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정식 명칭: 교향곡 E플랫장조(Sinfonie Es-dur/Symphony in E flat major)
러시아 작곡가 차이콥스키의 미완성 교향곡이며 후대에 작품의 성립 과정을 역추적해 재구성한 판본들이 있다.
교향곡 6번에도 언급되어 있지만, 원래 6번이 될 예정이었던 곡은 이 곡이었다. 1891년 5월 미국 순회 공연을 마치고 귀국하던 때부터 작곡에 착수했고 귀국 후에도 한 동안 작곡에 매달렸지만, 아무래도 더 급하게 써야 했던 발레 '호두까기 인형'과 오페라 '욜란타' 때문에 진척도가 상대적으로 낮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바쁜 와중에도 차이콥스키는 이듬해 6월에 1악장과 4악장을, 이어 11월 4일에 전곡의 초벌 작곡을 완료했고, 곧바로 1악장부터 관현악 편곡 작업을 시작했다. 심지어 이 곡을 다음해 2월에 모스크바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자선 공연에서 초연할 구체적인 일정까지 잡고 있었는데, 계속 쓰다 보니 곡 자체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결국 작곡을 중단했다.
1892년 12월 19일에 자신의 조카이자 비밀 연인이었던 블라디미르 '봅' 다비도프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작곡 중단의 이유는
다만 차이콥스키는 저 협주곡을 쓰면서도 별로 자신이 없었는지, 1893년 10월 6일 폴란드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였던 지그문트 스토요프스키에게 보낸 편지에서 '원래 3악장제로 하려고 했지만, 1악장 외에는 별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니 단악장으로 마무리지으려고 한다' 고 밝혔다.
차이콥스키는 계획대로 1악장 만을 협주곡으로 개작했지만, 교향곡 6번의 초연 후 출판이나 초연 교섭을 하지도 못하고 수수께끼의 죽음을 맞이했다. 협주곡의 자필 악보는 다른 미완성 초고 등과 함께 잠시 방치되었다가 장례식이 끝난 뒤 후배 세르게이 타네예프와 차이콥스키의 동생 모데스트 차이콥스키가 유품을 정리하던 중 발견되었고, 곡은 차이콥스키의 의도 대로 피아노 협주곡 제3번으로 분류되어 작품 번호(opus, 약칭 op.) 75번을 부여받고 사후 초연/출판되었다.
하지만 차이콥스키의 의도를 모르고 있던 타네예프와 모데스트는 저 협주곡이 1악장만 완성된 미완성작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나머지 2악장과 3악장으로 여겨지는 곡을 찾기 위해 계속 자필 악보들을 뒤적이다가 그런 의도인 것 같은 두 개의 악장-원래 계획한 교향곡에서 각각 2악장과 4악장이었던 곡들-을 찾아냈다. 이 악장들은 타네예프가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해 편곡하고 첨삭한 뒤 '안단테와 피날레' 라는 이름으로 작품 번호 79번이 매겨져 출판되었다.
그리고 제정이 무너지고 소련이 성립된 뒤로도 한참이 지난 1951년에 차이콥스키 작품을 연구하던 음악학자 겸 작곡가 세묜 보가티료프(Семён Богатырёв/Semyon Bogatyrev, 1890-1960)가 피아노 협주곡 제3번과 안단테와 피날레, 그리고 동시대 작품 중 교향곡의 3악장으로 의도된 것으로 보이는 피아노 소품을 다시 교향곡으로 짜맞추는 작업을 시작했고, 이 결과물로 재조립된 것이 이 교향곡이었다.
2. 곡의 형태 (보가티료프 보완판 기준)
3번을 제외한 모든 차이콥스키 교향곡들과 마찬가지로 4악장으로 구성될 예정이었고, 보가티료프도 이에 따라 고전적인 악장 배치로 곡을 재조립했다.소나타 형식인 1악장은 차이콥스키가 전개부 까지는 관현악 편곡을 완료했기 때문에 다소 손이 덜 간 대목으로, 팀파니의 여린 트레몰로와 저음 현악기의 길게 끄는 음 위에서 바순이 연주하는 첫 주제로 시작한다. 이 주제를 바이올린과 비올라가 받아 반복한다. 이 주제가 여느 후기 차이콥스키 교향곡처럼 변형과 발전을 거듭한 뒤, 클라리넷이 연주하는 서정적인 두 번째 주제가 이어진다.
이 주제 역시 첼로 등 다른 악기들이 이어받으면서 진행되다가 팀파니의 크레센도 트레몰로와 첫 주제의 단편이 가로막듯이 나오면서 러시아 민속 춤곡 풍의 경쾌한 세 번째 주제가 이어진다. 이 세 번째 주제도 여러 형태로 변형되어 진행되다가 잦아들고 바로 전개부로 이어진다.
