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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민(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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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10px -10px"신재혁(축구선수)<tablealign=center><tablewidth=320><tablebordercolor=#00a73c><tablebgcolor=#00a73c> 파일:남양주 FC 로고.svg남양주 FC
2024 시즌 스쿼드
}}}
1 주호연 · 2 전찬울 · 3 조경찬 · 4 이진섭 · 5 김태현 · 6 박건준 · 7 신재혁 · 8 이웅민
9 유주안 · 10 이종열 · 11 이새한 · 13 최원석 · 14 정진도 · 15 윤주용 · 16 김민혁 · 17 신상휘
18 장희웅 · 19 최정훈 · 20 박건우 · 21 한정우 · 22 장성돈 · 24 강지완 · 25 염경민 · 30 박천준
32 박상우 · 33 김유환 · 36 김경민 · 44 조승원 · 70 최승호 · 77 신성재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김성일 ·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정광민 ·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김경민
* 본 문서는 간소화한 것입니다. 스쿼드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여기를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 타 구단으로 임대한 선수는 제외했습니다.
파일:김경민 남양주.jpg
'''남양주 FC No.36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1px 4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003894; font-size: .8em"'''
김경민
(金耿民 / Kim Kyeong-Min)
<colbgcolor=#00a73c><colcolor=#fff> 생년월일 1990년 8월 15일 ([age(1990-08-15)]세)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신체 조건 186cm, 80kg
포지션 센터백, 수비형 미드필더
학력 조봉초등학교
둔촌중학교
언남고등학교
연세대학교
소속팀 인천 유나이티드 FC (2013~2017)
부천 FC 1995 (2013 / 임대)
상주 상무 FC (2014~2015 / 군 복무)
촌부리 FC (2018)
뜨랏 FC (2019)
촌부리 FC (2019)
경남 FC (2020)
화성 FC (2021~2023)
남양주 FC (2024~)
지도자 남양주 FC (2024~ / 플레잉코치)

1. 개요2. 선수 경력
2.1. 유소년 시절2.2. 인천 유나이티드 FC
2.2.1. 2013 시즌2.2.2. 상주 상무 (군 복무)2.2.3. 2015 시즌2.2.4. 2016 시즌2.2.5. 2017 시즌
2.3. 촌부리 FC2.4. 경남 FC2.5. 화성 FC2.6. 남양주 FC
3. 플레이 스타일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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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축구선수이며, 포지션은 수비수. 수비형 미드필더도 볼 수 있다.

2. 선수 경력

2.1. 유소년 시절

광주광역시에 위치한 조봉초등학교에서 처음 축구를 시작했다. 본래 육상부 출신이었다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축구부 감독의 권유를 받아 축구로 전향했다. 남들보다 축구선수 생활의 시작이 늦었기에, 이를 메우기 위해서 더욱 노력했다고. 축구 실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그만두려고 한 적도 있었지만 감독의 설득과 과거 경험 이야기를 들으면서 밤에도 개인 운동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이 습관을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에도 이어가면서 기량도 일취월장했다고. 특히 중학교 동문인 이창용과 운동을 자주 했다고 한다.

광주에서 생활하던 김경민은 상일중학교를 다니다가 둔촌중학교로 전학을 간 이후부터 서울 지역에서 축구 생활을 이어갔다. 본래는 윙어나 미드필더로 주로 활약했고, 언남고등학교 때는 유병수와 함께 투톱으로 나선 적도 있었다. 그리고 이를 거쳐 중앙 수비수로 다시 포지션을 변경했는데, 사실 감독은 처음부터 김경민을 수비수로 쓰고 싶었고 이를 위해 공격수의 심정을 이해해보라는 의미에서 그를 최전방에 뒀다고 한다.

언남고등학교에서 주전 수비수로 활약한 김경민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연세대학교로 진학했다. 연세대로 온 뒤 초반에는 교체 멤버에 머물렀지만, 장현수가 졸업한 이후부터 주전으로 도약했다. 졸업 직전에는 팀의 주장까지 맡으며 핵심 선수로 중용되었다.

