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SBS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의 탐구 내용을 정리한 문서.2. 극중 연도?
드라마의 극중 시점은 셋 중 하나다, 하나는 세종 24년~25(1442년~1443년), 하나는 세종 26년(1444년), 마지막 하나는 세종 28년(1446년)이다.[1]세종 28년의 경우 두 번째 예고편 영상에도 그렇게 나왔고, 극중에서 정기준이 밀본의 첫 회합 자리에서 "삼봉 선생께서 도적 이방원에 의해 돌아가신지 어느덧 48년"이라는 대사를 한다. 정도전은 1398년에 일어난 1차 왕자의 난으로 죽었으니 계산하면 극중 시점은 1446년이 맞다. 다만 이렇게 연도가 설정되면 역사적인 팩트가 엄청나게 꼬이는 부분이 상당히 많아서 문제가 된다.
세종 24~25년으로 본 것은 7화 심종수가 혜강 선생을 만날당시 "45년전 삼봉 선생에게 한 맹약을 지킬 때가 되었다"이라는 대사를 해서다. 세종 28년에서 45년전은 삼봉이 칼에 맞은지 3년이 지난 시점이므로 이 대사대로라면 적어도 세종 25년이거나 그 이전이라는 소리가 된다.
1444년이라 함은 최만리가 한글창제 반대 상소를 올리던 해의 일이며 작중에서 최만리가 상소를 준비하는 장면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또 밑에서도 나오지만 이순지가 칠정산 외편을 만들고 있는 발언을 하는데 사실 칠정산외편은 1444년에 완성을 보았다.
또 4화에서 세종이 이미 세자(후일의 문종)에게 하례 등을 맡겼음에도 자신을 번거롭게 한다고 따지고 있는데, 세자가 세종의 대리청정을 맡은 시기는 세종 24년(1442년)부터다. 5화에서 집현전 학자들이 삼각산 진관사에서 사가독서를 했다는 얘기가 나오는데 이 또한 1442년의 일이며, 김종서가 함길도 변경에서 돌아오는 장면이 4화에서 등장하는데 김종서는 1435년부터 함길도 도관찰사와 병마절도사를 겸하며 이후 7년간 북방의 경계와 수비를 맡았는데 임기를 마치고 올 무렵이 1442년[2]이다. 1446년설을 채택할 경우 김종서가 1445년에는 충청, 전라, 경상 3도의 도순찰사로 있다가 1446년 의정부 우찬성에 제수받기 때문에 드라마 상황상 맞지 않는다. 시대상으로 놓고 본다면 이 설을 도입할 시 꼬이는 부분이 얼추 맞아 떨어진다. 8화에서 가부조사 시행이 13년전이라 했는데 이는 세종 12년에 있었던 일이니 역산하면 1443년이 된다.
사실 따지기도 뭣한 게 드라마에선 정기준이 세종이 내불당을 지었다는 이유로 디스하는데 이 내불당이라는게 1447년에 지어진 것이다. 그 전의 내불당은 세종 15년인 1433년에 혁파되어서 신하들의 지지를 받았다. 상식적으로 불교 관련으로 디스할 거였으면 차라리 1442년 3월에 있었던 흥천사 사리탑 경찬회를 까는 게 나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스님만 1만 8천 명이 왔다고 하니까. 이런 건 퓨전 사극이라 어쩔 수 없을지도? 어쨌든 이쯤 되면 시청자들이 생각하기 나름이다.
3. 나름 반영을 잘 한 부분
퓨전 판타지임에도 어느 부분까지는 현실 반영에 신경쓰려는 티가 났다.*
- 13화에서 세종이 소이에게 분노하여 집어던지는 여러 기기들의 모형들조차도 원형에 가까운 재현도를 보이고 있다.
- 환도 파지법도 올바르게 나왔다.
- 2011년 12월 7일 20화 방영분에서 광평대군이 사망했다. 그런데 실제 역사 속 광평대군은 1444년 12월 7일에 사망했다. 약간 애매하긴 하지만, 극본가들이 나름대로 퀄리티를 신경쓰고 있다는 걸 알려주는 거라 할 수 있을 듯하다.
