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김재옥 金在玉} | |
출생 | 1931년 3월 12일 |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상평리[1] | |
사망 | 1963년 10월 19일 (향년 32세) |
강원도 인제군 남면 어론리 195번지[2] | |
학력 | 음성상평국민학교[3] (졸업) 음성여자중학교 (졸업) 충주사범학교 (졸업) |
직업 | 교사 |
가족 | 배우자 이득주, 장남 이훈, 차남 이용 장녀 이경숙, 차녀 이진숙[4] 시어머니 김용화, 시숙 이관주 |
1. 개요
대한민국의 교사이자 6.25 전쟁 당시 대한민국 국군의 승리에 기여한 전쟁영웅이다.2. 생애
2.1. 초기 생애 및 교직 활동
1931년 3월 12일,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상평리에서 태어났다. 1946년 음성상평국민학교, 1949년 음성여자중학교, 1950년 5월, 충주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1950년 6월 20일 충주군 동락국민학교 교사로 부임하였다.그러나 부임한 지 5일 만에 6.25 전쟁이 발발하였으며, 전쟁이 시작된 이후에도 학교에 머물며 지역 상황을 지켜보았다.
2.2. 6.25 전쟁과 무극리 전투
조선인민군 점령과 국군 매복 작전1950년 7월 5일, 조선인민군은 음성군 금왕면 무극리를 점령한 후 충주군 방면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7월 6일, 조선인민군은 동락국민학교를 점령하고 무기와 탱크를 학교 교정에 집결시켰다. 대한민국 국군은 처음에는 충청북도 일대에서 지연전투를 벌이며 후퇴하고 있었으나 당시 제6보병사단장 김종오 대령이 조선인민군 육군 제15사단에서 경기도 이천군 장호원읍을 점령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직후에 예하 제7보병연대에 음성군 북쪽에서 매복작전을 준비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때 김재옥 교사는 조선인민군을 안심시키기 위해 "국군은 차를 타고 다 도망갔다"는 거짓 정보를 전달하였으며, 이후 혼자 몰래 국군의 매복지까지 4km를 이동하여 적의 동태를 상세히 보고하였다.
국군의 기습 공격과 전세 역전
김재옥 교사의 정보에 따라, 국군 300여 명은 조선인민군 보병 2,000여 명과 장갑차, 곡사포, 차량 등이 경계태세를 해제한 채 휴식을 취하는 순간을 포착하여 기습 공격을 감행하였다. 오후 5시 기습공격을 실시한 국군은 조선인민군의 반격이 시작되기도 전에 얼마 전 음성군에서 철수했던 제7보병연대 3대대까지 합세하여 협공을 가하면서 조선인민군을 포위하고 제압하는 데 성공해 전세를 뒤집었다. 그 결과 조선인민군 1개 연대에 해당하는 2,186명을 사살하고 132명을 생포하였고, 노획한 물자는 소련이 개입했다는 증거품으로 유엔에 보내지는 등 유엔군 파병 결의에 결정적인 자료가 되었다고 한다. 김재옥 교사는 이렇게 자신의 목숨을 걸고 국군의 승리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2.3. 이후
1950년 10월 제7보병연대 소대장이던 이득주(李得周)[5] 소위와 결혼했다. 이후 이득주 소위는 중령 진급 후 제301병기대대장으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1963년 10월 19일 강원도 인제군 남면 어론리 195번지에서 일어난 고재봉 살인 사건으로 인해 이득주 중령을 비롯한 일가족 4명, 식모 1명과 함께 피살되었다.[6] 향년 32세.대한민국 정부는 김재옥 교사의 용기와 희생을 기리기 위해 2012년 10월 1일 국군의 날 행사에서 보국훈장 삼일장을 추서하였다. 2013년, 국가보훈처로부터 "8월의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되었다.
3. 공훈
보국훈장 (2012년 10월, 사후 추서)국가보훈처 이달의 6.25전쟁영웅(2013년 8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