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26 21:06:34

비탈리 클리츠코

<colbgcolor=#005bbb> 제6대 키이우 특별시장
비탈리 클리츠코
Віта́лій Кличко́ / Vitali Klitschko
파일:220112151644-klitschko-ukraine-russia-ctw-intl-spt-100921-super-tease.jpg
이름<colbgcolor=#FFFFFF,#191919> 비탈리 볼로디미로비치 클리치코
Вітáлій Володи́мирович Кличкó
Vitali Wladimirowitsch Klitschko
생년월일 1971년 7월 19일([age(1971-07-19)]세)
국적
[[우크라이나|]][[틀:국기|]][[틀:국기|]]
신체 201㎝/112㎏/203㎝[1]
입식 전적 36전 34승(22KO) 2패
권투 전적 47전 45승(41KO) 2패
체급 헤비급
링네임 Dr. Ironfist
정당
의원 선수 1
의원 대수 7
경력 제5·6대 키이우 시의회 의원(2006~2012)[2]
제7대 우크라이나 최고 라다 의원(2012~2014)
제6대 키이우 특별시장(2014~)
학력 페레야슬라브-흐멜니츠키 교육연구소
키이우 대학교
SNS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서명
파일:Vitali_Klitschko_signature.png

1. 개요2. 선수 시절3. 파이팅 스타일4. 주요 경력5. 정치인 시절6. 가족 관계7.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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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크라이나의 前 권투선수 및 정치인. 헤비급 역대 최강의 복서를 논할 때 항상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선수이다. WBC 헤비급 타이틀을 10년 넘게 홀로 수성했으며, 동생인 블라디미르 클리츠코와 헤비급을 양분했다.

은퇴 이후 2014년부터는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이우 특별시장직을 수행 중이며 연임에 성공했다. 제7대 최고 라다의 의원이었고 2015년 페트로 포로셴코 블록 입당 후 포로셴코 블록 당수를 겸임했으며 2019년 당수직에서 물러나고 탈당해 개혁을 위한 우크라이나 민주동맹을 재창당했다. 반러, 친서방 성향이며, 진보적인 정치인으로 평가받는다. 포로셴코 블록에서 탈당한 이후에도 키이우 시장 재선에 성공할 정도로 우크라이나 정치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우크라이나의 대선 주자를 논할 때 열 손가락 안에 항상 꼽히는 인물이기도 하다.

2. 선수 시절


203㎝ 112㎏ 거구를 자랑하는 헤비급 복서. 1999년 WBO 헤비급 챔피언에 오른 뒤 동생인 볼로디미르 클리츠코와 함께 복싱의 최고 인기 체급인 헤비급을 10년 넘게 양분하던 2000년대 최강의 복서였다. 통산 전적은 45승 2패. 2003년 레녹스 루이스[3]에게 패[4]한 후 2012년 9월 8일 마지막 경기를 치를 때까지 연승을 달리며 WBC 헤비급 타이틀을 사수했다. 나머지 IBF, WBA, IBO, WBO 헤비급 챔피언은 블라디미르 클리츠코의 차지. 형제 대결은 끝내 이뤄지지 않았는데 어머니의 뜻이라 한다.

아마추어에서 활동할 때 금지 약물이 적발되어 라이선스가 정지되는 바람에 킥복싱 선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1992년부터 95년까지 195-15 80KO를 거두었으며 1993년에는 판크라스 무대에서 뛰기도 했다. 24승 25패 9무의 MMA 선수 야나기사와 류시와 싸운 적도 있다. 결과는 전원일치 판정승. 킥복싱 데뷔 초기에는 영국의 펠레 라이(Pele Reid) 에게 스피닝 헤드킥으로 KO를 당하는 굴욕적인 일도 겪었지만, 후에 킥복싱 룰에 적응한 이후에는 펠레보다 뛰어난 선수들을 모두 꺾었다. 1996년부터 다시 복싱계로 돌아왔다.