- 만주어가 나왔다. 영화 천군과 최종병기 활에서 나온 뒤로 처음인데 드라마상으로는 만주어가 나온 것이 최초가 아닌가 싶다. 견적희가 부하와 대화하는 과정에서 나왔는데 근지가 만주어를 알아서 다 알아들었다는 설정.
4. 현실 반영 오류
위에 언급한 몇몇 장면을 제외하곤 전부 오류라고 봐도 무방하다. 애초에 정통 사극이 아니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첫화 방영분에서 주인공 채윤의 신발의 고무 밑창이 화제가 되었다.조선의 과학기술력 무휼은 크라운도 씌우고, 4대 본원쯤 되면 시대를 앞서 찍찍이도 입는다. 세종(한석규 분)을 비롯한 몇몇 주연들이 수염은 허옇게 세었는데도 주름은 하나 없이 어색한 장면도 걸린다.
그리고 이후에도 잘 보면 이 밑창을 최대한 보여주려고 하진 않지만 여전히 고무 밑창을 쓰고 있다. 하지만 이 부분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한 게 시대 반영을 위해서 배우 발을 다 아작낼 수는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서는 넓은 아량으로 넘어가야 할 부분이다. 등자가 없었던 고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에 등자가 나오는 것과 비슷한 경우인 셈이다.
- 극 중 배경이 조선 초기임에도 불구하고, 남자들이 쓰고 다니는 갓의 형태가 죽립이 아닌 흑립인데, 이 흑립은 조선 성종 대 가서야 나오는 형태의 갓이다. 그 전까지는 다소 몽골풍 영향을 받은 대나무로 만들어진 죽립을 많이 쓰고 다녔는데, 같은 시대적 배경의 사극인 대왕 세종 및 뿌리깊은 나무의 프리퀄인 육룡이 나르샤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밖에 극 중 소이를 비롯한 여인네들이 입고 다니는 저고리의 길이가 조선 초기치고는 상당히 짧은 편인데, 그 정도 길이의 저고리는 17세기쯤은 돼서야 나오는 저고리의 형태이다. 임진왜란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고려 시대 저고리의 모습이 유지되어 엉덩이 바로 위까지 내려오는 길이의 저고리를 입었다.
- 초반 극적인 재미를 위해 태종과 세종 사이를 좀 손봤다. 실제로는 태종은 세종대왕을 굉장히 총애하였고[3] 극중 나오는 세종과 태종의 사건들은 모두 실록엔 나와 있지 않다. 양위 문제로 군사들을 궁에 소집한 적도 있지만 그건 세종이 즉위하기 전이었고 대낮에 벌인 퍼포먼스였다.
또한 태종의 심복들은 물론이고 세종의 사돈인 심온까지 죽이는 대대적인 숙청은 결국 왕권강화로 이어졌고 이게 세종이 자기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도록 하게 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자세한 내용은 태종과 세종대왕 항목을 참조하기 바람.2011년 10월 28일자 조선일보 오피니언에서 '사극, 역사 왜곡해도 너무 한다'라는 논설으로 이 점을 대차게 까댔는데, 까라는 막장은 안 까고!
- 밀본이 정무군이라는 군대(사병)를 가진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18화에도 정무군을 동원해 습격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는데 일단 한양 방어를 하는 1만명을 뚫고 전국에서 모인 상비군 10만여명을 이겨내고 임금을 습격한다면 엄청난 군대를 동원해야 하는데 ...? 그리고 실제 인물 정도전은 사병을 혁파하는데 앞장선 인물이다. 그의 조카가 그정도 군대를 가지고 있다면 자기 큰아버지의 뜻을 거스르는 행위다.[4] 애초에 밀본이라는 정도전 자신만의 비밀조직을 만들 수가 없다. 대놓고 반역질을 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후에 육룡이 나르샤에서 밝혀진 바로는 정도전이 요동 정벌을 마음먹을 때 정도광이 밀본을 이용해 요동정벌 지지 여론을 형성하려고 하자 그런 그를 호되게 나무라며 밀본을 뒤에서 정치질이나 하려고 만든 게 아니라며 오로지 민본을 위해 만든 비밀조직임이 밝혀졌다. 그러니까 후대에 심각하게 왜곡된 것. 애초에 정도전이 조선을 사대부의 나라로 설계한 것도 왕의 폭주를 견제하기 위해서지 자기들이 다 해쳐먹으라고 설계한 게 아니다. 게다가 밀본은 그런 힘이 있는 사대부를 백성으로부터 보호하고 견제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것도 밝혀졌다.
