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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로스 포먼 감독 장편 연출 작품
||<colbgcolor=#000><colcolor=#fff> 맨 온 더 문 (1999) Man on the Moon | |
장르 | 드라마, 코미디, 전기 영화 |
감독 | 밀로스 포먼 |
각본 | 스콧 알렉산더, 래리 카라제우스키 |
제작 | 대니 드비토, 마이클 샘버그, 스테이시 셰어 |
주연 | 짐 캐리, 대니 드비토, 코트니 러브, 폴 지아마티 |
촬영 | 아나스타스 미코스 |
음악 | R.E.M. |
주제곡 | The Great Beyond |
제작사 | 유니버설 픽처스 |
수입사 | 도호 |
배급사 | 도호 |
개봉일 | 1999년 12월 22일 2000년 5월 5일 2000년 5월 11일 2000년 6월 10일 |
화면비 | 2.39:1 |
상영 시간 | 119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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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밀로스 포먼의 1999년 전기 영화. 멀티 페르소나 (Multi-Persona)와 케이페이브의 선구자[1]인 미국의 엔터테이너 앤디 카우프먼(1949년 1월 17일 ~ 1984년 5월 16일)의 일대기를 다룬 코미디 드라마 영화이다.앤디 카우프먼의 절친한 친구였으며 앤디가 요절하기 전까지 앤디 카우프먼의 전속 코미디 작가로 일했던 밥 즈무다가 직접 각본을 집필했다.[2]
짐 캐리가 앤디 카우프먼 역을 맡았으며 대니 드비토, 코트니 러브, 폴 지아마티 등이 출연했다. 이외에 앤디 카우프먼 생전에 그와 같이 일하며 친구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이 추모의 의미를 담아 카메오로 많이 출연했다.
2. 상세
영화는 카우프먼의 유소년기부터 그의 삶을 쫓아가며 코미디 클럽과 그에게 유명세를 안겨준 Saturday Night Live, 시트콤 Taxi(Latka Gravas 역), Fridays, Late Night with David Letterman 등 TV 출연작들을 다룬다. 앤디 카우프먼의 인생과 함께 한 내면적 조크, 사각 링 위에서 프로레슬러 제리 롤러와의 해프닝, 그의 제2의 캐릭터 토니 클립튼 등의 이슈에도 관심을 기울인다.다만, 앤디 카우프먼의 삶을 있는 그대로 그려낸 것이 아니라 영화의 주제 의식에 맞게 변형시켜 관객들에게 보여준다. 실제로 영화 개봉 후 앤디 카우프만의 아버지는 "실제 본인은 아들의 연예인 생활을 적극적으로 응원했고 아들과의 사이도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영화 내에서는 앤디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아들과 사이도 안좋은 꼰대스러운 모습으로만 나온다."며 영화의 각본을 쓴 밥 즈무다를 비난하는 인터뷰를 했다.
영화의 오프닝에서도 짐 캐리가 "드라마적인 요소를 강조하기 위해 영화 속의 내 삶의 모습은 뒤바뀌거나 변형되었죠"라며 자조적인 대사를 한다. 다만, 몇 초간의 정적 후에 앤디가 다시 나와 자신이 그런 말을 한 것은 자신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을 솎아내기 위한 것이고 사실 영화는 여러 명의 캐릭터들이 나오는 훌륭한 영화라고 설명하며 영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미국에는 1999년 12월 22일, 영국에는 2000년 5월 5일에 개봉하였으며, 영화는 상업적으로 성공하지 못하였으나, 짐 캐리의 연기력은 호평을 받아 이 영화로 트루먼 쇼에 이어 두번째 골든 글로브 상을 수상하게 된다.
제목은 R.E.M.이 카우프만에게 헌정한 동명의 곡에서 따왔다. R.E.M.은 영화의 주제가인 “The Great Beyond”도 작곡했다.
영화의 외전으로 다큐멘터리 Jim & Andy: The Great Beyond가 2017년에 개봉하였다.
3. 예고편
4. 줄거리
앤디 카우프먼은 클럽(미국 특유의 '즉흥적 스탠딩 코미디 클럽')에서 고전하는 배우이다. 그가 고전하는 이유는 클럽에 온 관객들은 배우에게 스탠드업 코미디를 원하는데, 그는 무대에서 동요를 부르는 등 통속적인 조크를 거부하기 때문이다.[3] 관객들이 카우프먼에게 코미디언으로서의 재능이 없다고 생각하게 될 즈음, 그는 촌스런 재킷을 입은 소심한 외국인 캐릭터에서 엘비스 프레슬리 모창[4] 으로 과감하게 대변신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관객들은 비로소 그가 재능이 있음을 깨달으며 그에게 박수갈채를 보낸다.[5]
이 공연으로 인해 카우프먼은 연예계 스카우터 조지 샤피로의 이목을 끌게 되고, 샤피로는 대기실에서 카우프먼에게 명함을 건낸다. 앤디 카우프먼은 샤피로와 인도 음식을 파는 채식 식당에서 식사를 하면서[6] 자신의 코딱지를 비싼 값에 팔 수 있을 정도로 슈퍼 스타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조지 샤피로가 앤디를 보고 "네 개그는 웃기니 너는 틀림없이 인기 코미디언이 될 것이다."라고 말하자 앤디는 진지하게 자신은 사소한 농담을 하지 않고 한번도 스스로를 코미디언이라 생각해본 적이 없다면서 자신은 그저 무대위에서 춤과 노래를 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조지 샤피로는 앤디 카우프먼의 말에 당황하지만 자신의 감을 믿고 앤디 카우프먼과 계약을 맺는다.