이 두 형제가 십 년 가량 헤비급 권좌를 차지하며 불혹의 나이를 넘기고도 권좌에서 내려오지 않아 복싱 강국 미국과 영국에서는 헤비급의 인기가 시들해졌던 바 있다.[5] 하지만 유럽권에서는 최고의 스포츠스타 중 한 명으로 이 두 형제의 경기는 수만명을 수용하는 야외 스타디움에서 열리며 시청률도 최대 50%까지 보장한다. 특히 본인의 트레이닝 캠프가 있던 독일에서의 인기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대부분의 PPV 경기 역시 독일에서 소화했다.

3. 파이팅 스타일

파일:vitali-klitschko.png

큰 키와 긴 리치를 활용한 원투 콤비네이션을 자주 구사하며 안정적인 경기 운영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렇다고 펀치력이 없거나 승부를 걸지 않는 복서는 아니다. 45승 중 KO승이 41승.

체구에 비해 풋워크가 빨라 사각으로 이동한 뒤 꽂아넣는 스트레이트가 매섭기로 정평이 나 있으며 이를 활용해 수많은 헤비급 컨텐더들을 다운시켰다.[6] 또한 비교적 유리턱으로 평가받는 동생 블라디미르 클리츠코[7]와 상반되게도 강철턱으로 유명세를 떨쳤던 선수였다. 특히 상단에 짧게 언급된 레녹스 루이스와의 경기에서는 한쪽 시야가 차단되는 바람에 풀스윙에 가까운 카운터 어퍼컷을 두 차례나 허용하고도 곧바로 원투 스트레이트로 반격하는 등 괴물같은 맷집을 과시한 바 있으며, 동생에게 KO패를 안겨준 코리 샌더스[8]와의 복수전에서도 초반 러시를 견뎌내고 후반에 상대를 그로기에 몰아넣는 괴물 같은 맷집과 위기 관리 능력을 선보였다.

블라디미르 클리츠코와 비교되는 특성이 있다면 강한 카운터로 KO를 노리는 블라디미르에 비해 많은 수의 펀치를 뻗는 볼륨스트라이커였다는 점이다. 빠른 발과 강한 턱, 그리고 12라운드가 종료되는 순간까지도 쉴새없이 움직일 수 있는 강한 지구력을 갖추고 있었고 덕분에 주먹도 다른 선수에 비해 많이 뻗을 수 있었다. 펀치 자체는 동생에 비해 약한 편이었으나 헤비급 전체 기준으로는 절대 약하지 않았고 그런 주먹을 수백대씩 뻗어댔기 때문에 이를 감당할 수 있는 선수가 몇 없었다. 때문에 KO율 자체는 동생에 비해 월등히 높은 편이다.[9]

21세기 복싱 헤비급에서는 가장 위대한 선수라 할 수 있으나 복싱의 인기가 굉장히 시들해진 한국에서는 듣보잡 취급을 받았다. 경기 스타일도 우월한 체격 조건과 안정적인 잽, 정확한 원투를 바탕으로 상대를 압살하는 타입이라 마이크 타이슨이나 조 프레이저와 같은 스워머형 인파이터를 좋아하는 한국에서는 인기가 높지 않다. 유럽 무대에서는 최고의 스타 중 하나였지만 비교적 엉성해보이는 경기 스타일과 동생에 비해 두껍고 거칠어 보이는 외모 때문에 동생 블라디미르의 인기에 살짝 밀리기도 했다. 다만 골수 복싱팬들 사이에서는 비탈리 지지도가 매우 높다.

역대급 철권들과 싸웠던 셰넌 브릭스의 말에 따르면 자신이 싸웠던 복서 중에서 펀치력이 가장 강했다고 한다. 브릭스는 의외로 비탈리 클리츠코에게 KO패가 아닌 12라운드 판정패를 당했다[10]

4. 주요 경력

  • 1996년 11월 16일 토드 브래덤戰 2회 KO승 커리어 첫 승
  • 1999년 6월 26일 허비 하이드戰 2회 KO승 WBO 헤비급 타이틀 획득
  • 2000년 4월 1일 크리스 버드戰 9라운드 종료 후 어깨부상으로 기권[11] WBO 헤비급 타이틀 상실 (커리어 첫 패)[12]
  • 2003년 6월 21일 레녹스 루이스戰 WBC 헤비급 타이틀전 닥터스탑 TKO패[13][14]
  • 2004년 4월 24일 코리 샌더스戰 TKO승 WBC 헤비급 타이틀 획득[15]
  • 2005년 무릎 부상으로 은퇴 선언, 타이틀 상실. 3년뒤인 2008년 현역복귀
  • 2008년 10월 11일 사무엘 피터戰 8회 TKO승 WBC 헤비급 타이틀 획득 (1차 은퇴후 현역 복귀전)
  • 2012년 9월 8일 마누엘 카戰 4회 TKO승 WBC 헤비급 타이틀 방어 (현역 은퇴전)

