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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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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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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박건배
(1983~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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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건배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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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구단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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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건배
(1982~2001)
정몽구
(2001~2021)
송호성
(20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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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대표이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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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1983)
강남형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4~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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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주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9~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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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익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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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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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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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21c2a><colcolor=#ffffff> 해태그룹 초대 회장
박건배
朴健培|Park Kun-bae
파일:박건배 회장.jpg
출생 1948년 10월 25일 ([age(1948-10-25)]세)
서울특별시
학력 경복고등학교 (졸업 / 42회)
한국외국어대학교 (영어과 / 학사)
뉴욕 대학교 (석사)
부모 아버지 박병규, 어머니 김옥순
형제 남동생 박성배(1954~2021)
배우자 김형신
자녀 장남 박재범
차남 박원범
장녀 박정은
1. 개요2. 생애3.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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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前 기업인. 해태그룹 초대 회장, 해태 타이거즈 초대 구단주 및 사장, 한국스카우트연맹 제12대 총재를 역임했다.

2. 생애

1948년 10월 25일 해태그룹 박병규 초대 회장의 장남으로 태어나 경복고등학교, 한국외국어대학교 영어과, 미국 뉴욕 대학교를 졸업했다. 아버지의 타계로 1981년 33살의 젊은 나이에 그룹 초대 회장으로 취임했다.

2.1. 해태그룹 회장

해태그룹 항목에 기재되어 있듯이 본래 해태는 1945년 박병규, 민후식, 신덕발, 한달성 등 4명이 적산기업 나카오제과 용산공장을 인수해 '해태제과합명회사'를 세운 게 그룹의 시초였다. 이후 32년간 식품, 제과를 주력으로 동업 체제를 지속했으나 1977년 공동창업주 박병규가 급서하자 공동창업주들 간에 경영권 분쟁이 생긴 끝에 박건배가 1978년 전무, 1979년 부사장을 거쳐 1981년 해태제과 등 3개사 사장이 되어 사실상 경영권을 잡았다. 반면 신덕발의 아들 신정차는 1989년에 해태관광을 들고 먼저 분가했고 민후식의 아들 민병헌도 1988년에 해태유업을 들고 독립해 동업체제 시대를 끝냈다.

당시 모기업이였던 해태제과와 적자에 허덕이던 농수산 주조 상사 등을 맡은 박건배 회장은 통폐합과 인수 작업을 서두른 결과 제과, 산업, 전자, 상사, 해태 타이거즈, 유통 등 6개사로 정리하여 사세확장을 지속하였고, 제과의 음료사업부를 떼어내어 해태음료를 독립시킨 것을 비롯해 미진금속, 해태가루비를 잇따라 설립하는 등 계열사를 10여개로 늘려 그룹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1994년 인켈, 1995년 나우정밀을 각각 인수해 정점을 찍어 1996년 말 기준 재계 24위로 국내 30대 기업 안에 들 정도로 제법 규모가 큰 그룹으로 성장시켰다.

그러나 본업과는 무관한 비식료품 사업까지 무리하게 확장하는 문어발식 경영, 대외활동 편중 등이 화를 불러, 결국 1997년 외환 위기 당시 찾아온 유동성 자금난의 여파로 2000년에 주력 계열사 해태제과 등이 부도를 맞으면서 그룹은 해체되고 본인도 분식회계 및 위장계열사를 통한 비자금 조성 등의 혐의로 구속되어 2008년 항소심에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았다.

옛 해태산업의 수입 주류 전문 자회사인 금양인터내셔날을 통해 장남인 박재범 사장과 함께 재기를 꿈꾸었으나 국내 대형 유통사들이 직접 와인을 수입하게 되면서 경영난으로 2017년 회사를 매각했다. #

2.2. 해태 타이거즈 구단주

역대 한국프로야구 구단주 중에서 가장 많은 우승을 경험한 구단주다. 1982년 15명의 선수로 시작한 미니 구단이었는데도 호남 지방에서 배출되는 유망주들이 계속 입단했고 구단 특유의 강한 군기, 자율 야구, 선수들의 노력, 김응용 감독의 지도력이 어우러져 해태 왕조가 탄생했다. 이종범의 증언에 의하면 회장의 이름이 건배이기 때문에 해태 회식 때 술을 마시면 "건배"를 외치는 것을 금지시켰다고 한다. 항상 "위하여"만을 외치라고 시켰다고 한다.

1983년 한국시리즈에서 구단의 첫 우승을 일궈냈으나 구단에서는 오히려 지원을 축소했고 선수들의 불만이 표출된 계기가 해태 타이거즈 불고기 항명사건이었다. 단 비용 절감은 박건배 구단주의 지시가 아니라 프런트 실무자급이 알아서 움직인 결과였다.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김일권이 밝히길 김일권에게 '놀다 와라'고 말하면서 용돈 500만 원[1]을 줬고 김일권은 혼자서 500만 원을 다 가졌다고 한다. 김일권은 본인의 사견이지만 박건배 구단주가 김일권 자신을 특히 예뻐했다고 했다. 그리고 1996년 해태 타이거즈 하와이 항명사건이 발생했을 당시에도 구단주였다.
2000년 10월 박건배 구단주가 옥중 생활 당시 김응용 감독이 찾아와서 삼성 라이온즈로 이적하겠다고 밝히자 서운함을 표시했지만 결국 이적을 승낙했다.

3. 가계도

  • 박병규 제2대 해태제과 사장 (1925 ~ 1977) / 妻 김옥순
    • 1남 박건배 초대 해태그룹 회장 (1948 ~ ) / 妻 김형신[2]
      • 1남 박재범 전 금양인터내셔날 대표이사
      • 2남 박원범
      • 1녀 박정은
    • 2남 박성배 전 해태유통 부회장 (1954 ~ 2021[3])
    • 3남 박석배 전 해태제과 노동위원장


[1] 당시 김일권의 석 달치 월급에 해당하는 돈이다. 김일권은 3경기 출장 정지 및 벌금 300만 원의 처분을 받아 반발하던 상황이었다.[2] 김익기 전 의원의 차녀로 박정구 전 금호그룹 회장의 부인 김형일의 여동생이다.[3] 2021년 2월 5일, 코로나19 치료 중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