1975년 10월 11일에 방영된 세러데이 나잇 라이브(이하 SNL)의 역사적인 첫 방송에서 앤디 카우프먼은 마이티 마우스 립싱크 개그를 선보이며 TV 무대에 데뷔하였고 관객들로부터 열화와 같은 성원을 받는다. 그러나 쇼의 관객으로 초대된 앤디의 부모님은 왜 사람들이 앤디의 개그를 보고 웃고있는지 어리둥절해 한다.
1977년, 조지 샤피로는 앤디 카우프먼을 TV 시트콤 Taxi에 출연시키는데 성공한다. 처음에 카우프먼은 시트콤이 유치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Taxi에 출연하기를 거절했지만, 돈과 유명세 그리고 앤디 카우프먼 그만의 스페셜 프로그램을 찍을 수 있게 해주겠다는 샤피로의 약속 때문에 Latka Gravas 역을 수락하고 시트콤에 출연하기로 계약한다. 한편, 앤디 카우프먼은 샤피로에게 Taxi에 출연하는 대신 자신이 은혜를 갚아야하는 토니 클립튼이라는 가수를 Taxi에 총 4번 게스트로 출연시켜달라는 요청을 한다.
조지 샤피로는 생전 처음 듣는 토니 클립튼이라는 사람이 어떤 연예인인지 알아보기 위해 클럽을 방문하는데 토니 클립튼은 폴란드 출신의 유대인 관객에게 나치 조크를 하고 머리에 물을 뿌리는 등 무례한 태도, 끔찍한 외모와 처신 그 자체였다. 공연이 끝나고 클립튼은 샤피로에게 무대 뒷편에서 보자는 언질을 남긴다.
공연이 끝나고 무대 뒤로 간 샤피로에게 토니 클립튼의 안경과 분장을 벗으며 앤디 카우프먼은 자신이 토니 클립튼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또한, 토니 클립튼에게 각종 수난을 당한 관객이 갑자기 나타나 수염 분장을 지우며 샤피로에게 악수를 청힌다. 그의 정체는 바로 앤디 카우프먼의 창의적인 동료 작가 밥 즈무다였던 것이다.
이후 샤피로는 ABC 방송국의 높으신 분들과의 미팅에서 토니 클립튼이 앤디 카우프먼과 카우프먼의 동료 작가 밥 즈무다가 만들어낸 빌런 캐릭터인 것을 밝히고 그들에게 절대로 앤디 카우프먼과 토니 클립튼이 동일인이라는 사실이 이 회의장 바깥으로 나가면 안된다고 신신당부한다. 또한, 샤피로는 이 계약으로 2명의 코미디언을 1명 분의 계약금으로 쓴다는 것을 어필한다. ABC 사장은 이 말을 듣고 흡족해하며 웃는다.
1978년부터 앤디 카우프먼은 Taxi에 출연하기 시작하여 어리버리하고 순수한 이민자 정비공인 Latka를 연기하여 인기를 얻는데 정작 그는 이러한 인기를 싫어한다.[7] 관객들은 카우프먼 본인이 하고 싶어하는 연기를 싫어하고 시트콤 Taxi에서의 Latka만을 원했기 때문이다. 한 쇼에서 그는 시트콤 Taxi에서의 Latka 류의 코미디를 기대하고 온 관객들 앞에서 소설 위대한 개츠비를 처음부터 끝까지 한 글자도 빼놓지 않고 완독함으로써 관객들의 불만을 사게 된다.
