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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A0522D><colcolor=#fff> 두클랴 국왕 {{{#fff {{{+1 그라디냐}}} }}} {{{#fff Градихна}}} | |
출생 | 미상 |
사망 | 1143년 |
재위 | 두클랴 국왕 |
1131년 ~ 1143년 | |
아버지 | 라도슬라프 |
형제 | 브라니슬라프, 고지슬라프, 프레디흐나, 드라기냐, 드라길로 |
자녀 | 라도슬라프 그라디슈니치, 로바르, 블라디미르 |
가문 | 보이슬라블예비치 왕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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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두클랴 제9대 국왕. 동로마 제국의 지원으로 도르제 보디노비치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뒤 동로마 제국에게 의존하며 왕위를 유지했다.2. 생애
두클랴 3대 크냐지 스테판 보이슬라프의 아들이자 두클랴 초대 국왕 미하일로 1세의 형제이며, 트라부니야와 자후믈례의 통치자인 라도슬라프의 아들이다. 형제로 브라니슬라프, 고지슬라프, 프레디흐나, 그루베샤, 드라기냐, 드라길로가 있었다. 1090년경, 미하일로 1세의 아들이자 두클랴 2대 국왕 콘스탄틴 보딘은 아내 자퀸타 브린스카의 선동에 따라 슈코더르에 있던 자신을 방문한 브라니슬라프, 고지슬라프, 프레디흐나를 체포했다. 이에 그라디냐는 나머지 형제와 함께 라구사 공화국으로 망명했다. 이후 보딘의 군대가 라구사를 포위했지만 쉽사리 공략하지 못했다.그러던 중 자기가 총애하는 신하가 전사한 것에 격분한 자퀸타는 남편을 설득해 브라니슬라프, 고지슬라프, 프레디흐나를 성벽 앞에서 참수하도록 했다. 그러자 라구사 성벽 내부에서 동요가 일어났고, 일부 수비대는 항복하는 걸 진지하게 고려했다. 라구사에 망명했던 보딘의 친척들은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스플리트로 망명했다가 다시 아퀼레리아로 이동했고, 그곳에서 배를 갈아타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망명했다. 1099년 보딘이 사망한 뒤 보딘의 장남 미하일로 2세가 왕위에 올랐지만 퀸타에게 반감을 품은 무리가 얼마 안가 콘스탄틴 보딘의 이복형제인 도브로슬라프를 앞세워 반란을 일으켜 미하일로 2세를 타도한 뒤 도브로슬라프를 새 국왕으로 옹립했다. 그는 이후에 두클랴로 돌아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1113년, 자퀸타가 차남 도르제 보디노비치를 옹립하기 위해 두클랴 6대 국왕 블라디미르를 독살했다. 자퀸타는 지난날 장남 미하일로 2세를 폐위한 전력이 있었으며, 도르제 보디노비치가 왕위에 오르는 데 방해가 될 잠재적 경쟁자인 도브로슬라프 마저 체포해 감옥에 집어넣고 거세하고 실명형에 처한 뒤 슈코더르의 성 페타르 수도원으로 보냈다. 그 후 왕위에 오른 도르제는 잠재적인 왕위 경쟁자들을 모조리 제거하기 위해 친척들을 모조리 제거하려 했다. 이에 그루베샤, 드라기냐, 드라길로는 아드리아해 연안의 해안도시이자 동로마 제국의 요충지인 디라히온으로 피신해 그곳에서 망명 생활하던 삼촌 고지슬라프의 집에서 생활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루베샤는 도중에 체포되어 스칸다르에 감금되었다. 이 시기 그라디냐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1118년, 동로마 황제 요안니스 2세는 칼로얀 쿠만에게 군대를 맡겨 고지슬라프와 함께 두클랴를 침공하게 했다. 도르제는 이들과 맞서싸웠으나 패배하여 대다수 병력을 잃고 일부 측근만 데리고 라쉬카로 탈출했다. 그 후 동로마군은 스칸다르에 수감되었던 그루베샤를 풀어준 뒤 두클랴의 왕으로 세웠다. 한편, 도르제의 어머니 자퀸타는 동로마군에 체포된 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송된 후 그곳에서 사망했다. 그렇게 왕위에 오른 그루베샤는 7년간 나라를 다스렸지만, 1125년 세르비아 대공 우로시 1세의 지원을 받으며 두클랴로 진군한 도르제에 맞서다 바르 전투에서 전사했다.
도르제는 그루베샤의 두 형제 드라기나, 드라길로와 화해했고, 제타 일부 지역을 영지로 수여했다. 그러나 그루베샤의 또다른 형제인 그라디냐는 그에게 복종하지 않고 라쉬카로 피신했다. 얼마 후, 도르제는 우로시 1세가 친척들에 의해 지하 감옥에 보내지자,드라길로의 조언에 따라 자신을 복위하는 데 크게 기여한 우로시 1세를 구하겠다는 명분을 내걸고 라쉬카로 진군해 우로시 1세를 성공적으로 구출하고 복위했다. 그라디냐는 자후믈례로 탈출한 뒤 디라히온으로 이동했다. 이후 도르제가 블라디미르의 아들 미하일로와 드라길로를 체포해 감옥에 보내자, 이에 위협을 느낀 드라기나는 세 아들 프로보시, 그루베시, 네마냐와와 함께 디라히온으로 피신했다. 그라디냐는 디라히온으로 피신한 친족들과 함께 힘을 합치고 동로마 제국의 지원을 받아 두클랴를 침입해 브란지나 및 바르 일대를 공략했다. 하지만 동로마 제국군 수장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소환되면서, 모든 작전은 중단되었다.
그 후 그라디냐가 오블리크 요새에 머물자, 도르제는 요새를 즉시 포위해 공격을 퍼부었다. 그러나 디라히온의 새 스트라테고스로 부임한 알렉시오스 콘토스테파노스가 구원군을 이끌고 급습하자 크름니카로 피신했다. 이후 알렉시오스는 바르로 귀환하면서 그라디냐와 일부 병력을 오블리크 요새에 남겨줬다. 1131년 코토르에서 반란이 일어나 두클랴 전역으로 확산되면서 혼란이 심해지자, 그라디냐는 즉시 군대를 이끌고 공세를 벌였다.
도르제는 오볼론 요새에 숨었고, 그라디냐는 이 요새를 제외한 전역을 정복했다. 그 후 알렉시오스의 동로마군 마저 가세해 오볼론 요새를 압박하자, 도르제는 더 이상의 저항을 포기하고 항복한 뒤 디라히온 감옥에 이송되었다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송된 후 그곳의 지하감옥에서 옥사했다. 그 후 동로마 제국에 의해 왕위에 오른 그라디냐는 동로마 제국에 전적으로 의존하며 왕위를 10여 년간 이어갔다. 하지만 라쉬카와 보스니아 지도자들은 그의 권위를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라쉬카 대공 우로시 1세는 1130년 자기 딸 옐레나를 헝가리 왕위 계승자 벨러 2세와 결혼시킴으로써 헝가리 궁정과의 관계를 강화했고, 보스니아는 벨러 2세와 엘레나의 아들인 게저 2세의 통치를 받았다.
1143년, 그라디냐가 사망했고, 보자나의 성 세르지오와 바쿠스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사후 아들 라도슬라프 그라디슈니치가 동로마 황제 마누일 1세의 승인을 받고 집권했지만, 왕이 아니라 크냐지로서 계승했으며, 두 형제 로바르, 블라디미르와 함께 영토를 분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