2.2. 인천 유나이티드 FC

2.2.1. 2013 시즌

연세대학교를 졸업한 후 2013년 드래프트를 통해 3순위로 지명되어 인천에 입단하였다. 드래프트 참가 이전부터 주변에서 인천이 자신을 원한다는 말이 들렸는데, 실제로 지명되어 기뻤다는 소감을 밝혔다. 대학교 시절 김봉길 인천 감독의 아들인 김신철과 함께 뛰어서 인천에 원래부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수비수 포지션 특성 상 입단하자마자 기회를 받기는 어려웠다. 특히 당시 인천은 상위 스플릿에 진출할 정도로 좋은 스쿼드를 보유하고 있었고, 주전 수비수 듀오인 안재준-이윤표의 위상이 엄청났다. 이들 중 결원이 발생하더라도 김태윤, 전준형이 빈 자리를 메웠기에 반 시즌간 2군에 머물렀다.
2.2.1.1. 부천 FC 1995 (임대)
2군에 머무르던 도중 여름 이적시장을 통해 2부리그 팀인 부천으로 임대를 떠났다. 당시 부천에는 연세대 시절 동기인 김신철과 박재홍이 있었고, 두 선수 모두 신인인데도 제법 많은 기회를 받고 있었다. 특히 박재홍은 김경민과 함께 연세대에서 센터백으로 호흡을 맞춘 선수였기에 기대를 모았다.

반 시즌간 김경민은 부천 소속으로 리그 13경기에 출전하였고, 중간에 데뷔골까지 성공시키는 등 만족할만한 성적을 거두었다.

2.2.2. 상주 상무 (군 복무)

임대가 종료되고 다시 팀에 돌아왔지만, 인천에는 여전히 이윤표 - 안재준이 건재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에 더 많은 경험을 쌓기 위해 상주 상무로 입대를 선택했다.

빠른 입대를 선택했지만 워낙 스쿼드가 좋은 팀이었기에 출전 기회를 받기엔 어려움이 있었다. 결국 복무 기간동안 리그 1경기 출전에 만족해야 했다.

2.2.3. 2015 시즌

2015년 10월 경 전역하여 인천에 복귀했다.

상무에서도 많은 경기를 뛰지 못했고, 복귀했을 당시 인천의 수비진 상황이 워낙 탄탄했기에 큰 기대를 받진 못했다. 요니치와 이윤표가 있던 수비라인은 리그 최소 실점을 달성할 정도로 상당한 기여도를 보였고, 김경민이 군대를 갔다오긴 했지만 여전히 젊은 선수였기에 경쟁이 쉬워보이지는 않았다.

그런데 35라운드 광주 FC와의 경기를 앞두고 주전 수비형 미드필더 김원식이 경고 누적으로 이탈하게 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인천은 그 전부터 김원식의 후보 선수가 없어서 골머리를 앓고 있었고, 여름에 영입한 이슬기도 부상에 시달리면서 거의 출전하지 못했다. 이에 김도훈 감독은 어린 시절 미드필더로 뛰어본 적이 있는 김경민을 수비형 미드필더로 기용했다. 전역하자마자 얼마 지나지 않아 인천 소속 데뷔전을 치르게 됐는데, 입단 후 거의 3년만에 성사된 기회였다. 실수 없이 무난하게 첫 경기를 치른 김경민은 팀에 녹아들었다는 평을 받았다.

FA컵 결승전에도 김원식이 원 소속팀을 만나기 때문에 뛸 수 없는 상황이라 김경민의 기용 가능성이 점쳐졌지만, 프로 경험이 더 많았던 용재현 시프트를 선택하면서 교체명단에만 든 채 출전은 무산되었다. 데뷔는 성공했지만 그 후로는 출전 기회가 오지 않으면서 1경기 출전으로 시즌을 마감했다.

2.2.4. 2016 시즌

2016 시즌에도 인천과의 동행을 이어가게 됐다. 시즌 시작 전부터 구단이 찍는 영상에 얼굴을 많이 비치며 전보다 팀 내 위상이 올라가리라는 기대를 받았다. 인터뷰를 통해 이번 시즌에는 수비형 미드필더에 기용될 가능성이 높음을 시사했고, 실제로 김원식이 이탈한 자리에 김경민이 그대로 기용되기 시작했다.

그 전 시즌에 보여준 모습이 준수했기에 기대감이 컸지만, 초반에 기회를 받았을 때는 아쉬운 모습을 보여줬다. 본 포지션이 아닌 자리에서 플랜 A로 자리잡기에는 아직 흔들리는 기색이 있었고, 본인 외에도 팀 전체의 경기력이 무뎌진 모습을 보여 고전하는 상황이었다. 결국 초반 두 경기에서 부진한 여파로 주전 경쟁에서 밀려나 R리그에 주로 출전하였다. 가끔 명단에 들기는 했으나 인천은 중원에 새로 영입한 노장 김태수를 주로 기용했고 김경민은 수비수, 미드필더 두 포지션에서 다소 애매한 상황에 놓여있었다.