5. 정치인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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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국내에 본격적으로 알려진 계기는 정치인으로 활동하면서부터이다. 2004년 오렌지 혁명을 계기로 정치에 관심을 가졌으며 키이우 시의원을 거쳐 2012년 우크라이나 총선에서 최고 라다 의원에 당선됐다. 정치 성향은 반러, 친서방이다.



2012년 12월 13일에는 우크라이나 최고 라다에서 당시 늘 그랬듯 친러파와 반러파 의원간의 집단 난투극이 벌어졌는데, 끼어들지 않고 입맛만 다시며 조용히 지켜보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 그냥 격투기 선수도 아니고 복싱 헤비급 세계 챔피언 출신이니, 만약 싸움에 끼어들었다면 그 순간 난투극이 아니라 말 그대로 유혈사태가 되었을 것이다. 이후 인터뷰에서 정치 싸움은 주먹이 아닌 머리로 해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2013년 유로마이단 시위에서는 시위단의 상징적 존재로 부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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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강의 복서도 최루탄 앞에선 어쩔 수 없었다(…).

2014년 5월 27일, 키이우 시장에 당선되었다. 시정을 별 탈 없이 잘 이끌었다는 평이다.

2015년 8월 28일 페트로 포로셴코 블록에 입당한 동시에 당 대표가 되었다. 그러나 2019년 5월 31일 2019년 우크라이나 대통령 선거 참패에 책임을 지고 당 대표직에서 사퇴했으며 탈당했다. 이후 개혁을 위한 우크라이나 민주동맹을 재창당했다. 2020년 치러진 키이우 시장 선거에서 50.2% 득표율로 결선투표 없이 재선되었다. 또한 그가 이끄는 개혁을 위한 우크라이나 민주동맹은 최고 라다에 의석이 없음에도 120석 중 29석을 얻는 성과를 거둬 31석인 유럽연대와 연정을 꾸렸다.

2022년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 발발하자 키이우 주민들에게 집에 머물면서 전쟁 대비 서류와 필수품을 갖추고, 패닉에 빠지지 말 것을 촉구했다. #
파일:클리츠코군복.jpg
<rowcolor=#ffffff> 2월 25일 무장한 채로 전선에 나선 비탈리 클리츠코

키이우 전투가 진행되며 러시아군이 키이우 코앞까지 밀고 들어오자 클리츠코가 직접 무장하고 전선에 나선 모습이 확인되었다. # 이후에도 시장으로서 도시를 지키며 지속적으로 서방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러시아의 만행을 알리고 있다. 영상 동생과 함께 나서기도 한다. 영상1 영상2 러시아의 침공 첫날 젤렌스키 암살을 노리고 키이우에 VDV가 기습했을 때 직접 교전했다고 한다.

2022년 6월에는 자신을 사칭한 딥페이크 내지는 동영상 조작에 빈, 마드리드, 베를린, 부다페스트 시장이 낚여서 회담까지 간 적이 있었다. # 공통점으로는 전쟁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질문을 했다는 것과 러시아어 통역을 요청했다는 것이 있다. 이에 진짜 클리츠코는 독일 빌트와의 인터뷰에서 자신과 회담을 갖고 싶은 사람들에게 독일어와 영어를 할 수 있기 때문에 별도의 통역이 없어도 된다고 했다. 영상

러시아의 공습으로 키이우에 대규모 정전 사태가 일어나자 책임소재를 놓고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과 언쟁을 벌였다. 비탈리 시장은 이 시국에 정치 싸움을 하고 싶지 않다고 비판했다. #