여기에 앤디 카우프먼이 약속받은 자신만의 스페셜 프로그램은 촬영까지 완료했지만 카우프먼의 개그를 받아들이지 못한 방송국의 높으신 분들에 의해 방송이 불발되자 빡친 카우프먼은 더 이상 시트콤에 출연하지 않기로 마음먹는다.[8] 이후 카우프먼은 자신의 또다른 캐릭터 토니 클립튼으로 시트콤 Taxi에 출연하여 세트장을 난장판으로 만든 후 도망치는데 카우프먼은 이때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신문사에 제보하여 토니 클립튼의 인지도를 높인다.[9]
이후 앤디 카우프먼은 프로레슬러가 되기로 결심하고 마브 그리핀 쇼에 출연해서 여자와만 레슬링을 하겠다고 떠들어 대면서 실제로 여자와만 레슬링을 하고(이들은 고용된 배우들이다.) 승리한 뒤에는 자신이 "양성을 아우르는 레슬링 챔피언"이라고 선언하며 자신의 빌런 프레임을 부각시킨다.[10] 한편, 카우프먼은 링 위에서 같이 레슬링한 한 명의 여인(린 마귤리스)에게 호감을 느끼고 둘은 사랑의 감정에 빠지게 된다.[11]
1981년 2월 20일, 앤디 카우프먼은 ABC의 생방송 TV 코미디 쇼 Fridays에 출연하지만, 자신은 마약에 대한 코미디를 할 수 없다며 연기하기를 거부하고 같이 스케치에 출연한 Fridays의 크루 멤버 중 한명인 마이클 리처즈, 프로그램의 메인 프로듀서인 잭 번스[12]와 싸우는 방송사고를 일으키게 된다. ABC 사장은 관객들에게 앤디 카우프먼과 마이클 리처즈간의 싸움은 사전에 모의한 것이라고 밝히고[13][14][15] 카우프먼과 리처즈가 악수를 하면서 분위기가 훈훈해질 찰나 카우프먼은 갑자기 사실 이 사건은 실제상황이라면서 방송국이 진실을 묻으려고 한다고 외치자 당황한 ABC 사장이 광고로 넘기라고 하는데 카우프먼은 이를 보고 시청자들에게 "보셨죠? 저는 이제 앞으로 TV에 출연하지 못할거에요. 그러니 여러분이 나를 다시 보고 싶으면 프로레슬링의 성지인 멤피스로 오세요!"라고 소리친다. TV에서 이런 카우프먼의 모습을 본 그의 아버지는 "쟤는 완전히 미쳤어"라며 한숨을 쉰다.[16][17][18]
이흔 앤디 카우프먼은 유명 프로레슬러 제리 롤러와 공개적으로 반목하게 되는데, 롤러는 카우프먼이 프로레슬링을 모욕한다며 카우프먼에게 정식으로 경기할 것을 제안했고 카우프먼은 이를 수락한다. 롤러는 레슬링 경기 내내 카우프먼을 압도하면서 그를 가지고 놀고 그동안 까불어댄 카우프먼은 큰 부상을 입게 된다.
1982년 7월, 카우프먼은 목에 깁스를 한 채로 롤러와 함께 NBC의 간판 쇼 Late Night with David Letterman에 출연하는데 이 자리에서 둘은 잠시 휴전을 선언하지만 이내 롤러가 카우프먼의 따귀를 때리며 모욕하고 카우프먼은 방송 중에 롤러를 향해 욕설을 날리면서 커피를 면전에 뿌리는 등의 사고를 일으키게 된다. 앤디 카우프먼은 이 사건으로 인해 그의 기이한 레슬링 행각에 염증이 난 미국 시청자들의 투표에 의해 미국에서 가장 자유로운 코미디를 하는 방송인 새터데이 나잇 라이브(SNL)에 출연을 금지당하는 대가를 치르게 된다.[19]
이 결과를 본 제리 률러는 샤피로의 사무실에서 앤디 카우프먼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을 걱정하면서 미안해했고 옆에 앉아있던 앤디 카우프먼은 제리 롤러를 안심시키면서 그의 레슬링 실력에 대한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 이에 제리 롤러도 앤디 카우프먼과의 대립은 자신의 레슬링 커리어에 았어서 역사적인 순간이었다는 소감을 남긴다. 앤디 카우프먼과 제리 롤러는 사실 전부터 절친한 친구였고 두 사람의 대립은 사실 짜여진 극본이었던 것이다.[20] 샤피로는 카우프먼과 롤러에게 더 이상 각본을 짜지 말라고 조언한다.
이후 앤디 카우프먼이 방송에서 어그로를 끄는 모습을 안좋게 여긴 명상 센터 운영자가 앤디를 명상 센터에서 쫓아내자 앤디는 망연자실하여 집에서 두문불출한다. 이런 앤디 카우프먼에게 린 마귤라스가 찾아오고 앤디는 린에게 공식적으로 청혼한다.
1983년, 두 사람은 동거를 시작하고 세 집의 이삿짐을 풀면서 기쁨에 겨우던 도중 샤피로가 앤디 카우프먼에게 시트콤 Taxi가 폐지된 사실을 알린다. 한편, 전화를 받은 직후 앤디는 목덜미에 갑작스러운 통증을 느낀다.
장면이 바뀌고 앤디 카우프먼은 코미디 클럽 무대에 초라한 모습으로 등장하여 시트콤 Taxi가 취소되었고 아내 역시 자신을 떠났으며 양육권도 뺏겼다고 현재 자신의 처지를 말한다. 관객들이 웃자 앤디는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말은 농담이 아니라 진심이라고 말하면서 오늘 아침 일어났더니 낭종 같은게 내 목에 났는데 자신은 연예인이니 연예인의 낭종을 직접 만져보는 걸로 돈을 벌 수도 있겠다고 생각이 들었다며 자신에게 돈을 지불한 관객들에게 자신의 목에 나있는 낭종을 만지게 한다.