거의 잊혀져가던 상황이었지만 김도훈 감독이 경질된 이후 시작된 이기형 대행 체제에서 다시 기회를 받았다. 배승진이 전역 후 복귀하면서 수비형 미드필더 자리를 채운 상황이었지만 이기형 대행은 배승진을 확실한 주전으로 기용하는 대신 김경민과 로테이션 체제를 가동하여 경쟁의 기회를 줬다. 초반에는 전문 수비수 출신인 김경민을 후반에 투입하여 걸어잠그는 형태로 기용했고, 포항 스틸러스 원정 경기에서 선발로 출전하여 훌륭한 수비 기여도를 보인 덕분에 출전 시간을 늘릴 수 있었다. 수비형 미드필더 포지션에서 특히 '수비'에 중점을 둔 플레이를 주로 선보였다.

리그 최종전 수원 FC와의 경기에서도 선발로 출전했다. 꼭 이겨야 하는 중요한 경기에서 선택을 받았지만 부담감을 떨쳐내고 좋은 경기력을 선보였다. 이따금 거친 플레이를 보이기도 했지만 좋은 태클로 상대의 공격을 저지하는 모습도 자주 보여주면서 상대의 공격을 저지했다. 결국 팀의 잔류를 이끈 선수 중 하나가 되는 데 성공.

그리고 시즌 종료 후 인천과 재계약을 체결하였다! ## 다음 해에는 이전의 만년 후보 위치에서 벗어나 로테이션 멤버로 팀에 보탬이 될 것으로 기대받고 있다.

2.2.5. 2017 시즌

이전 시즌 막판의 활약도 있었고, 자신을 중용했던 이기형이 정식 감독으로 승격되면서 시즌 초부터 출전 기회를 제법 받았다. 그러나 지난 시즌 막판에 비해 아쉬운 평가를 받았다. 수비 상황에서 보여주는 능력은 확실하지만 집중력이 종종 흔들리는 면이 지적되었고, 수비에 주안점을 두긴 했어도 미드필더로 나오고 있는 상황인데 공격 기여도를 더 올려야 한다는 평가도 나왔다.

시즌 초의 김경민은 포메이션 상 수비형 미드필더로 이름을 올렸으나 실제 경기에서는 센터백과 수비형 미드필더 사이 어딘가에 주로 위치하였다. 그의 움직임에 따라 백쓰리, 백포를 오가는 형태였다. 전술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맡은 건 분명한 사실이었으나, 전개 및 전진 상황에서의 아쉬움이 팬들에게는 크게 다가오는 상황이었다. 아무래도 2017년 인천 공격진이 치명적인 부진에 시달리다보니 중원의 공격 가담도 아쉽게 느껴지는 상황이었다.

결국 시즌 중반부터 이기형 감독이 김경민 중심 전술 대신 새로운 중원 전술을 실험하면서 출전 기회가 줄어들었다. 당시 최고의 폼을 보이던 한석종을 중심으로 전술이 개편되었고, 수비진 빌드업의 중심도 코너 채프먼에게 맡기면서 김경민의 위치가 애매해진 상황이었다. 시즌 막판에는 중원에 한석종, 김도혁, 이상협이 주전으로 출전했고 수비 라인에는 채프만, 하창래가 주로 출전하면서 기회를 받지 못하였다. 인천 입단 후 가장 많은 경기를 치른 시즌이긴 했지만, 동시에 아쉬움도 남긴 시즌. 2017년 리그에서 14경기에 출전하였다.

2.3. 촌부리 FC

2017 시즌 종료 후 이적설이 돌기 시작했다. 이후 태국 프리미어 리그 소속의 촌부리의 훈련에 합류한 사진이 공개되면서 이적이 확정되었다. 촌부리 이적 이후에는 주전으로 활약하면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2018년 인천의 마지막 경기에서 숭의 아레나 파크를 찾아왔다. 팬들도 그에게 박수와 콜을 보내면서 보답했다. 다들 그가 떠난 것을 아쉬워하는 분위기였다.

시즌 종료 후 촌부리는 아시아 쿼터를 채울 선수로 새로이 박현범을 영입하였고, 이에 따라 김경민은 태국 리그 내의 다른 팀인 뜨랏으로 이적을 확정지었으나 2019년 2월 영입을 취소하면서 다시 촌부리로 돌아갔다.

2.4. 경남 FC

촌부리와의 계약이 끝난 후, K리그2로 강등된 경남 FC에 입단하면서 국내 무대에 복귀하였다. 1시즌동안 리그 8경기와 FA컵 2경기에서 뛰었으며, 시즌 종료 후 계약만료로 팀을 떠났다.

