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틴 드레베스(Martin Drewes : 1918년 10월 20일~2013년 10월 13일)
1. 개요
나치 독일의 군인.2. 평가
날고 기는 독일 공군의 에이스들 중에서는 그리 돋보이지 않는 52대라는 격추수를 보유했지만, 그 전과의 대부분은 독일 본토에 가장 큰 피해를 안겨주던 아브로 랭커스터나 핸들리 페이지 핼리팩스 같은 4발 중폭격기였다. 마르틴 드레베스는 대전 기간 내내 다양한 형식의 메서슈밋 Bf 110만을 고집하며 이같은 높은 전과를 거두면서도 종전까지 살아남은 점에서 야간 에이스로서는 아주 드문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3. 생애
3.1. 유년기
마르틴 드레베스는 1차 대전이 패전을 향해 치닫던 1918년 10월 20일에 하노버 근교의 작은 마을인 브라운슈바이크(Lobmachtersen-bei-Braunschweig)에서 약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930년대 말에 독일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지만, 졸업을 얼마 남겨놓지 않은 상태인 1939년에 독일 공군으로 전속을 갔다.3.2. 쌍발 전투기를 타다
드레베스 소위의 첫 임무는 북해 상공을 초계 비행 구역으로 담당하고 있던 제76폭격항공단(KG 76) 예하의 제 II 비행단에 배속되어 구축전투기 Bf 110을 모는 것이었다. 특별 편성된 이 부대는 "상어떼(Haifischgruppe)"라고 불렸다.루프트바페는 1941년 5월에 영국-이라크 전쟁에서 이라크 쪽을 지원하는 명목으로 KG4의 하인켈 He 111과 그가 속해 있던 KG 76의 중전투기들, 그리고 1대의 융커스 Ju 90이 포함된 수송기 12대로 편성된 이라크 공군 교관(Fliegerführer Irak)을 파견했다. 1차 대전의 에이스였던 베르터 융크(Werner Junck : 1895~1976 / 5대 격추)의 지휘를 받으며 중동에서 10일 남짓 치른 교전에서 드레베스 소위는 1대의 글로스터 글래디에이터 복엽전투기를 첫 제물로 삼았다. 이 전역은 당시 외롭게 독일에 맞서고 있던 영국 입장에서는 2선급 전선이어서 이들에게 맞서는 항공 세력은 구식에다 그 숫자 또한 적었기 때문에, 독일 공군 지원부대는 이라크 지상군에게 화력을 제공해주고 물자를 운반해주는 활동에 전념했다.
그러나 이들이 모술에 주둔하고 있을 때 영국 공군의 폭격기들이 급습해와서 가져간 대부분의 기체는 부서져 버렸다. 드레베스 또한 영국군 트럭 대열을 향해 기총소사를 하다가 대공 기관의 반격에 엔진이 피탄되어 첫 불시착을 경험했다. Bf 110은 현지에서 수리를 거쳐 2대를 다시 사용하게 되었으나, 5월 26일이 되자 비행 가능한 Bf 110은 남지 않았고 다음날에 드레베스의 부대는 철수했다.
3.3. 야간전투기 에이스
중동 지역에서 돌아온 후 제76구축전투항공단(ZG 76)으로 재편성된 부대는 야간전투기 부대로 전환되면서 제3야간전투항공단(NJG 3)으로 개칭되었다. 마르틴 드레베스는 종전을 맞을 때까지 활약하게 될 제1야간전투항공단(NJG 1)로 전속가기 전까지 이 부대 소속으로 독일 본토 상공을 맴돌면서 내습하는 영국 폭격기들을 격추시켰고, 훈장을 차례로 받아가며 진급을 거듭했다.1944년에 대위로 승진한 그는 NJG 1 예하 제III비행단의 지휘관 보직이 맡겨졌다. 그는 이 부대를 지휘하며 종전까지 252회를 출격하면서 앞서 언급한 52기의 전과를 거두었다. 마르틴 드레베스는 야간전투기의 후방석에 앉히는 푼커(Funker : 통신수라고 하지만 실제 임무는 레이더 조작이다)과 매우 관계가 좋은 것으로도 유명했다. 그는 유능한 통신수였던 에리히 한트케(Erich Handke : 1920~1987) 상사를 하인츠 볼프강 슈나우퍼에게 빼앗긴 후에는 임무 대부분을 게오르그 페츠(Georg "Schorsch" Petz) 상사와 함께 했다.
그는 야간전투기 조종사이자 지휘관으로 종군하는 동안 주간에 전투기 2대 - 1대의 글로스터 글래디에이터, 1대의 스핏파이어 - 를 제외하면 나머지 모두는 4발 중폭격기였다. 1기의 쇼트 스털링, 1기의 B-24, 6기의 B-17, 그리고 9대의 핸들리 페이지 핼리팩스에 더해 가장 많이 격추시킨 기종은 아브로 랭커스터 33대로, 승무원의 숫자만 세어봐도 300여명에 달한다. 이처럼 연합군에게 막심한 타격을 입힌 공적이 인정된 마르틴 드레베스 소령에게는 전군에서 839번째로 곡엽기사철십자 훈장이 서훈되었다.
3.4. 전후
독일이 항복한 후 마르틴 드레베스는 다른 많은 야간전투기 조종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영국군의 포로가 되었고, 1947년 2월에 풀려난 그는 전쟁과 관계된 모든 것이라면 지긋지긋해졌다. 그는 새로운 인생을 설계하기 위해 1949년에 브라질로 이민을 갔다. 브라질 남동부의 도시 블루메나우에 민간기 조종사로 취직하며 정착한 그는 현지에서 브라질 여성과 결혼했고, 아내가 2010년에 죽을 때까지 해로했다. 아내를 잃고 나서 고국에 방문한 그는 2013년에 다시 브라질로 돌아가 그곳에서 95세 생일을 일주일 남겨둔 10월 13일에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4. 서훈
2급 철십자 훈장 (1941년 5월 26일)1급 철십자 훈장 (1943년 4월 9일)
독일 황금십자장 (1944년 2월 24일)
공군 명예컵 (1944년 3월 31일)
기사철십자 훈장 (1944년 7월 26일)
곡엽기사철십자 훈장 제839호 (1945년 4월 1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