이후 앤디 카우프먼은 새벽 4시에 린 마귤리스, 밥 즈무다, 조지 샤피로를 불러서 자신이 폐암 중에서도 희귀한 대세포암에 걸렸으며 앞으로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고백힌다. 그들은 평소처럼 카우프먼이 밥 즈무다와 함께 사실과 허구를 뒤섞는 장난을 치는 것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앤디 카우프먼의 말을 믿어야 할지에 대해 확신하지 못한다. 밥 즈무다 역시 처음에는 앤디 카우프먼의 말을 장난으로 받아들이지만 이내 사실임을 깨닫고 난처해한다. 린 마귤러스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밖으로 뛰쳐 나가고 조지 샤피로는 앤디 카우프먼에게 부모님에게도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렸냐고 묻고 카우프먼은 그동안 자신이 부모님 속을 너무 많이 썩였는데 자신이 불치병에 걸린 사실까지는 말하고 싶지 않다고 얘기한다.
그러나 결국 앤디는 린과 함께 어린 시절 본 TV드라마를 다시 보다가 마음을 바꾸어 부모님에게 전화를 하여 자신의 암 투병 사실을 알린다.
아들의 소식을 듣고 병원을 찾아간 앤디 카우프먼의 부모님은 암이 앤디의 폐에서부터 왼쪽 팔에까지 퍼졌으며 방사능 치료를 시작했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낙담해하지만 앤디 카우프먼의 여동생 캐롤과 남동생 마이클은 형이 진료를 받은 병원은 연예인들이 자주 찾는 병원이라면서 이것 역시 괴짜인 앤디가 배우들을 고용해서 쇼를 벌이는 것일 뿐이라고 부모님에게 분통을 터뜨린다.[21]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받아들인 앤디 카우프먼은 평소 그의 꿈이던 카네기홀에서 기억에 남을 연기를 펼치고 극을 마치면서 참석한 관객들에게 우유와 쿠키를 무료로 제공한다.[22]
그의 건강은 더욱 악화되어갔고, 최후의 희망으로 수술 없이 환자의 몸에서 암덩어리를 끄집어낸다는 필리핀인 주술사를 찾아 필리핀으로 향하지만, “주술사”가 손에 가짜 암덩어리를 몰래 쥐고 있는 것을 보고 카우프먼은 허망하게 웃고 만다.[23] 사실과 허구가 뒤섞인 특유의 코미디 스타일로 관객들을 속이며 웃음을 선사하던 앤디 카우프먼이었기에, 그 아이러니에 웃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1984년 5월 16일. 앤디 카우프먼의 장례식이 열리고, 장례식장의 모든 조문객들은 장례식장에 설치된 스크린 상의 화면에서 생전 앤디 카우프먼이 찍어뒀던 영상을 보며 앤디가 생전 무척 좋아했던 곡인 "This Friendly World"를 따라부른다.[24][25]
1년 뒤인 1985년, 유명 클럽의 카우프먼 헌정 공연에 토니 클립튼이 출연해 "I Will Survive"를 부른다. 클럽의 벽에는 찰리 채플린을 포함한 각종 코미디언들의 캐리커처가 그려져 있고 여기에는 앤디 카우프먼의 캐리커처도 있다. 이후 밥 즈무다가 토니 클립튼을 바라보는 장면이 나오면서 영화가 끝난다. 이는 앤디 카우프먼이 찰리 채플린과 같은 상징적인 존재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영화의 각본을 맡은 밥 즈무다의 앤디를 향한 추모의 의미가 담긴 장면이다.
[1] 공로를 인정받아 사후인 2023년 WWE 명예의 전당에 현액되었다. 프로레슬링 갤러리에서 앤디 카우프먼을 소개하는 글[2] 밥 즈무다는 Fridays 사건 당시 프로듀서 잭 번스 역으로 영화에 출연하고 앤디의 마지막 장례식 부분에도 하객 중 한명으로 출연했다.[3] 1971년에 코미디 클럽 무대를 통해 코미디언으로 데뷔한 앤디 카우프먼은 기존의 미국 코미디언들과는 워낙 결이 다른 코미디를 선보였기 때문에 데뷔하고도 3년 동안은 코미디 클럽 무대에 서는 것으로는 돈을 거의 벌지 못했다고 한다. 되려 자신이 발굴한 후배 여성 코미디언(본래는 가수였는데 앤디 카우프먼이 공연 중간중간에 재치있는 화술을 구사하는 그녀에게 코미디언으로서의 자질을 발견하고 코미디언으로 데뷔할 것을 제안, 1973년에 스탠드업 코미디언으로 데뷔했다.)