비탈리 클리츠코 시장은 러시아의 공격이 지속시 큰 재앙이 다가올 것이라고 경고했다. #

2023년 12월에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이 실정으로 결국 실각할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6. 가족 관계

  • 볼로디미르 로디오노비치 클리츠코[16](부친), 나데즈다 울야노프나(모친)
    • 비탈리 클리츠코, 나탈리아 에고로바(부인)
      • 예고르 다니엘 클리츠코(장남)
      • 엘리자베스 빅토리아 클리츠코(장녀)
      • 맥스 클리츠코(차남)
    • 블라디미르 클리츠코(남동생)
      • 카야 클리츠코(조카딸)

7. 기타

  • 2010년에 클리츠코 형제의 우표가 발행되었다.
  • 동생하고 워낙 비슷하게 생겨서 둘이 쌍둥이가 아니냐는 오해를 많이 받는데 나이가 5살 차이이므로 쌍둥이는 아니다. 그냥 스타일을 서로서로 비슷하게 하는듯. 특히 이 영상을 보면 거의 도플갱어 수준으로 닮았다. 목소리는 차이가 좀 있는데, 비탈리가 더 낮고 블라디미르가 더 카랑카랑하다.
  • 복싱 세계 챔피언 중 최초로 박사 학위를 취득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우크라이나에서 3대 명문대 중 하나로 꼽히는 키이우 대학교에서 스포츠과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전문 분야는 사회발전 관리 분야라고 한다. 이러한 부분이 본인의 정치적 커리어에 상당한 도움을 준 듯하다. 동생 블라디미르 역시 함께 같은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 형제 대결을 실제로 진행했을 시 누가 이길 것인가에 대한 논쟁은 현재 진행형이다. 다만 다수의 팬들은 맷집이 강하고 체력이 좋은 비탈리가 블라디미르를 꺾을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전설의 코리 샌더스전 리벤지 이후로 '형만한 아우 없다.'가 정설로 통한다.[17]
  • 같은 복서 출신 정치인인 매니 파퀴아오와 비교했을 때 정치적 커리어만 놓고 보면 훨씬 성공했다. 국회의원과 집권여당의 당대표를 역임한 파퀴아오에 비해 클리츠코는 우크라이나 최고 라다 의원을 역임한 후 현재 키이우의 시장직을 맡고 있다. 키이우 시장으로서의 능력도 역시 인정받으며 여전히 차기 대권 주자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 2022년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으로 인해 형제가 함께 우크라이나군에 자원 입대하여 러시아의 침략에 대항하고 있다.
  • 한국에서는 복싱의 인기가 떨어지기 때문에 비탈리에 대한 인지도가 떨어져서[18] 한국에서는 우크라이나에 코미디언 출신 대통령, 복싱 선수 출신의 시장이 있다는 정도만 알려져 있지만 단순히 '복싱 선수 출신'이라고 짧게 소개하기에는 커리어가 상당하다.
  • 체스도 좋아하며 러시아의 체스 챔피언인 블라디미르 크램닉과 친하다.
  • 모국어인 우크라이나어를 포함해서 독일어영어, 러시아어를 할 줄 안다.[19]


