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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대체 산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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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3. 단점4. 대한민국의 사례5. 관련 문서

1. 개요

수입 대체 산업화(輸入 代替 産業化 / Import Substitution Industrialization, ISI)란 원조,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재화를 국내에서 생산하도록 이끄는 것을 말한다. 말 그대로 수입을 대체하기 위해 관련 국내 산업을 활성화시키는 것이다. 수입 대체, 수입 대체 전략이라고도 한다.

2. 역사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전쟁 상태를 맞아 국제적 무역 시스템이 경색되었고 전쟁 상태에서 적대국으로부터 자원 수급이 막힌 각국은 적대국이 생산하던 자원을 생산하기 위해 자급자족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1차 대전 당시 경제 호황을 맞았던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전쟁 이후 유럽의 생산력이 복구되자 수출하던 상품이 남아돌게 되자 높은 관세, 무역 수량 제한 등의 보호 무역적 경제 정책을 해법으로 꺼내 들었다. 스무트-홀리법(Smoot-Hawley Tariff Act)에 의하면 관세율이 무려 59%에 달했고 결국 대공황을 발발시켰다. 같은 시기 남미 국가들도 이러한 경제 이론에 영향을 받았으며 동시에 남미 국가들은 종속 이론을 수용하여 자신들이 수출하는 상품이 약탈당하고, 수입하는 상품이 폭리를 취한다고 생각하여 수입 대체 산업화를 주 전략으로 채택했다. 재미있게도 당시 이 정책은 상당히 성공적이었는데 왜냐하면 1차 대전이후 곧바로 2차 대전이 발발하면서 국제적 무역 시스템이 또 붕괴되었었기 때문이다. 영국, 미국공산품 대신 군수품 생산하기 바빴고 바다를 봉쇄당한 나치 독일은 말할 것도 없었다. 곡창 지대인 프랑스, 동남아시아, 우크라이나가 전장의 한복판이 되어서 국제 곡물가는 하늘을 치솟았고 군수품의 원재료를 생산하던 남미는 크게 부유해졌다. 이 시기 아르헨티나팜파스 곡창 지대의 농업 생산력을 기반으로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기도 했다.

이러한 수입 대체 산업화는 2차 대전 이후 독립한 국가들도 채택하였고, 1960년대 초까지는 라틴 아메리카 일대에서 성과를 냈지만 전쟁 상황이 진정되고 국제적 교역이 복원된 이후 1960년대 중반기부터 점차 한계를 보이기 시작했다. 제조업 대국이던 영국, 미국, 독일 등의 서방 국가들이 만들어낸 고품질의 상품들이 세계 시장에 다시 쏟아지자 조잡한 기술력에 비싼 자국산 원재료를 쓰는 자국 공산품들은 부실한 품질 관리와 그로 인한 신뢰도 하락과 맞물려 국내 소비자들에게 외면받고 수익성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여기에 동남아시아우크라이나의 기근 상황도 해결되고 수리 시설들이 전후 복구되면서 농산물 가격도 급락하면서 수출액도 급전직하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무역 수지가 크게 악화되고 외채는 악화 일로를 걸었는데 이를 타개하기 위해 많은 외채를 빌려서 자국의 공업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세계 최대의 곡창 지대를 가진 남아메리카가 이 외채를 가지고 우크라이나에게 소련이 한 것처럼 수리 시설 확충과 경지 정리 산업을 한 게 아니라 공업을 육성하려고 하다가 실패를 한 것이 화근이 되었다. 가뜩이나 농산물 수출액 감소로 무역 수지가 악화된 마당에 국산화 실패와 품질 문제로 기계를 수입에 의존하면서 무역 역조 현상이 심화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생산성이 꾸준히 악화하면서도 어떻게든 외채를 빌려 꾸역꾸역 막던 좀비 기업들은 외부 충격에 대한 자생력이 있을 리 없다. 그러던 중 오일 쇼크가 발생. 전 세계에 공급 충격이 강타했다. 오일 쇼크 때문에 심각한 스태그플레이션이 발생하자 이를 끝내기 위해 폴 볼커 연준 의장이 20%에 달하는 대대적인 금리 인상을 단행했다. 미국 금리가 급격히 상승하면서 경기가 둔화되기 시작했고 그나마 1차 산업이 수익을 내가면서 버텨가던 상황에 중남미에 투자한 미국 투자자들이 급히 자금을 회수하며 유동성이 말랐다. 거기에 고금리 때문에 경기가 침체되자 자원 소비가 줄어들자 자원 가격이 바닥을 치게되고 1982년을 멕시코를 시작으로 중남미 각 국가에서 폭등한 금리로 인해 불어난 엄청난 외채 상환 문제에 시달리게 되었다. 중남미 각국은 IMF의 금융 구제까지 받기에 이른다. 이때를 기점으로 수입 대체 산업화 정책도 막을 내리게 되었다.