전개부는 첫 번째 주제 위주로 진행되는데, 현악기와 관악기가 문답식으로 진행하다가 음의 움직임이 많아지면서 긴장감이 더해지고 그 위에서 금관악기들이 주제의 단편을 이어서 크게 연주하며 부풀어오르다가 차츰 진정된다. 이어 바이올린이 연주하는 새로운 형태의 서정적인 이행부가 뒤따르고, 목관이 피아노 협주곡 버전 카덴차의 토대가 된 짧고 경쾌한 추가 이행부를 연주한 뒤 첫 주제가 전체 관현악에 의해 기세 좋게 연주되면서 재현부로 들어간다.
재현부 이후로는 차이콥스키가 관현악 편곡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보가티료프는 주제 제시부와 피아노 협주곡 버전의 관현악 용법을 참고해 직접 편곡 작업을 했다. 두 번째 주제를 클라리넷 대신 첼로가 연주하고, 세 번째 주제도 악기 편성과 조성만 바꿨을 뿐 정석대로 진행된다. 이어 첫 번째 주제의 음형을 응용한 종결부로 이어지면서 활기있게 마무리된다.
느린 2악장은 A-B-A' 세도막 형식으로, 안단테와 피날레의 안단테 부분을 참고해 관현악용으로 편곡했다. 다만 타네예프가 완성한 악보는 편성이 너무 단출했기 때문인지, 관현악의 몸집을 많이 키워놓았다. 클라리넷의 서정적인 주제 연주로 바로 시작하고, 현악기가 이어받아 반복하면서 조금씩 변형시킨다. 여기에 클라리넷과 바순이 조금 더 율동감 있는 부주제를 더하고, 이 부주제도 조금씩 길이를 늘이면서 변형된 뒤 중간부로 이어진다.
중간부에서는 첼로가 연주하는 새로운 주제로 전개되고, 조금씩 긴장감을 더해가면서 팀파니까지 가세해 클라이맥스를 이룬뒤 잦아든다. 첼로 주제의 상행 음형을 바탕으로 한 이행부가 이어진 뒤 다시 클라리넷이 제시한 주제를 호른이 연주하며 후반부에 들어간다. 호른의 가락을 역시 현악기가 받아서 연주하고, 이후의 진행은 전반부와 대동소이하다. 이어 호른과 바순이 차례로 연주하는 짤막한 종결부로 마무리된다.
3악장은 협주곡 용도로 차이콥스키의 생전 또는 사후에 전용된 부분이 없기 때문에, 동시대 작품 중 '18개의 피아노 소품(18 Morceaux for piano op.72)' 에서 열 번째 곡인 스케르초 환상곡(Scherzo-Fantaisie)을 관현악으로 편곡했다. 클라리넷의 다소 익살스러운 주제 연주로 시작하고, 트라이앵글의 단타 연주와 현악기의 피치카토가 뒤따라 수식해준다. 이 주제 음형을 계속 변형시키면서 진행하다가 다시 첫 주제 부분으로 돌아오고, 현악기들의 빠른 트레몰로 연주가 자잘하게 새겨지는 이행부를 거쳐 트리오(중간부)로 진입한다.
트리오에서는 하프가 오블리가토[1]를 연주하는 가운데 오보에가 러시아 민요 스타일의 호흡 긴 가락을 연주한다. 이 가락을 다시 현악기 등 다른 악기가 반복하면서 진행하고, 심벌즈와 트라이앵글이 더해져 다소 시끌벅적한 이행부를 거친 뒤 초반부의 스케르초로 돌아온다. 곡의 진행은 앞부분과 거의 똑같으며, 뒤에 별도의 종결부가 더해진 것만 다르다.
4악장은 안단테와 피날레의 피날레 부분을 참고해 복원했고, 타네예프가 피아노와 관현악 버전으로 편곡하면서 집어넣은 스네어드럼과 심벌즈 외에 베이스드럼과 트라이앵글도 추가해 가장 큰 편성으로 만들었다. 심벌즈의 단타가 더해진 기세 좋은 전체 관현악의 첫 주제 연주로 바로 시작하며, 이어 발레 풍의 경쾌한 경과구가 뒤따른다. 두 번째 주제는 트라이앵글 연주를 곁들여 오보에와 바순이 연주하며, 다소 단순하고 경쾌한 모양새로 구성되어 있다.