이자 당시 그와 동거중이었던 일레인 부슬러가 돈을 벌어오는 가장 역할을 했다고. 1974년부터 앤디 카우프먼은 Latka 캐릭터의 원형이 되는 소심한 외국인 캐릭터를 선보이며 본격적으로 관객들의 주목을 받게되고 앤디는 코미디 클럽에서 공연하는 그의 연기력을 높이 산 조지 샤피로(영화 극초반에 앤디가 공연하는 코미디 클럽의 사장 역으로 우정 출연했다.)와 매니지먼트 계약을 채결하여 1975년 10월 11일에 방영된 세러데이 나잇 라이브(이하 SNL)의 역사적인 첫 방송을 통해 방송 무대에 데뷔하게 된다.[4] 실제로 앤디 카우프먼은 엘비스 프레슬리 성대모사를 미디어에 최초로 선보인 코미디언이었다. 70년대 중반이었던 당시에는 아직 엘비스가 살아있었기 때문에 앤디의 이러한 시도는 미국의 대중들에게 상당히 용감하고 신선하게 받아들여졌다.[5] 이 장면은 SNL 시즌 2의 11번째 에피소드에서 앤디 카우프먼이 보여준 퍼포먼스를 오마주한 것이다.[6] 생전의 앤디 카우프먼은 요가와 명상 수행자에 채식주의자였으며 (앤디 카우프먼은 방송 녹화 전에 90분간 명상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고 녹화에 참여하였다고 한다.) 술과 담배도 전혀 하지 않았을 정도로 신체 건강과 정신 건강 양쪽 모두에 상당히 신경을 많이 쓰는 사람이었다. 말년에는 TV에서 물 보다 흡수가 빠르다며 게토레이를 예찬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래서 현실과 허구를 뒤섞는 코미디 스타일을 가지고 있었던데다 생전 흡연을 전혀 하지 않았던 앤디 카우프먼이 젊은 나이에 폐암으로 갑작스럽게 요절했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 미국 대중들이 지금도 존재한다. 이들은 앤디의 사망이 꾸며진 거짓이고 앤디가 사람들의 관심을 피하기 위해 잠적했다고 믿고있다. 다만 이는 어디까지나 음모론으로 앤디 카우프먼이 마지막으로 출연한 TV 프로그램 The Top을 보면 암세포가 왼팔까지 퍼져있던 상태여서 앤디 카우프먼이 왼팔을 제대로 들지 못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고 앤디 카우프먼이 항암 치료 때문에 대머리가 된 사진도 존재한다.[7] 참고로 밀로스 포먼 감독은 영화의 시트콤 Taxi 씬을 찍을 때 당시 녹화 현장을 그대로 재현한 세트장에서 관객들을 불러모아 진짜 Taxi 시트콤에 출연했던 연기자들을 캐스팅하여 진짜로 시트콤을 공연했다! 시트콤에 출연했던 배우들 모두 앤디 카우프먼이 사망하기 전까지 그와 친구관계를 유지했기에 요청을 흔쾌히 수락했다고 한다. 다만, 토니 역을 맡았던 토니 댄자는 당시 참여하던 연극 스케줄 때문에 출연을 하지 못했고(앤디와 불화를 일으킨 적이 있어서 출연을 고사했다는 설도 있다.) 시트콤의 메인 악역인 루이 역을 맡은 대니 드비토는 영화에서 조지 샤피로 역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공연에 참여하지 않았다.[8] 영화와는 달리 실제 역사에서는 앤디 카우프먼의 TV 스페셜이 시트콤 Taxi가 제작되기 이전인 1977년에 녹화되어 1979년에 ABC 방송국을 통해 성공적으로 방영되었다. 앤디 카우프먼이 시트콤 방영 중간에 방송국에다 시트콤 Taxi에서 하차하고 싶다는 의견을 낸 이유는 자신의 TV 스페셜 방영이 취소돼서 갑작스럽게 하차를 하기로 한 것이 아니라 똑같은 캐릭터를 계속 연기해야 하는 것에 카우프먼이 싫증을 냈기 때문이라고 한다. (실제로 앤디 카우프먼은 Taxi 시즌 3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느끼한 바람둥이 Latka를 선보인 것을 시작으로 시트콤 후반 시즌에서 Latka가 다중인격장애를 앓고 있다는 설정을 추가하여 기존의 어리버리하고 착한 컨셉에서 탈피한, 여러가지 다양한 모습의 Latka를 연기했다.) 앤디 카우프먼은 1978년에 시트콤이 런칭될 때 부터 한 시즌당 절반의 회차에서 Latka 캐릭터로서 시트콤의 주연을 맡기로 계약했고 시트콤의 인기가 하락하여 방송국이 NBC로 옮겨졌을 때도 계약을 성실히 이행했다. 심지어 시트콤의 마지막 회는 Latka가 자신의 고향에서 건너온 Simka와 우여곡절 끝에 결혼에 성공한 후 Latka가 Simka의 이민 신청을 도와주는 에피소드이다.[9] 앤디 카우프먼이 주연으로 출연했던 시트콤 Taxi의 각본 작업에 참여한 작가 샘 사이먼은 2013년 인터뷰를 통해 "영화 맨 온 더 문에서의 모습과는 달리 앤디 카우프먼은 촬영장에서 매우 프로페셔널한 태도를 보였다. 