 반군의 주요 장성을 맡았으며, 1581년부터 헬러 총독을 역임했다.그러나 파르마 공작 알레산드로 파르네세에게 접근해 스페인군에게 투항하고 헬러를 넘기려 했다가 발각되면서 1583년 1월 5일 온 가족과 함께 체포된 뒤 1584년 3월까지 연금되었다. 빌럼 1세는 그가 울프트에 있는 자기 성으로 은퇴하고 향후 전쟁에서 중립을 지키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뒤 석방했다. 하지만 1584년 후반, 빌럼 4세 반덴베르흐는 아들들과 함께 공개적으로 스페인군 지지를 선언했고, 2년 후에 울프트 성에서 사망했다.
헨드릭은 아버지가 브레멘으로 망명했을 때 태어났고, 1586년 아버지와 형제들이 스페인군에 입대했을 때 함께 했다. 1595년 9월 3일 리페 전투에서 기병대 1개 편대를 이끌고 네덜란드-잉글랜드 연합군 기병대를 요격해 승리에 일조했다. 그 후 베르트 외곽에서 네덜란드군에 붙잡혔고, 많은 몸값을 지급한 후에야 풀려났다. 1606년 암브로조 스피놀라가 흐룬로를 공략할 때 참여했지만, 1607년 루르몬트 인근에서 다시 생포된 뒤 몸값을 지급한 후 풀려났다.
1618년 형 프레데릭이 사망한 후 오버헬데를란트 총독 직위를 물려받았다. 이 지역은 헬데를란트 중 네덜란드 공화국에 합류하지 않고 스페인에 충성을 유지한 유일한 지역이었다. 1621년 12년 휴전 협정이 종료되고 네덜란드 독립 전쟁이 재개되자, 스페인 사령관 암브로조 스피놀라의 부관으로 복무하며 율리히, 브레다, 흐룬로 공방전에 참여했다. 1628년 1월, 스페인 정부가 충분한 자금과 병력을 제공하지 않는 것에 불만을 품은 스피놀라가 사임한 뒤, 헨드릭은 플란데런 방면 스페인군 총사령관에 선임되었다. 네덜란드 출신 '토박이'였던 그를 총사령관으로 세운 건 현지 민심을 회유하기 위한 스페인 당국의 조치였지만, 스페인 장성들은 이에 깊은 불만을 품고 그의 명령에 제대로 복종하지 않았다.
1628년 9월, 네덜란드 함대가 쿠바의 마탄사스만 해전에서 스페인 보물 함대를 탈취하면서, 플란데런 방면 스페인군의 재정 문제가 악화했다. 이 때문에 스페인군 장병들은 급료를 받지 못했고, 다들 싸울 의욕을 잃었다. 반면에 네덜란드 측은 보물선에서 나온 자금을 활용해 1629년 덴보쉬를 공격할 자금을 마련했다. 헨드릭은 덴보쉬를 포위한 적군이 너무 강력해 직접 공격하기 어렵다고 여기고, 일련의 교란 공격을 통해 네덜란드의 스타트허우더 프레데릭 헨드릭이 포위를 풀도록 유도하려 했다. 그러나 그가 직접 지휘한 벨루에 공격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덴보쉬는 1629년 8월에 항복했다.
그 후 스페인의 전쟁과 재정 관리에 대한 불신을 품은 플란데런 내부 인사들이 전쟁을 종식할 움직임을 보였다. 스페인 장성들로부터 덴보쉬 상실 책임을 지라는 압박을 받았고, 덴보쉬 외곽에 있던 아내의 영지가 네덜란드군에게 몰수당한 것에 큰 부담을 느끼던 헨드릭도 이들의 계획에 동참했다. 그들은 플란데런 전체를 네덜란드 공화국과 재통합하려 했다. 그러나 칼뱅파를 신봉하는 네덜란드군이 덴보쉬의 가톨릭 신자들을 학대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네덜란드 공화국에 대한 플란데런 민중의 반감이 강해졌고, 결국 계획은 취소되었다.
1632년 4월, 헨드릭은 가에스베이크 남작 르네 3세 반 레네세와 함께 '귀족 음모'로 알려진 대체 음모를 조직했다. 그들은 스페인령 네덜란드를 네덜란드 공화국과 프랑스로 나누고, 스페인군을 축출해 전쟁을 끝내는 동시에 남부의 가톨릭을 믿을 권리를 지키기로 했다. 모의자들은 익명으로 자기들의 뜻을 설명하는 선언문을 배포했지만, 브뤼셀 정부를 위협할 만큼 지지를 충분히 얻지 못했다. 또한 그들은 프레데릭 헨드릭과 비밀리에 접촉해, 그가 안트베르펜 공격을 포기하고 마스트리흐트를 공격하는 걸 받아들이게 했다. 마스트리흐트는 1632년 8월 26일에 네덜란드군에게 항복했고, 루르몬트와 벤로 역시 뒤따라 항복했다.
헨드릭과 르네 3세는 마스트리흐트를 일부러 구원하지 않아서 그곳이 네덜란드군에 넘어가도록 유도해, 플란데런 민중의 스페인에 대한 불만을 높이고 자신들의 계획에 대한 지지를 얻으려 했다. 그러나 플란데런 민중은 끝내 스페인을 저버리지 않았고, 스페인 당국은 음모를 적발한 뒤 음모자들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헨드릭은 리에주로 피신한 뒤 그곳에서 반란을 선동하려는 시도를 계속했지만 실패했고, 1633년 네덜란드 공화국에 망명했다. 그러나 네덜란드 공화국은 그가 스페인군 총사령관이었으며, 배신을 저질렀다는 점 때문에 그를 불신하여 군직을 맡지 못하게 했다. 결국 1634년 엘부르크로 은퇴한 뒤 1638년 5월 22일에 그곳에서 사망했다.
3. 가족
- 마르가레타 반 비템(1582~1627): 제브뤼헤 백작 요한 4세 크로셀라르 반 비템의 딸.
- 마리아 엘리사벳 반덴베르흐(1613~1671): 베르헌옵좀 후작 부인. 호엔촐레른헤힝엔 공작 아이텔 프레데릭 2세의 부인.
- 헤르만 오스왈드 반덴베르흐(1614~1622): 요절.
- 히에로미나 카타리나 반 슈파우어플라본(1600~1683): 게오르크 프레데릭반 슈파우어플라본의 딸.
- 엘리사벳 카타리나 반덴베르흐(1632~1681): 요한 4세 반 호엔레히베르크아이헨의 부인.
- 아말리아 루시아 반덴베르흐(1633~1711): 폴 야콥 반 발트부르크차일의 부인.
- 마리아 아그네스 반덴베르흐: 수녀.
- 안나 카롤리나 반덴베르흐: 수녀.
- 빌헬미나 줄리아나 반덴베르흐(1638~1714): 베른하르트 폰 자인비트겐슈타인과 초혼, 크로이의 샤를 외젠과 재혼.
- 사생아
- 안나 마리아 엘리사벳 반덴베르흐(1600~1653): 베르나르트 알브레히트 판 림부르크 스티럼과 초혼, 브룩호스트 반 림부르크스티럼과 재혼.
- 헤르만 프레데릭 반덴베르흐(1600~1669): 요시나 반 뢰벤슈타인베르트하임과 결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