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마의의 등장인물에 대한 내용은 숙휘공주(마의)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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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4153e><colcolor=#ffd400> 조선 효종의 왕녀 숙휘공주 | 淑徽公主 | |||
숙휘공주·정제현 합장묘 전경 | |||
출생 | 1642년(인조 20년) 3월 17일 | ||
사망 | 1696년(숙종 22년) 11월 21일 (향년 55세) | ||
조선 한성부 북부 순화방 창의궁 | |||
능묘 | 숙휘공주·정제현 합장묘 |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1-39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94153e><colcolor=#ffd400> 본관 | 전주 이씨 | |
부왕 | 효종 | ||
모후 | 인선왕후 장씨 | ||
부군 | 인평위 정제현 (寅平尉 鄭齊賢) | ||
자녀 | 슬하 2남 1녀 장남 - 정인상(鄭獜祥)[1] 차남 - 정태일(鄭台一) 장녀 - 조졸 | ||
봉호 | 숙휘공주(淑徽公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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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효종과 인선왕후의 4녀. 현종의 여동생이고, 숙종의 고모가 된다.2. 생애
2.1. 혼인
1653년(효종 4) 12세의 나이로 우참찬 정유성[2]의 손자이자 정창징의 아들인 정제현과 혼인하였는데, 숙휘공주의 가례 날은 하필 인조의 왕비 인열왕후의 기신(忌晨)이었다.[3]2.2. 논란
이때에 나라 살림이 썩 좋은 형편도 아니었지만, 왕실에서는 여러 공주들을 위해 재화를 아끼지 않았다. 효종 대에 공주가 나가서 살 집을 크게 지으니, 시할아버지 정유성이 집을 크게 짓지 말기를 간청하여 효종이 70여 간으로 줄여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마저도 국법에 명시된 것보다 크게 지었다.현종은 여동생 숙휘공주를 위해 군사 500명을 투입해서 집 수리를 시켰는데, 무더위에 군대를 동원해 일을 시키는게 말이 되냐는 비판을 받자 "이렇게 일할 곳이 많은데 5백명을 이틀만 일 시키는 것도 내가 생각해서 한 것"이라고 말했다.[4] 또 흉년이 극심하여 백성들이 죽었다는 보고가 잇달아 올라오는 와중에, 숙휘공주의 집을 짓겠다고 큰 공사를 벌여서 비판 받았다.
또한 평안남도 용강현에 적통지라고 하는 둑이 있었는데, 이 둑은 백성의 논 수천 두락에 물을 댈 수 있었다. 공주가 이 둑을 무너뜨리고 전답을 만들려고 하는 바람에 놀란 관찰사가 "백성들 위해 둑이 있으니 못하게 하라"고 왕에게 아뢴 일도 있었다.
2.3. 과부가 되다
1662년(현종 3) 남편 정제현이 세상을 떠났고, 1685년(숙종 11) 아들 정태일마저 세상을 떠났다. 이후 숙휘공주는 과부가 되어 살았다.그런데, 정제현이 죽기 전에 인평위 일가가 저주에 당했다는 의혹이 있었다. 공주의 시할아버지 정유성이 호남을 순찰할 때, 전주 기생 설매에게 빠져 첩으로 들였다. 설매가 들어온 뒤, 정제현이 갑자기 병을 얻어 일어나지 못하니 인선왕후가 저주를 의심한 것이다. 사람을 시켜 집을 파헤치게 했더니 땅에서 온갖 더럽고 요사스러운 물건들이 나왔다. 그래서 나인 예금 등을 고문했는데, 중간에 말이 바뀌는 등 증언이 오락가락 하였고, 15세의 어린 나이로 13차례나 고문을 받다가 죽었다. 기생 설매는 일이 발각되자 진작 독약을 먹고 죽은 상황이었으므로 더이상 얻어낼 것도 없었고 사건은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5]
3. 여담
- 《공사견문록》에 따르면, 숙휘공주는 당시 유행이었던 수 놓은 치마 한 벌을 갖기를 소원했다.
지금으로 치면 명품그래서 아버지 효종에게 간청했는데, 효종은 "임금은 검소함을 실천해야 한다"며 공주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대신 "나중에 너의 모친(인선왕후)이 대비가 되면 수 놓은 치마를 입더라도 허물이 되지 않을 테니, 참고 기다리라"고 했다.
4. 가족 관계
- 시부 : 공조정랑 정창징(鄭昌徵, 1615 ~ 1664)
- 시모 : 남양 홍씨(南陽 洪氏) - 홍익한(洪翼漢)의 딸
- 남편 : 인평위 정제현(寅平尉 鄭齊賢, 1642 ~ 16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