영화나 다른 매체에서 종종 묘사되는 앤디 카우프먼의 "돌발행동을 자주 일으키는 모습"은 밥 즈무다에 의해 꾸며진 이미지일 뿐이다. 다만, 앤디 본인이 밥 즈무다의 개그 아이디어를 좋아했던 것도 사실이다."라고 증언하였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샘 사이먼이 Taxi 각본 작업에 참여한 것은 후반 시즌부터였고 앤디가 토니 클립튼 분장을 하고 시트콤장에서 깽판을 친 것은 시즌 1 촬영 중의 일이었다며 샘의 증언은 신빙성이 없다고 말한다. 무엇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펙트는 앤디 카우프먼이 영화에서처럼 시트콤이 한창 전성기에 올랐을 때 일부러 어그로를 끄는 행동을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10] 실제 앤디 카우프먼이 여성들과의 레슬링 매치를 TV애 촤초로 선보인 것은 1979년 10월 20일, SNL 시즌 5에 출연해서였다.[11] 영화에서와 달리 린 마귤러스와 앤디 카우프먼의 인연은 앤디가 사망하기 2년전인 1982년에 출연한 My Breakfast with Blassie라는 레슬링 패러디 영화에 린 마귤러스가 캐스팅 된 것을 계기로 시작되었다. 이후 두 사람은 1984년에 앤디가 사망할 때까지 연인 관계를 유지했다.[12] 잭 번스는 60년대에 스탠드업 코미디의 대부 조지 칼린과 함께 공연한 경력이 있으며 세컨 시티에서도 몸담은 바 있는 관록있는 코미디언으로 Fridays는 그의 프로듀서 데뷔작이었다. 영화에서는 밥 즈무다가 잭 번스 역을 맡았다.[13] 마이클 리처즈는 앤다 카우프먼, Fridays의 메인 프로듀서이자 코미디언 잭 번스와 함께 해당 소동을 사전에 모의했다는 것을 앤디 카우프먼 사후에 공개했으며 스케치에 같이 출연한 여성 크루들에게도 앤디 카우프먼이 제4의 벽을 깨트릴 것이라는 언질 정도는 해줬다고 밝혔다. 실제로 공연 영상을 보면 앤디 카우프먼이 도발을 하기 위해 잠시 연기를 멈추고 "난 마약에 취한 연기를 할 수 없어"라고 하자 Fridays의 여성 크루 멤버이자 스케치에서 같이 연기 중이던 메리에디스 버렐이 갑자기 연기를 멈추고 이후 발생할 소동을 예상하며 허탈하게 웃기 시작하다가 곤란하다는 듯이 고개를 푹 숙인다. 다만, 소동 당시 마이클 리처즈가 앤디 카우프먼에게 큐시트를 던지러 잠시 화면 밖으로 사라질 때 앤디 카우프먼 옆자리에 앉아있던 Fridays의 여성 크루 멤버인 멜라니 챠토프가 "이 정도면 충분히 한 것 같은데"라며 혼잣말하는 모습, 앤디가 마이클의 얼굴에 물을 쏟으며 마이클을 도발하자 멜라니가 앤디 카우프먼에게 소품으로 사용된 빵을 내던지며 화를 내고 왜 너까지 나에게 빵을 던졌냐고 따지는 앤디에게 멜라니가 "이 쇼는 내가 고정 출연하고 있는 쇼야! 그래서 던졌어" 라고 신경질을 내는 모습, 마이클이 "이 소동은 미리 계획되어 있던 이벤트였다."라고 설명하면서 잠시 관객들을 진정시킬 때 메리에디스가 담배를 꺼내 피다가 화를 못참고 소품을 내팽개치는 모습 등을 보면 여성 크루 멤버들은 이렇게 대규모 꺵판이 벌어질줄은 모르고 있었던 듯.[14] 애초에 Fridays에 앤디 카우프먼이 나온 회차(1981년 2월 20일 방영)를 보면 쇼의 오프닝 모놀로그부터 앤디 카우프먼이 "빙송전에 리허설을 하긴 했지만 난 리허설대로 공연하지 않을거에요. 아시겠지만 이 방송은 생방송이죠. 그리고 저는 이전까지 생방송 코미디 쇼의 호스트로서 출연해본 적이 없어요. 방금 깨달은건데 이 방송은 생방송이니 내가 방송 중에 어떤 짓을 해도 제작진들은 어떠한 조치도 취할 수 없을거에요. 왜냐하면 내가 카메라 앞에서 행동을 하면 그것이 곧바로 방송 전파를 타는 거니까요! 제작진들이 NG를 외치면서 재촬영하자고 할 수 없다는 거죠! 그리고 지금 나는 학교에서 말썽을 부리는 불량 학생이 된 것 같아요. 저기 쇼의 프로듀서가 있네요 저 사람이 프로듀서에요. (프로듀서 잭 번스를 향해) 왜요? 뭐라고요? 우호호호 나 잡아봐라! 어때 약 오르지? 저 사람 좀 카메라에 비춰주세요 저 사람이 이 쇼의 프로듀서입니다. 신사 숙녀 여러분. 저 사람이 이 쇼의 프로듀서라구요. 아! 그거 알아요? 제작진들이 나보고 방송에서 Crap이라는 비속어를 쓰지 말라고 당부했는데 방금 써버렸네요"하면서 제작진들을 도발하는 것을 볼 수 있다.