대부분의 중남미 각국에서 국가 주도로 설립된 많은 기업들이 헐값에 외국 기업에 매각되었다. 외국 기업들은 다국적 기업들이었고 당연히 남미의 값싼 노동력을 이용하려고 들어온 것이라, 높은 기술력과 세계 각지의 원자재 산지에서 최적화된 상품 판매 물류 운송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이에 대한 반발한 남미 각국들은 이를 재국유화하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하기도 했지만, 이런 짓을 하면 상품 판매 경로와 원자재 수입로, 기술 도입도 막히기 때문에 황금 알을 낳는 거위 배를 가르는 짓이나 다름이 없었다. 수입 대체 산업화의 실패로 국가 실패 상태로까지 빠진 90년대 당시의 남미 지역의 경제 성장률은 형편없었고 그야말로 국가가 외국 기업들에게 넘어가는 상태로까지 치달았으며 국가 구성원 전원이 평등하게 가난해졌다.

이때의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아 이후에는 남미 각국은 투자를 자원 개발 쪽에 몰아서 상당한 성과를 이룬다. 특히 2000년대는 중국이 세계 원자재 수요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며 성장하던 시기라 라틴 아메리카의 두 번째 "황금기"를 이룩하였다. 그러나 중국의 경제 성장률이 둔화하기 시작한 2014년 이후로 자원값이 하락하며 다시금 침체기의 위기에 빠졌다. 하지만 2010년 호황기 때 얻은 국부를 "자원 개발 산업"의 건전성과 발전을 유지할 정도의 자금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복지에 낭비한 바보도 있었으니 그게 현재 헬게이트가 열린 베네수엘라다. 칠레에콰도르는 그나마 이번에는 옆 나라처럼 되지 않았고, 볼리비아우유니 사막 개발처럼 앞을 내다본 투자를 통해 전기 배터리 산업을 지배하는 등, 침체기이지만 성장세를 유지하고 있다.

3. 단점

현대 경제 정책인 것처럼 생각할 수 있으나, 어디까지나 중상주의에 민족주의 등을 결합한 현대 버전이다. 대개 비교 우위에 따른 국제 무역 자체를 적대적으로 인식하고 있으므로, 무역량을 줄이기 위해 자급자족을 꾀하는 공산주의자연주의 사상가들에게 열정적인 인기를 끌었으나 추구하는 목적이 중상주의와 다를 바 없다. 수입 대체 산업화가 인기를 끌었던 이유도 외국에서 우리 자원과 생산품을 뺏어 간다고 생각해 자급자족을 지향하려는 목적으로 한 것이었으니 이것도 중상주의와 완벽하게 똑같다.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측에서 일종의 국영화 또는 무역 장벽 같은 것으로 수입이 줄어들기 때문에 외화를 절약할 수 있고, 국내 산업을 보호할 수 있기 때문에 만성적인 무역 적자를 보고 있는 경우 국제 수지의 불균형을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 수요가 있는 시장을 대상으로 생산력, 고용을 늘리기 때문에 위험, 비용이 적다. 또한 산업 시설이 구축되어 있다면 전후방 연관 관계를 모두 발현시키기 쉽다.라는 것인데 실제로는 기대한 효과와 정반대의 결과가 나왔다. 어찌 보면 공산주의 등장 이전의 중상주의보다도 못한데 중상주의는 최소한 수출 산업을 육성하기라도 했다.

당연히 비교 우위에 따른 무역 진흥에 정반대의 목표가 펼쳐져 있으니 산업 침체와 산업 경쟁력 감소, 생산량 감소가 발생하고, 자국이 비교 우위 한 상품 개발에 들어가야 할 자원을 해봐도 안 되는 산업에 투자하게 된다. 예를 들어 우크라이나처럼 자국에 방대한 농지가 펼쳐져 있다면 미국같이 농사를 최대한 효율화하면 되는데 굳이 자국에서 모든 공산품을 생산하기 위해 수리 시설이나 비료 공장을 지을 돈으로 자동차 공장을 짓게 된다면 딱 봐도 느끼겠지만, 경쟁력 부족으로 망하기 쉽다.[1]