두 번째 주제가 제시된 뒤에는 첫 번째 주제의 단편을 이용한 속도감 있는 이행부가 뒤따르고, 이어 첫 번째 주제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 다만 그대로 반복되지는 않고 이행부의 날렵한 바이올린 댓구가 덧붙는 등 약간의 변화를 주고 있다. 이어 바이올린과 비올라가 연주하는 다소 우스꽝스러운 모습의 춤곡풍 가락이 나온다. 여기에 첫 번째 주제의 단편이 끼어들면서 대위법적으로 이어지다가 심벌즈의 강타로 중단되고, 트롬본과 트럼펫이 주축이 된 금관이 연주하는 다소 위압적인 코랄풍 악구가 이어진다.
하지만 이 분위기 전환은 아주 잠시일 뿐이고, 다시 속도감을 회복해 첫 번째 주제가 한 차례 더 제시된다. 이어 두 번째 주제를 재료로 한 이행부가 스네어드럼 연주를 배경으로 나오면서 점차 소리가 커진 뒤, 두 번째 주제 전체가 이번에는 금관악기와 타악기가 전면에 나오는 화려하고 장엄한 행진곡 스타일로 연주된다. 종결부는 빠른 16분음표 위주로 분주하게 진행되면서 고전적인 해피 엔딩으로 마무리된다.
관현악 편성은 플루트 3(3번 주자는 피콜로를 겸함)/오보에 2/클라리넷 2/바순 2/호른 4/트럼펫 2/트롬본 3/튜바/팀파니/심벌즈/트라이앵글/스네어드럼/베이스드럼/하프/현 5부(제1바이올린-제2바이올린-비올라-첼로-콘트라베이스). 물론 보가티료프 자신(과 타네예프)의 편곡에 의한 것이지만, 그 동안 차이콥스키의 번호 붙은 교향곡에서는 한 번도 쓰이지 않은 스네어드럼과 하프가 추가되어 있다.
3. 초연과 출판
1955년에 완성된 보가티료프의 재구성판은 1957년 2월 7일에 모스크바에서 미하일 테리안 지휘의 모스크바 지구 교향악단(현 모스크바 국립 아카데미 교향악단)에 의해 초연되었고, 이듬해 레오 긴즈부르크 지휘의 소련 국립 교향악단에 의해 녹음되어 소련 국영 음반사인 멜로디야에서 첫 음반으로 나왔다. 이후 소련 각지에서 간헐적으로 연주된 뒤 1962년 2월 16일에 유진 오먼디 지휘의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가 미국 초연했고, 초연 직후 콜럼비아에서 같은 악단과 지휘자의 연주로 두 번째 녹음을 취입했다.출판은 1961년에 소련 국립음악출판소(Muzgiz)에서 이루어졌고, 이후 서독의 시코르스키 음악출판사와 미국의 칼무스 음악출판사 등에서 라이선스를 얻어 관현악 총보와 파트보를 간행했다.
4. 평가
보가티료프의 재구성판에 대한 평은 별로 좋지 않았다. 애초에 차이콥스키 자신이 별로라고 생각해 포기한 작품을 굳이 다시 짜맞춰야 할 이유가 있었냐는 비판이 있었고, 또 이 곡에 멋대로 '교향곡 제7번' 이라는 번호를 붙인 음반사와 언론들의 경솔한 마케팅 전략과 보도 행태에도 문제가 있다는 지적도 이어졌다. 이 때문에 위키피디아에서는 이 곡의 문서에 7번 등 일체의 번호를 붙이지 않고 있다. 이 항목 역시 번호를 매기는 것이 작곡자의 의도에 반하는 것으로 여겨 그대로 따랐다.이 때문인지 이 곡의 연주와 녹음 빈도는 차이콥스키 교향곡 뿐 아니라 작품 전체를 통틀어 처참한 수준을 아직도 면치 못하고 있다. 작곡가의 진정성을 따지기 전에, 객관적으로 봐도 작품 자체가 별로 매력적이지 않다는 점도 역시 큰 문제이기도 하다.
소련에서도 1958년 나온 첫 음반 이후로 이 곡을 녹음한 지휘자와 관현악단은 30년 넘게 전무했고, 소련이 무너지기 직전이었던 1991년에 한국 지휘자 원경수가 모스크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해 홀마크라는 마이너 음반사에 녹음한 것이 두 번째이자 통산 세 번째 음반이었다.[2] 이런 푸대접은 서유럽과 미국에서도 마찬가지여서, 2014년 현재 전세계를 통틀어 이 작품이 담긴 음반은 겨우 일곱 종류 밖에 없다.
요약하자면 '재미로 한두 번 듣기에는 괜찮지만 절대 걸작은 아닌, 졸작과 범작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작품' 이라고 할 수 있다. 여러 음악학자들이 이리저리 손대고 있는 브루크너의 교향곡 9번이나 말러의 교향곡 제10번과 달리 보가티료프 외에는 복원에 손댄 사람이 전무했던 것도 이 때문인 듯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