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왕녀 [[틀:조선의 왕녀/중종 ~ 철종|{{{#!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4px; background: #ffd400; border-radius: 3px; font-size: .8em"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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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4153e><colcolor=#ffd400> 조선 효종의 왕녀 숙신공주 | 淑愼公主 | |||
숙신공주묘 전경 | |||
출생 | 1634년(인조 12년) | ||
사망 | 1645년(인조 23년) 9월 21일(음력 8월 2일) (향년 12세) | ||
능묘 | 숙신공주지묘(淑愼公主之墓) |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서삼릉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94153e><colcolor=#ffd400> 본관 | 전주 이씨 | |
부왕 | 효종 | ||
모후 | 인선왕후 | ||
형제자매 | |||
시호 | 숙신공주(淑愼公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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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제17대 국왕 효종과 왕비 인선왕후의 장녀.2. 생애
1634년(인조 12), 국왕의 둘째 아들인 봉림대군과 그의 부인 풍안부부인 장씨 사이에서 태어났다.1637년(인조 15), 네 살이 되던 해에 부모는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끌려갔지만 숙신공주는 동생 숙안공주와 함께 조선에 남아 궁궐에서 인조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다.[1][2]
1645년(인조 23) 9월 21일, 12세의 나이에 병으로 요절하였다.
사망 당시 아버지가 아직 왕위에 오르기 전이라 공주(公主)가 아닌 군주(郡主)의 신분에 맞는 예법으로 염장되어야 했지만, 숙신공주 사망 이전에 군주를 염장했던 예시를 전혀 찾을 수 없어서 《대전(大典)》에 기재된 정2품 관원 치상의 예에 따라 염장되었다.[3]
2.1. 사후
숙신공주 증직 교지 |
3. 가족 관계
4. 유물
'''銀製 果實文 化粧壺''' |
- 숙신공주의 묘에서 출토된 화장용구. 뚜껑 윗면에는 학이 조각되어 있으며, 몸체에는 여지, 석류, 복숭아, 감 등으로 보이는 과일의 가지를 각각 네 부분에 나누어 배치하였다. 입구에는 연꽃잎을 두르고 바탕에는 구슬 무늬를 정교하게 새겨 넣어 매우 화려한 느낌을 주고 있다.
'''銀製 鉛入絲 仙境文 化粧壺''' |
- 마찬가지로 숙신공주의 묘에서 출토되었으며, 은으로 만든 작은 화장용기다. 마치 한 폭의 산수화를 보는 듯한 절경과 선인들이 소나무 아래에서 장기를 두는 한가로운 모습이 자연스럽게 표현되어 당시의 뛰어난 미적 감각과 금속공예 기술을 엿볼 수 있다.
5. 기타
지난해 나는 사랑하는 딸을 잃었는데, 올해 그대의 집 또한 사랑하는 아이를 잃었다.
우리 양가(兩家)의 딸들은 비범한 아이들이건만, 지금 홀로 된 영혼은 어디에 있는가?
(중략)
이미 엎질러진 물은 되돌릴 수 없고, 이 가련한 이별은 또다시 일어나선 안될 것이다.
효종 답시(御韻)
우리 양가(兩家)의 딸들은 비범한 아이들이건만, 지금 홀로 된 영혼은 어디에 있는가?
(중략)
이미 엎질러진 물은 되돌릴 수 없고, 이 가련한 이별은 또다시 일어나선 안될 것이다.
효종 답시(御韻)
[1] 깊은 궁궐에서 생장한 지 12년의 세월 동안 지존(인조)께서 예뻐하여 총애 유독 깊었었네 - 《군주(郡主, 숙신공주)에 대한 만사》[2] 공주는 효종대왕의 첫째딸로,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병자호란을 만나 험난한 순간에 겨우 온전할 수 있었습니다. 효묘(孝廟, 효종)께서는 대군으로 심양(瀋陽)에 나가셨고, 공주는 부모와 헤어져 의지할 곳을 잃었습니다. 인묘(인조)께서는 이를 가엾게 여기시어 궁중에서 거두어 기르셨습니다. -《돌아가신 할머니 숙안공주 가장(祖妣淑安公主家狀)》[3] 조선왕조실록 인조 23년 8월 2일 신사 3번째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