현실의 아르헨티나의 예시를 보면 이미 목축업에서 전 세계적 경쟁력을 가지고 있었으니 공업을 발전시킨다면 쇠고기 통조림, 육포 가공, 쇠가죽 피혁 생산 등 연계 산업을 발전시켜 세계 목축 가공품 시장의 파이를 점유하고 그 재원으로 필요한 물품을 수입하는 것이 당연했다. 고품질의 쇠가죽 피혁이 인정받으면 그 다음은 세계 제일의 좋은 원료를 쓴다는 마케팅을 통해 가죽 패션 산업을 육성하는 등, 강점을 십분 발휘하여 경쟁력을 갖춘 산업을 육성하는 게 상식이다. 그러나 아르헨티나는 수입 대체 산업화를 채택했기에 목축업은 자국 소비를 충분히 충당하고 있으니 목축업과 관련 산업에 전혀 투자를 하지 않았다. 수출은 곧 헐값에 약탈당하는 것이고 서민들의 식품 물가가 상승하고 과잉생산을 촉발한다고 본 것이다. 이 때문에 현재까지도 낮은 생산비와 높은 품질의 소를 키우면서도 세계 시장에서 아르헨티나산 쇠고기와 소 관련 상품들은 영향력이 거의 없었다.[2] 외채로 빌려온 돈은 경쟁력 하락으로 외화 유출이 진행되고 있는 소비재 산업에 투자를 했는데 최종 생산품은 아르헨티나산이지만 원료와 기계는 전부 외국산이었다. 국가경제 발전에 중공업을 고집할 필요가 없는것이 노르웨이는 어업과 석유, 뉴질랜드나 호주는 목축과 농업 자원 개발업 위주로도 아무 문제 없이 국가 경제를 키워나갔다. 심지어 뉴질랜드는 1차 산업으로 선진국이 된 유일한 국가로서, 웬만한 선진국은 다 주는 농업 지원금도 없다.

실제로 20세기 중후반 아르헨티나의 경제는 위 문단의 설명을 그대로 따라갔다. 1940년대부터 수입대체산업화를 추진한 결과 겉으로 드러나는 경제지표 상으로 아르헨티나의 경제는 분명히 성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는 근본적으로 1차산업에 의존하는 경제구조에서 탈피하는데 실패했다. 1976년 아르헨티나 쿠데타 직전인 1975년에도 아르헨티나의 최대 수출품은 옥수수, 밀가루, 쇠고기와 같은 농산물과 축산물이 수출의 3/4에 달했다. 더욱이 아르헨티나는 농업 외에 경쟁력이 있는 산업을 창출하는데 실패했다. 제조업 부문의 국영 기업들은 정부가 설정해준 높은 수입관세와 고정가격, 막대한 보조금 정책에 의지한 채 돈만 퍼먹는 하마가 되었고 국제적 경쟁력이라고는 전무한 상태였다. 공산품 수출을 한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농축산물을 수출한 돈으로 인센티브를 지급하여 공산품을 수출하는 기형적인 형태였으므로[3] 겉보기엔 화려할지 몰라도 농업과 축산업에서 올린 이익이 공업화 정책으로 약탈당한 결과 농축산 기술의 구식화로 농업과 축산업의 경쟁력이 서서히 뒤처졌고, 아르헨티나 경제의 기초 체력도 서서히 부실해져가고 있었다.[4] 무리한 국유화로 국제사회에서 고립되고 수입대체산업화가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하자 아르헨티나의 경제적 몰락은 가시화되었고, 경제난도 사회혼란도 해결하지 못한 페론주의 정권은 1976년 군사 쿠데타로 타도되었다.

대공황을 이끈 스무트 홀리 관세법에서 찾아볼 수 있듯이, 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소비 시장을 가지고 있었던 그 미국마저도 자국 소비 시장만 가지고는 완벽한 고립계로 규모의 경제를 갖출 수 없었다. 경제에서는 어디까지나 성장률을 1순위로 중시하기 때문에 아무리 내수 규모가 커도 무역으로 인한 이득을 완전히 상쇄할 수 없다. 또한 최종재에만 중점을 둘 경우, 오히려 중간재 수입이 늘어남에 따라 되려 외화 수급의 불안을 야기할 수 있다.[5] 실제로 중미 니카라과, 과테말라, 엘살바도르, 온두라스의 주력 산업인 의류 섬유 산업은 해외에서 원사와 원단을 수입 및 가공해서 완제품으로 만들어 바이어에게 넘겨주는 방식의 사업 방식이 고착화되었는데, 때문에 원자재와 부자재의 가격 상승과 같은 대외 악재에 대단히 취약한 편이다.