[15] 소동이 끝난 이후 중간 광고가 방영되고 앤디 카우프먼과 스케치에 출연한 Fridays 크루 멤버들이 세트장 뒤편에서 서로 악수를 하면서 무언가를 같이 의논하는 모습이 방영된 후 엔딩 크레딧이 송출되었고 Fridays의 댜음 회차 뉴스 스케치에서 엥커 역을 맡은 멜라니 챠토프가 "저번주에 발생한 소동으로 쇼가 주목을 받아서 다음 시즌이 확정됐대요!! 예!!" 하면서 환호하는 장면이 전파를 탔다.[16] 영화와는 달리 실제로는 사건이 발생한지 일주일 후 앤디 카우프먼이 Fridays에 다시 출연해 사과 방송을 하였다. 이 때 쇼의 프로듀서 중 하나인 존 모펫이 "지난주 소동에 대해서 많은 시청자들이 진짜 방송 사고였나 아니면 짜여진 극본이었나를 계속 질문하셨기에 말씀드립니다. 여러분들에게 부탁하는 것은 우리들이 행하는 것이 기본적으로 코미디 쇼라는 것을 상기해달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 쇼에서 행한 많은 실험적인 시도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네 그렇습니다. 저번주에 전파를 탄 소동은 사전에 계획된 것이었습니다. 제작진들은 앤디 카우프먼이 쇼 중간에 갑작스럽게 연기를 멈추는 것을 계획하였고 이는 소수의 사람들만 알고 있었습니다. 앤디 카우프먼은 관객들까지 속이는 이 계획에서 빌런 역할을 맡음으로서 자신의 커리어가 완전히 망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실제로 앤디 카우프먼은 Fridays 사건을 기점으로 대중들에게 무슨 사고를 칠 지 예상할 수 없는 사고뭉치 코미디언으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우리들의 제안을 흔쾌히 승낙하였습니다."라고 제작진들의 의도를 설명한다. 실제로 Fridays 제작진들은 라이벌 프로그램이자 생방송 스케치 코미디 쇼라는 포맷을 처음 선보인 SNL과는 차별화된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었고 때문에 생방송 스케치 코미디 쇼임에도 불구하고 배우들의 애드립을 적극적으로 장려하거나 제4의 벽을 무너뜨리는 등 실험적인 시도를 여러번 보여주었다. 또한 당시 SNL에서는 다루지 않았던 마약같은 민감하고 자극적인 소재를 쓰거나 당시 막 미국의 대통령으로 당선된 로날드 레이건 및 영부인 낸시 레이건을 직접적으로 까버리는 등 도발적인 코미디를 방송에 여과없이 내보냈다.[17] Fridays가 방영됐던 1980년에서 1982년은 SNL의 크리에이터 론 마이클스가 NBC 상층부의 무리한 스케줄 강요와 강행군에 지쳐서 잠시 SNL을 떠나있던 상태였으며 당시 SNL은 새로 프로그램의 수장을 맡은 딕 에버솔의 지휘 아래 보다 순화되고 대중적인 코미디를 했던 시기였다. 이 시기 SNL을 대표하는 코미디언이 바로 에디 머피. 딕 에버솔은 1981년부터 1985년까지 SNL을 지휘한 NBC 방송국의 임원으로서 론 마이클스와 함께 SNL의 공동 크리에이터였다. SNL을 떠난 이후 NBC 스포츠의 회장을 맡았으며 NBC 스포츠 회장 재직 시절에 올림픽 미국내 독점 중계권을 따내는 성과를 거둔 것으로 유명하다[18] 이후 앤디 카우프먼은 다시 한번 사과의 의미를 담아 1년 후 Fridays 마지막 시즌에 재출연했다. 그리고 쇼에서 가스펠 여가수 캐시 설리반과 듀엣으로 노래를 부르며 둘이 약혼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자신이 기독교로 개종했음을 알렸다. (앤디 카우프먼은 유대인이다.) 그러나 카우프먼 사후 캐시 설리반이 사실 두 사람은 연인 사이가 아니었으며 카우프먼은 사망했을 때 까지 기독교로 개종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두 사람의 공연은 그저 카우프먼 특유의 실제와 허구를 뒤섞는 퍼포먼스였던 것이다.[19] SNL의 크리에이터 론 마이클스는 앤디 카우프먼이 SNL의 첫 방송에서 공연한 마이티 마우스 립싱크 개그를 무척 절찬하였고 이후 앤디와 절친한 친구 사이가 되었다. 그리고 앤디가 새로운 코미디 아이디어를 생각해 낼 때 마다 그를 격려하며 SNL에 앤디 카우프먼을 특별 게스트로 종종 캐스팅해서 그의 새로운 개그를 시청자들에게 선보일 장을 마련해주었다. 