2.5. 화성 FC

경남을 떠난 후 반년간 무적 신분으로 지내던 김경민은 2021년 여름이적시장을 통해 K3리그 화성 FC에 입단하였다. 화성 입단 이후 부동의 주전 수비수로 기용되었다. 2022 시즌에는 수비수임에도 상당한 득점력을 뽐내며 '수트라이커'라는 칭호도 얻었다. 화성의 500번째 골의 주인공이 바로 김경민.

원래 화성에 더 나이가 많은 선수들이 있어서 제법 나이가 있는 선수인데도 중견급 선수로 여겨졌는데, 2023 시즌을 앞두고 고령 선수들이 팀을 떠나면서 본격적으로 베테랑 역할을 수행하게 됐다. 그 영향으로 팀의 부주장 역할까지 맡게 되었다.

카이오 마르셀로가 영입된 후 서브 멤버로 내려왔다. 기용되는 경우에는 주로 쓰리백의 중앙에 서는 편. 시즌 중반까지는 출전 기회가 많이 줄었지만, 카이오와 구대엽이 부상을 당한 이후 주전 선수로 복귀했으며 후반기에는 꾸준한 활약을 펼쳐 리그 우승에 공헌했다.

2.6. 남양주 FC

2024 시즌 K4리그에 참가하는 남양주 FC로 이적하고 초대 주장을 맡게되었다.

3. 플레이 스타일

어릴 때부터 끈질기고 투지 넘치는 수비력이 장점이라는 평가를 들었다. 대학교 입학 당시까지는 센터백치고는 키가 크지 않고 마른 편이라 피지컬적 약점을 지적받았으나 신체적 능력을 크게 보강하여 준수한 신체 능력을 보유하는 선수로 거듭났다.

인천에서 같이 뛰던 동료 선수들 중 다수가 파이터 기질이 있는 데 반해, 김경민은 이를 커버해주는 모습을 자주 보여줬다. 김경민 본인도 거친 모습이 있긴 했지만, 당시 인천 수비진을 구성했던 이윤표, 하창래, 고르단 부노자 등이 훨씬 파이터적인 면모가 강하다보니 이들이 내주는 공간을 막아줄 카드로 제법 중용받았다. 뛰어난 슬라이딩 태클 능력을 비롯하여 수비적인 감각은 준수하였으나 집중력 저하 및 자잘한 미스로 인해 주전으로 올라서지는 못했다.

수비형 미드필더로도 자주 뛰었으나 평가는 미묘했다. 수비에 상당히 치중한 유형의 선수였는데 본 포지션이 아니기는 했으나 공격 전개 및 직접적인 전진이 많이 부족해서 답답하다는 반응이 있었다. 슈팅 능력은 생각보다 준수했고 순수 전개 능력 자체는 나쁘지 않았으나 공격 상황을 주도적으로 이끌지 못해서 템포에 악영향이 있었다. 상대의 압박에 대처하는 부분도 아쉬웠는데, 대체적으로 본 포지션이 아닌 위치에서 뛰다보니 자연스레 마주하는 문제점들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아예 수비를 강화하려는 원포인트 롤로 종종 활용될 때 오히려 더 좋은 모습을 보여줬다.

1부에서는 단점도 종종 지적을 받았지만 하부리그 기준으로는 상당한 영향력을 보여주고 있다. 수비 스킬은 물론이고 주변을 이끄는 모습, 백쓰리의 일원으로 전개하는 빌드업 역시 준수한 편.

4. 여담

  • 인천 유나이티드를 거쳐간 선수 중 데뷔전을 치르기까지 가장 오랜 시간이 걸린 선수이다. 2013년에 입단해서 처음으로 뛸 수 있던 경기는 3월 3일 경기였는데, 실제 데뷔는 2015년 10월 25일에 성사되었으니 966일만에 경기를 뛴 셈. 2위는 데뷔까지 820일이 걸린 이호석으로, 김경민과 마찬가지로 중간에 군대를 다녀와서 데뷔가 더욱 늦어졌다.
  • 화성의 500호골을 넣었을 당시 본인은 몇 번째 득점인지 몰랐고, 경기 종료 후에 해당 기록을 알았다고 한다.
  • 인천 시절 르언 쑤언 쯔엉과 친한 사이였다. 쯔엉으로부터 '한국인 선생님'이라고 불린 적도 있었다. 외국인 선수들에게 훈련 스케줄을 번역해서 알려줄 정도로 언어에 능통한 편이고, 프로 데뷔 당시에는 미국 유학을 가보고 싶다고 한 적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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