4. 대한민국의 사례

수입 대체를 실시한 시기는 1960년대이며[6], 제2공화국에서부터 계획이 수립되었고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등처럼 이후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에서도 기조 자체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때 시멘트, 비료, 식량, 자동차, 무기 등 다방면에 걸쳐 국산화를 추진, 장려하였다.

6.25 전쟁 이후 대한민국은 건물, 산업 시설, 사회 간접 자본을 재건, 확장해야만 했고 이에 따라 건설 자재의 수요 급등은 필연적인 사실이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건설 자재들 대부분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다. 이에 이승만 정부 시절 핵심 건설 자재인 시멘트 국내 생산을 추구하여 UNKRA(국제연합한국재건단)의 도움을 받고 연산 20만 톤 규모의 문경시멘트 공장을 건설하게 된다. 이후에도 기조는 유지되어 1962년부터 쌍용양회 영월공장[7], 한일시멘트 단양공장[8], 현대시멘트 단양공장[9], 아세아시멘트 제천공장[10], 동양시멘트 삼척공장[11], 쌍용양회 동해공장[12] 등이 연이어 세워졌다.

해방 이후 농업 국가 한국은 흥남비료공장이 북한에게 넘어가게 되어 화학 비료를 전량 해외 수입에 의존하게 되었다.[13] 이에 이승만 정권은 미국 해외 개발처(AID) 차관과 내자를 투입하여 세계적 규모의 제1비인 충주비료공장[14]을 건설토록 하였다. 이는 1959년부터 시운전에 들어갔으며, 1963년부터 연간 요소 8.5만 톤을 생산하기 시작했는데 당시 연간 국내 수요의 1/4에 이르는 규모였다. 1963년에는 제2비인 나주 호남비료공장[15]이 가동되기 시작하였으며, 1967년에 이르면 제3비인 영남화학 울산공장[16], 제4비인 진해화학 공장[17], 제5비인 한국비료 울산공장[18] 그리고 용성인비 생산 시설을 갖춘 풍농비료[19]가 잇따라 완공되어 가동에 들어갔다. 그 결과, 1967년 질소 자급률 41.9%, 인산 자급률 12.6%, 칼리 자급률 5.3% 등 국내 자급률 25.3%를 달성하며 국내 연간 생산량 113.2만 톤을 기록하였고, 1970년, 마침내 국내 생산량이 국내 비료 연간 소비량을 초과하게 되었으니 이는 1962년에 비해 성분 중량 기준으로 20배 가까이 늘어난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정부는 1971년 통일벼 보급에 따라 일시적으로 비료 수요가 급증하는 호재 속에서 수출 보조금 지급 등을 통해 잉여 비료 수출 활로를 모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과잉 생산을 해결할 만한 물량 확보에 실패하였으며, 합작으로 설립한 회사로부터 인수해야 하는 비료의 인수 가격이 높다는 점과 합작상의 계약 불리(일정량을 의무적으로 인수, 그렇지 못하면 정부는 수출 보상금을 지급) 문제에 직면하여 제1차 석유 위기와 함께 생산 위축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당시 정부는 증산을 멈추지 않았고, 제6비인 충주 공장[20]과 제7비인 여수 남해화학 공장[21] 등을 뒤이어 건설하고 1974년부터 자체적으로 유안을 생산하는 등 질적 개선을 꾀하였다. 그 결과 1970년대 후반, 대한민국은 연산 실중량 300만 톤, 성분 중량 100만 톤 이상의 화학 비료 생산 능력을 갖추게 되었으며 이는 1970년대의 것보다 각각 갑절을 웃도는 것이었다. 1980년대 들어 신군부 정권은 이것의 수출 경쟁력이 없고 국내 수요에 비해 너무 과다하다고 판단하여 1981년 제1차 비료 산업 합리화 계획을 수립, 실시함으로써 연간 80.3만 톤 수요로 하향 조정 하였다. 이에 따라 계약 만기에 맞춰 영남화학 제1공장(진해화학)[22]을 폐쇄하고 영남화학과 남해화학을 불하하였으며 제6비인 충주비료공장이 매각되어 폐쇄되는 등 대대적인 감축이 이루어졌다.

자동차공업 통합조치도 동기는 비료산업 합리화와 똑같다. 과잉투자 상태에 있던 한국 자동차 기업들의 합병을 시도했다가 생산 차종에 대한 규제가 이루어지는 선에서 구조조정을 했는데, 경제학적 관점에서 보면 각 기업별로 생산차량 특화를 '억지로' 시킨 것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한국 자동차산업의 붕괴만은 막아냈다.