그것 외에도 정도전을 깐다고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꽁했다 카더라
- 엔딩에서 아이들이 바닥에 써놓은 글 역시도 반영 오류라면 오류랄 것이 있다. 사진 '어엿비'는 당시 국어에서 '불쌍히' 정도 의미를 가진다. 현대어의 어여삐와는 다른 뜻. 훈민정음 서문과 연계시키려는 말장난이겠지만, 어쨌든 '뿌리깊은 나무를 불쌍히 여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로 보일 소지가 다분하다. 차라리 어여삐보다는 됴히를 써서 좋게로 쓰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싶다.
- 이 드라마에선 강채윤, 정기준 등이 심심하면 세종을 휘인 이도로 부른다. 아무리 역심을 품었다지만 성인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 자체가 예가 아니라며 자와 호를 쓰던 시절에, 그것도 왕의 이름을 옆집 개 이름 부르듯 부르는 건 빼도 박도 못할 현실 무시다. 피휘 항목 참조. 다만, 정기준 입장에서 본다면 세종이 충녕대군이었던 시절에 직접 만나 이때부터 왕을 포함한 왕족들 자체를 깔보는 듯한 모습을 보였으며 정기준은 세종을 새로운 글자를 만들어 조선의 성리학과 사대부 체계를 무너뜨리려는 반동분자로 생각하기 때문에 일말의 존경심 따위 없었을 것이다. 이 작품의 영향인지 이후 퓨전사극들에선 임금의 휘를 사람들이 막 부르는 장면이 종종 나온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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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중 인물인 카르페이 테무칸의 출신지가 조선에서 한참 전인 통일신라 시절에 망한 돌궐이란 것이다. 차라리 그가 여진족, 북원이나 사하인 출신이라는 게 훨씬 설득력있다.
솔직히 야쿠트도 좀 무리수이긴 하다.물론 돌궐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 후에도 전근대 한자문화권에서는 튀르크계 민족들을 총칭하는 말로 돌궐이라는 표현을 썼기 때문에 카르페이 테무칸이 돌궐인으로 불리는 것 자체가 완전히 틀린 건 아니다. 다만 카르페이 테무칸 본인은 자신이 돌궐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조선인들에게 일방적으로 돌궐인으로 불린다고 설정했으면 더 정확했을 것이다.
[1] 참고로 원작 소설 배경은 1443년 12월이다.[2] 변경에 머물게 하면서도 1440년부터는 병조판서를 겸직했으니 세종이 그를 상당히 신뢰한 사실을 알 수 있다.[3] 세종뿐 아니라 자식들을 굉장히 아꼈다. 오죽하면 막장 of 막장인 양녕대군 폐위 당시에도 밤에 눈물을 펑펑 흘렸다고 한 기록이 남아 있다.[4] 사실 정도전에 대한 표현의 오류가 이것저것 따지자면 많다. 그는 사대부의 세상을 만들려고 하지 않았다.(이미 조선은 사대부의 세상이기 때문). 아니, 애초에 뼛속까지 성리학자였던 정도전은 밀본이란 조직을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민본사상을 강조해 백성들에게 농사지을 땅을 나눠주는 무상토지분배(!)도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후대가 정도전의 생각을 잘못 해석하거나 권력쟁탈을 위해 일부러 곡해하는 것으로도 생각할 수 있다.[5] 여담이지만 임금 본인이 자신의 휘를 언급하는 것은 당연히 반영 오류가 아니다. 대왕 세종에서 태종이 자신의 이름인 이방원을 언급한 것과 장옥정, 사랑에 살다에서 숙종의 독백에 숙종 본인의 이름인 이순이 나온 것이 반영 오류라는 비판을 듣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6] 다른 이미지[7] 의외로 한국에 많이 쓴 단어인데, 어원은 러시아어의 агитпункт(아지트풍크트) 이지만 아지트풍크트는 공작원의 비밀기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구 소련에 있었던 대민 사상교육과 선동을 담당하는 교육센터를 가리킨다. 한국에서 사용하는 아지트의 뜻과는 다른 것인 셈.[8] 이후 VOD에는 산채로 수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