[1] 키/몸무게/리치[2] 의원 임기는 4년이며 보궐선거에 당선된 후 재선되었다.[3] 역시 헤비급 역대 최강자 논쟁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영국계 캐나다 복서이다.[4] 상술되어 있듯, 눈이 찢어져 시야가 차단되기 전까지는 거의 매 라운드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게다가 시야가 차단되어 수많은 강펀치를 허용했음에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전진 일변도의 압박을 펼쳐 전 세계 복싱 팬들의 경악을 자아냈다.[5] 다행히 클리츠코 형제의 은퇴를 전후로 미국에서는 디온테이 와일더가, 영국에서는 타이슨 퓨리앤서니 조슈아라는 걸출한 스타가 둘이나 등장하며 헤비급이 예전의 인기를 되찾았다.[6] 이는 우크라이나 출신 선수들의 주된 특징 중 하나이다. 바실 로마첸코알렉산더 우식 역시 빠른 사이드스텝을 통한 사각지대 창출을 주무기로 삼고 있다.[7] 커리어 4패 중 3패가 KO/TKO로 인한 패배이다.[8] 남아공 출신의 헤비급 복서이다. 빠르고 강한 펀치력과 투지 넘치는 플레이로 많은 사랑을 받았으며 블라디미르 클리츠코를 KO로 잡아낸 이후에는 마이크 베르나르도 이상의 인기를 구가하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2012년 조카의 생일파티에 참석했다가 강도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9] 그렇다고 블라디미르의 KO율이 낮은 것도 아니다. 64승 중 53승을 넉아웃으로 가져갔다.[10] 브릭스는 레녹스 루이스, 그리고 후에 복귀한 조지 포먼과도 대전을 했던 경험이 있는 복서이다.[11] 9라운드까지 88-83 88-83 89-82 3심 모두 클리츠코의 압도적인 우세로 판정하고 있었다. 남은 3라운드를 모두 내주더라도 승리가 확실했기에 아쉬운 상황.[12] 이 패배는 코리 샌더스의 경우와는 정반대로 동생인 블라디미르가 설욕해주었다.[13] (커리어 마지막 패)[14] 레녹스 루이스는 당대 헤비급 부동의 최강자로 여겨졌으며, 신체조건 역시 클리츠코 형제 수준으로 우월한 복서였다. 전문가들은 루이스의 우세를 예상했으나, 의외로 클리츠코가 눈가 커팅 이후 출혈에 의해 시야가 차단되기 전까지는 파워펀치를 포함한 유효타 적중횟수와 적중률에서 앞서는 모습을 보여주며 루이스의 안면을 멍들게 했다. 심지어 시야가 차단되고 어퍼컷을 몇차례 허용하면서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 꾸준히 전진일변도로 루이스를 상대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압권이었으나, 상처가 심하게 벌어질 것을 염려해 링닥터와 레프리의 협의 하에 6라운드 TKO가 선언되었다. 헤비급 최강자의 자리를 정식으로 물려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기에 경기 직후 인터뷰에서 아쉬움을 표하며 리매치를 요청했고, 루이스는 '상대가 원한다면 해야 한다.'는 뉘앙스로 답변했으나, 이를 번복하고 은퇴한다. 아무래도 루이스가 노장의 반열에 들어서는 나이였고, 전성기 시절에 비해 맷집은 늘었지만 조금 굼뜬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하는 등 하락세에 들어설 조짐이 보였던 데다가, 어퍼컷을 3연속으로 허용하고도 원투 스트레이트로 응수하던 클리츠코의 강한 면모를 확인했기에 리매치는 부담스러웠을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때문에 어쩌면 가장 적절한 시기에 은퇴했다는 의견도 있다.[15] 이미 문서에서 언급되었듯, 코리 샌더스는 비탈리의 동생인 블라디미르 클리츠코를 전 경기에서 넉아웃시켰기에 비탈리 클리츠코 입장에서는 복수전으로서의 의미가 강한 경기였다. 초반에는 코리 샌더스의 폭풍같은 펀치러쉬에 당황하며 1라운드를 내어주기도 했으나, 특유의 무쇠턱으로 잘 버텨낸 뒤 특유의 원투 스트레이트를 활용해 포인트와 데미지를 차곡차곡 쌓아갔다. 샌더스는 무리한 공격을 시도하다 오히려 지쳤고, 비탈리 클리츠코는 이를 놓치지 않고 8라운드에 스트레이트 연타를 감행하며 TKO승을 거두었다. 한편 코리 샌더스도 지기는 했지만 물러서지 않고 레프리 스톱 전까지 계속 주먹을 내는 감투정신을 보여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16] 1947~2011, 소비에트 공군 소장. 암으로 별세.[17] 블라디미르 역시 크리스 버드와의 1, 2차전을 통해 형의 복수를 대신했지만, 당시 비탈리는 기존에 달고 있던 어깨 부상이 악화되며 기권패한 경우라 이야기가 많이 다르다.[18] 사실 원래 클리츠코 형제 정도면 아무리 한국에서 복싱 인기가 떨어진다고 해도 이름 정도는 알려질만 하지만 이들은 대부분 유럽을 무대로 활동했고 북중미에서도 큰 활동이 없다보니 더 인지도가 떨어지는 면이 있다.[19] 출처는 영어 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