2019년 한일 무역 분쟁이나 2021년 요소수 대란 당시 안보 차원에서 해외 공급망에만 의존하기보다는 경제성이 다소 떨어지더라도 일정 부분은 국산화가 필요하다는 분석이 있었다. 이후 수입이 규제됐었던 불화 수소·포토레지스트·불화 폴리이미드 등의 국산화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5. 관련 문서



[1] 다만 항공사업이나, 전차 같은 무기 생산은 어느정도 경쟁력이 있는 편이지만, 사실상 소련의 유산이었기 때문에 그나마 경쟁이 가능한 것.[2] 세계 3대 곡창 평원, 팜파스 덕분에 쇠고기의 품질이 좋으면서 가격도 매우 저렴하다. 풀만 먹이기 때문에 사룟값은 아예 안 들며 관리를 안 하니 무항생제다. 저렴한 땅값과 인건비로 드넓은 초원에 방목하기 때문에 원가가 세계에서 가장 낮다. 소만 넘쳐나는 게 아니라 포도, 사과, 밀 등 그냥 뭐든지 잘 자란다. 파인 다이닝에 납품되는 최고급 쇠고기가 100그램에 700원, 성인 남성 주먹보다 큰 사과가 한 개 150원이다. 그런데 그걸 외국으로 수출할 수 있는 냉동 운송 인프라가 부실해서 수출을 못 한다. 물가가 저렴하니 좋겠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걸 생산하는 농부들에게는 비싼 값에 수출할 수 있는 기회를 날려버리는 셈이다. 그걸로 외화를 가져오면 아르헨티나의 고질적인 외화난도 해결할 수 있었을 것이다.[3] 공산품이 품질도 가격도 경쟁력이 제로이니 가격이라도 경쟁력을 갖추려면 기업에 손해분에 해당하는 보조금을 줘서라도 헐값에 팔아치워야 한다. 실제로 정부는 승용차 수출로 벌어들인 1달러마다 0.80달러의 인센티브를 지급했다. 그런데 그 인센티브 줄 돈이 어디서 나왔을까? 공산품을 손해보고 팔아치우는 판에 실질적으로 유일한 외화소득원인 농축산업이다.[4] FAO 자료에 따르면 1961년과 1975년 사이 아르헨티나의 밀(wheat) 생산량은 50% 성장에 그친 반면에 같은 시기 프랑스는 57%, 미국은 73%, 캐나다는 121%, 브라질은 228%나 증가했다. 옥수수(maize) 생산량도 아르헨티나는 59% 성장에 그친 반면 미국은 62%, 브라질은 81%, 프랑스는 231%, 캐나다는 391% 증가했고, 뼈 있는 쇠고기(Meat of cattle with the bone, fresh or chilled) 생산량은 아르헨티나가 14% 성장한 반면 프랑스는 21%, 미국은 52%, 브라질은 58%, 캐나다는 66% 성장했다. 아르헨티나는 시간이 갈수록 농업에서 지닌 패권적 지위를 잃어가고 있었던 것이다.[5] 출처: 최상오, 외국원조와 수입대체공업화.[6] 그 전에도 시도는 있었지만, 이에 대해서는 상당한 비판이 있다. 해당 문서 참고.[7] 1962. 9. 7. 기공, 1964. 4. 준공[8] 62. 11. 20. 기공, 1964. 6. 20. 준공[9] 1964. 7. 준공[10] 1966. 12. 13 준공[11] 1967. 4. 24. 준공[12] 1968. 10. 31. 준공[13] 남한에도 소규모 공장이 있었으나 원자재 조달 등의 문제로 작동이 불가능했다. 1946~1947년 GARIOA로 유안, 초안, 과석, 염화가리 등 총 31만 톤을 긴급 지원 받았고, 1948년도에는 46만 톤을 수입한다.[14] 1955. 9. 착공, 1961. 4. 준공[15] 1954. 계약 체결, 1958. 착공, 1962. 12. 28. 준공, 현 LG화학.[16] 1964. 11. 29. 기공, 1967. 3. 14. 준공 현 동부한농화학.[17] 1965. 5. 2. 기공, 1967. 4. 준공, 1999년 폐쇄.[18] 미쓰이물산과 합작, 1967. 4. 20 준공. 현 롯데정밀화학.[19] 일본으로부터 외자 도입.[20] 1973. 10. 26. 준공[21] 1973. 10. 기공, 1977. 8. 4. 준공[22] 계약기간 만료인 198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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