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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rect action day(직역하면 직접 행동의 날.) 혹은 great calcutta killings(캘커타 대학살)
1. 배경
영국에서의 독립을 목전에 둔 1946년, 인도 제헌의회에서 가장 큰 정당은 힌두교의 인도 국민 회의와 이슬람교의 전인도 무슬림연맹[1]이었다. 그리고 이 두 정당은 영국에게서 주권을 얻어내기[2] 위해 캐비닛 미션 플랜을 구성했는데 캐비닛 미션 플랜 측에서는 1946년 5월 16일 지방자치를 골자로 하여, 중앙정부를 중심으로 한 주 정부가 자치를 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무슬림 연맹 측에서는 이를 거부하고 힌두교가 대다수인 인도와 무슬림이 대다수인 파키스탄의 분할을 제안했는데, 당연히 인도 국민회의측에서는 이 제안을 거부했고, 격노한 무슬림 연맹은 당시 총재였던 모하마드 진나를 주축으로 8월 16일을 다이렉트 액션 데이, 즉 직접 행동의 날로 지정하고 무슬림들에게 무슬림이 지배하는 국가 건설을 위한 총파업을 열 것을 촉구했다.2. 서막
한편 사건이 일어난 캘커타가 속한 벵골 주의 사정은 매우 복잡했다. 이 지역은 무슬림이 전체 인구의 56%를 차지하는 상태로 전체에 42%에 불과한 힌두교에 비해 우위를 점하고 있었는데, 벵골 주의 무슬림은 대부분 동벵골에 거주하는 상태였고, 서벵골의 캘커타는 힌두교가 64%, 무슬림이 33%로 힌두교가 압도적인 상태였던 것. 문제는 여기서 나오는데, 벵골 주는 1935년부터 지방자치를 실시하고 있는 상황이었다.[3] 전술했다시피 전체 인구는 무슬림이 훨씬 더 많은 상태였고, 이런 상태이다 보니 자연히 벵골 주 의회는 무슬림이 다수를 차지하는 상황이었고, 행정수반은 자연히 무슬림이 선출되고 있었다. 이로 인해 벵골에 거주하는 힌두교의 불만은 극에 달한 상태였는데 이런 상황에서 무슬림 연맹 측에서는 벵골 주 행정수반에게 다이렉트 액션 데이인 8월 16일 하루를 공휴일로 선포하여 벵골 주의 모든 관공서, 상점을 모두 폐쇄할 것을 촉구했고, 행정수반이 이에 동의하면서 재앙의 막이 오르게 된다.3. 폭동
그리고 운명의 8월 16일. 아침부터 심상치 않은 소식들이 들려왔다. 힌두교가 대다수를 차지하는 캘커타 북부에서 사람들이 돌과 벽돌 등을 던지는 등의 소요사태가 일어난다는 보고가 경찰 본부에 들려왔다.한편 이슬람 측에서는 정오기도를 마친 후, 오후 2시경부터 캘커타의 유명한 샤히드 미나르에서 중앙 정보국(힌두교) 추산 3만 명, 캘커타 특별 부지사(이슬람교) 추산 50만명이[4] 운집해서 가두행진을 벌였다. 그러나 힌두교도 측에서 집회를 벌이고 있는 무슬림을 습격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고, 대다수 무슬림들은 대나무 등으로 무장을 한 채 집회에 참가했다. 그리고 집회가 끝난 직후, 상당수의 무슬림 참가자들이 힌두교 극단주의자들에게 습격당하고, 무슬림들 역시 힌두교인들을 공격했고, 이를 들은 캘커타의 힌두교도들이 대대적으로 무슬림들을 습격하기 시작하면서 폭동이 시작되었다.
주 정부는 부랴부랴 오후 6시부터 야간통금을 실시했으나 사태는 잦아들지 않았고, 다음날인 8월 17일, 가든 리치 섬유 조합의 총재인 압둘라 파루크와 무슬림 훌리건 단체인 Elian Mistry가 무슬림 폭동을 주도해 케소람 방적 공장을 습격해 수백 명의 힌두교 노동자들을 학살하고 공장을 약탈하는 등 폭동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갔다.
그리고 서벵골에 거주하던 수많은 무슬림들은 동벵골로 도피했고, 이는 무슬림이 대다수였던 동벵골의 반 힌두교 폭동의 씨앗이 된다.
4. 결과
폭동은 8월 21일에서야 끝이 났고 이 폭동으로 4천여명 이상의 사람들이 사망했으며, 10만여명이 집을 잃고 노숙자가 되었다.또한 이슬람 측에서 이에 대한 보복으로 벵골 주 치타공(현 방글라데시 치타공)에서 노왁 칼리 폭동을 일으켜 5천명~1만여명의 힌두교인을 학살했고[5], 힌두교 여성들을 강간하거나, 이슬람으로 강제 개종시키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고 비하르와 펀자브 등지에서의 폭동까지 합쳐져 결국 인도-파키스탄 독립의 도화선이 되었다.
여담으로 구글 이미지 검색 시 당시의 시체 사진이 많이 나오므로 주의하자. 백골화된 시신이나, 심지어 독수리가 쪼아먹는 사진까지 있다.
[1] 이후 파키스탄에서는 수많은 후신들로, 인도에서는 인도 연합 무슬림연맹으로, 방글라데시(동벵골)에서는 아와미 연맹으로 이어진다.[2] 자치령 지정을 말한다. 말은 자치령이지만 이 당시 자치령은 영국 국왕을 의전상 국가원수로 모실 뿐 내정을 독자적으로 행할 뿐만 아니라 군사권과 외교권도 독자적으로 갖는 독립국이나 다름없었다.[3] 1935년 신인도통치법 제정에 따라 인도 제국 내 모든 주들은 자치권을 가지게 되었다.[4] 이슬람 측의 추산은 신빙성이 떨어지는 것이라는 것이 정설이고, 한 무슬림 기자가 추산한 10만명 정도를 정설로 본다.[5] 이슬람 측에서는 5백명이 죽었다고 추산하고 있으나 힌두교 측에서는 5만 명이 사망했다고 주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