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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A0522D><colcolor=#fff> 두클랴 크냐지 {{{#fff {{{+1 스테판 보이슬라프}}} }}} {{{#fff Стефан Војислав}}} | |
출생 | 미상 |
사망 | 1043년 |
재위 | 두클랴 크냐지 |
1019년 ~ 1043년 | |
아버지 | 드라기미르 |
배우자 | 네다 |
자녀 | 고지슬라프, 미하일로 1세, 사가네크, 라도슬라프, 프레디미르 |
가문 | 보이슬라블예비치 왕조 |
반란 대상 | 미하일 4세, 콘스탄티노스 9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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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두클랴 제3대 크냐지. 동로마 제국 마케도니아 왕조의 반란자. 미하일 4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압송되었으나, 탈옥 후 재차 반란을 일으켜 동로마 제국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독립을 쟁취했다. 두클랴를 넘어 세르비아 전역을 통치한 보이슬라블예비치 왕조의 시조이다.2. 생애
11세기 동로마 제국 역사가 요안니스 스킬리치스와 케카우메노스는 '보이슬라프(Vojislav)'라고 거론하지만, 12세기 후반에 집필된 《두클랴 사제 연대기》는 도브로슬라프(Dobroslav)라고 기술했다. 이에 대해 일각에서는 그의 전체 이름이 스테판 도브로슬라프 보이슬라프일 거라고 추정하지만,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 두클랴 사제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트라부니야와 자후믈례의 통치자이며 두클랴 제2대 크냐지 요반 블라디미르의 삼촌인 드라기미르의 아들이다. 드라기미르는 1010년 불가리아 제1제국 차르 사무일의 군대가 쳐들어오자 조카 요반 블라디미르에게 복종하고 가신이 되었다.1016년 요반 블라디미르가 불가리아 차르 이반 블라디슬라프에게 살해되었고, 1017년 이반 블라디슬라프도 전사하자, 드라기미르는 1018년 상반기에 두클랴를 장악하기 위해 출진했다. 그가 코토르에 이르렀을 때, 이 도시 주민들은 보카 코토르스카(Boka Kotorska) 에 있는 작은 섬에서 잔치를 준비했다. 드라기미르는 자기를 위해 잔치를 베풀어주겠다는 주민들의 말을 믿고 부하 몇 명과 함께 잔치에 참여했다가 코토르인들에게 피살당했다. 이후 아들 보이슬라프가 그의 직위를 계승했고, 1019년경에 동로마 제국의 가신으로서 두클랴 크냐지에 선임되었다.
보이슬라프는 라구사의 스트라테고스인 카타칼론 클라조메니테스와 자주 교류했다. 한번은 카타칼론이 보이슬라프가 자신의 아들 카타칼론의 대부가 되어주길 원해 보이슬라프 일행을 모셔오기도 했다. 보이슬라프는 훗날 자신이 납치당한 거라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초대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렇듯 동로마 관리들과 긴밀한 관계를 이어갔지만, 그는 내심 두클랴를 언젠가 독립시키겠다는 야망을 품었다.
1025년 명군 바실리오스 2세가 사망한 뒤, 동로마 제국은 정국 혼란으로 점점 쇠약해졌고, 과도한 세금에 분노한 불가리아에서 폭동이 빗발치면서 산골짜기에 위치한 두클랴에 대한 통제권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보이슬라프는 이 기회를 틈타 추종자들을 끌어들였고, 1034년 로마노스 3세 황제가 급사하여 제국이 어수선한 틈을 타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1035년 또는 1036년 진압군에게 붙들려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내졌고, 두클랴는 스트라테고스 테오필로스 에로티코스의 관할에 들어갔다. 1037년 말 또는 1038년 초, 보이슬라프는 탈옥에 성공하여 두클랴로 돌아갔다. 이후 반군을 극비리에 끌어모았고, 동로마 제국에 우호적이던 자후믈례와 트라부니야 공국에 대한 유격전을 전개했다. 1040년경, 그의 영역은 북쪽의 스톤에서 남쪽의 스카다르까지 해안지대에 펼쳐졌고, 트레비네, 코토르, 바르에 독자적인 통치기관이 세워졌다.