론 마이클스는 앤디 카우프먼이 생방송 깽판 및 여성들과의 레슬링 등으로 논란을 일으켰을 때도 데이비드 레터맨과 더불어 앤디를 적극적으로 변호한 사람이었고 앤디 카우프먼의 사후 그의 전기영화 맨 온 더 문에도 본인 역으로 직접 출연하였다. 다만 영화에서는 론 마이클스 본인이 직접 방송에 나와서 앤디 카우프먼의 SNL 출연 재개에 대한 투표를 제안하지만 실제로는 론 마이클스가 당시 NBC 상층부의 무리한 스케줄 강요와 강행군에 지쳐서 잠시 SNL을 떠나있던 상태에서 이루어진 투표였으며 당시 쇼를 프로듀스하고 있던 사람은 론과 함께 SNL을 만든 사람이자 당시 NBC 방송국의 임원이었던 딕 에버솔이었다.[20] 앤디 카우프먼과 제리 롤러가 친구였고 두 사람의 갈등이 짜여진 극본이었다는 사실은 카우프먼이 사망한 후 11년이 지난 1995년에 NBC에서 앤디 카우프먼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방영될 때 제리 롤러가 다큐멘터리에 출연하여 사실을 밝힘으로서 처음 대중들에게 알려졌다. 제리 롤러가 카우프먼 사후에도 오랫동안 비밀을 지킨 것은 앤디 카우프먼이 두 사람의 진실을 대중들에게 절대 알리지 말라는 부탁을 해서였다고 한다. 다만, 제리 롤러에 의하면 앤디 카우프먼이 목애 부상을 입은 것은 실제 상황이었다고 한다. 아무래도 앤디 카우프먼이 전문 레슬러가 아니다보니 제리 롤러의 파일 드라이버를 제대로 접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21] 영화와는 달리 실제 앤디 카우프먼의 동생 마이클 카우프먼은 형의 코미디를 좋아했으며 아예 자신이 직접 토니 클립튼 분장을 하고 형이 출연하는 TV 방송에 나외서 앤디 카우프먼과 토니 클립튼이 동일 인물이라고 믿고 있는 대중들을 햇깔리게 만들기도 했다.[22] 영화와는 달리 실제로는 앤디 카우프먼이 폐암 판정을 받기 전인 1979년에 진행한 공연이다. 또한, 영화에서는 원로 걸그룹으로 활동했던 할머니 관객이 앤디의 부추김으로 무대에 올라가서 노래에 맞춰 춤을 추다가 심장발작으로 쓰러지는 사건이 발생하고 이후 앤디 카우프먼이 인디언 복장을하고 나타나서 주문을 외워 할머니가 다시 소생하는 퍼포먼스를 연출한 모습을 보여줬는데 실제 카네기홀 공연에서는 이런 퍼포먼스가 전혀 등장하지 않았다. 대신 앤디 카우프먼이 공연 오프닝에서 자신의 할머니가 공연을 보러 왔다고 관객들에게 말하고 공연 막바지에 카우프먼이 오프닝에서 소개한 할머니가 사실은 진짜 자신의 할머니가 아니라 자신의 친구인 코미디언 로빈 윌리엄스가 분장한 것이라는 것을 관객들에게 밝히면서 쇼의 엔딩을 장식하였다.[23] 준 라보라는 사람이다. 이 사람은 활동 당시 한국에서도 꽤 유명했다. 가수 양수경의 매니저가 이 사람에게 치료를 받고 암이 나았다는 잡지 기사 이후로 한국에서도 치료를 받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아진 것. 초능력으로 암덩어리를 몸에서 꺼낸다는 컨셉이었는데, 당시엔 지금보다 과학적 시각이 많이 옅기도 했고, 몸에서 암을 뿌리 째 뽑아내고 싶은 사람들은 매력적으로 들렸던 것. 그것이 알고 싶다 제작진이 필리핀에서 취재를 하면서 밝혀진 바로는, 존 라보 쪽 사람들이 시장에서 돼지 내장과 선지 같은 것들을 그렇게 사갔다고 한다. 그것이 알고 싶다는 스포츠 중계에서 쓰이는 고속 촬영 카메라로 수술(?)장면을 찍으면서 그가 손장난을 하는 걸 기어코 잡아냈다. 피같은 진한 색 액체가 복부에 흥건한 상태를 만들고 손을 마구 놀리며 초능력을 발휘하는 척 하면서 손 사이에 숨겨둔 돼지 내장 등을 슬쩍 꺼내고 그게 암덩어리라고 사기를 치는 것. 준 라보는 카메라 위치 때문에 기의 흐름이 막혔다느니, 촬영 허가는 해놓고 찍는 도중 무장경호원들이 난입해서 제작진을 쫓아낸다든지 하면서 열심히 방어를 해봤지만, 손보다 고속카메라가 빨랐다. 이 사람은 필리핀 어디서 시장도 해먹었다고 한다.[24] 장례식 부분에서 앤디 카우프먼의 지시에 맞추어 This Friendly World"를 따라부르는 장면은 앤디 카우프먼의 TV 스페셜 엔딩 부분에서 This Friendly World을 같이 부르는 장면을 오마주한 것이다.[25] 앤디 카우프먼의 장례식 장면을 찍을 때 영화에 나오는 모든 출연진들이 추모객으로 출연했는데 그 중에는 생전 앤디 카우프먼과 친했던 친구들도 많다보니 이들이 촬영 중에 생전의 앤디 카우프먼을 추억하며 실제로 울음을 터뜨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