1039년 동로마 제국의 남이탈리아 속주에서 테살로니키로 운송되던 10켄테나르의 금(7,200 노미스마타)이 배에 실려 운송되던 중 폭풍우를 만나 해안가에 난파되었다. 그는 재빨리 그것을 회수하여 자기 것으로 삼았다. 미하일 4세는 이 소식에 격노하여 게오르기오스 프로바타스 장군에게 토벌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동로마군은 협곡에 섣불리 들어갔다가 보이슬라프의 군대에게 섬멸되었다. 그 후 불가리아인들이 1040년 페터르 데얀을 차르로 선포하고 제국에 맞섰기 때문에, 동로마 제국은 이들을 진압하느라 두클랴에 대한 별다른 공세를 벌이지 못했다.
보이슬라프는 공세를 이어가 자후믈례와 트라부니야 공국의 대부분을 공략했다. 이에 콘스탄티노스 9세는 다라키움과 주변 테마에 기반을 둔 동로마군을 파견하여 두클랴를 공격하기로 했다. 1042년 10월, 파리스트리온 테마의 스트라테고스인 미하일 아나스타시오스가 대군[1]을 이끌고 두클랴로 진격했다. 보이슬라프는 이 소식을 접하자 장병 및 주민들과 함께 산악 지대로 피신했고, 동로마군은 텅빈 두클랴로 진입해 약탈을 자행했다.
요안니스 스킬리치스의 <시놉시스 히스토리온>에 묘사된 삽화.
이윽고 충분한 전리품과 포로를 모았다고 여긴 미하일은 달마티아로 이동했다. 그러다가 동로마군이 바르 협곡에 이르러 그곳에 야영했을 때, 보이슬라프가 새벽녁에 진영 주변 고지에서 진영을 향해 화살과 돌을 쏟아부어 깊은 잠에 빠졌던 적군을 대거 사살했고, 병사들에게 큰 소리를 지르고 나팔을 요란하게 불도록 했다. 이에 동로마군은 실제보다 훨씬 많은 적병이 쳐들어왔다고 여기고 동요한 나머지 가져가던 모든 전리품과 포로를 내팽개치고 도주했다. 보이슬라프는 패주하는 적병을 추격해 대거 사살했다. 그렇게 바르 전투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고 물러난 동로마군은 더 이상 두클랴를 향한 대규모 원정을 벌이지 못했다.
1042년, 라쉬카의 주판이자 자후믈례의 크네츠인 류도비드는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막대한 금과 은을 받고, 두클랴의 보이슬라프를 타도하라는 의뢰를 수락했다. 류도비드는 1043년 군대를 일으켜 두클랴를 침공했지만, 코나블리의 클로불크 언덕에서 매복을 당해 참패했다. 보이슬라프는 곧바로 반격을 가해 자후믈례, 트라부니야, 그리고 디라히온 테마 일부 지역을 석권했다. 이렇듯 동로마군을 상대로 승승장구하던 보이슬라프는 1043년경 사망했고, 궁전 인근에 있는 성모 마리아 교회에 묻혔다.
보이슬라프는 생전에 불가리아 제1제국의 차르 사무일의 조카로 알려진 네다와 결혼해 다섯 아들 고지슬라프, 미하일로 1세, 사가네크, 라도슬라프, 프레디미르를 낳았다. 두클랴 연대기에 따르면, 보이슬라프가 사망한 뒤 고지슬라프와 프레디미르는 트라부니야와 그르발지 교구를 상속받았고, 미하일로 1세는 오블리크, 프라프라트나, 크름니카 교구를 상속받았으며, 사가네크는 고르스카, 쿠펠니크, 발레크를 받았고, 라도슬라프는 루카, 포들루지예, 쿠체포 등지를 상속받았다. 또한 아내 네다가 여성 크냐지가 되었고, 그녀의 아들들은 가신이 되었다고 한다. 네다는 1043년부터 1046년까지 통치했고, 그녀가 사망한 뒤 미하일로 1세가 뒤를 이어 두클랴 크냐지가 되었으며, 1077년 교황 그레고리오 7세로부터 두클랴 왕위를 인정받았다.
[1] 두클랴 사제 연대기에 따르면, 40,000 ~ 60,000명에 달했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 학계는 이를 과장된 수치로 간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