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31 22:21:21

교향곡 제3번(브루크너)

브루크너의 교향곡
00번 1번 0번 2번 3번
4번
(낭만적)
5번 6번 7번 8번 9번
(미완성)


정식 명칭: 교향곡 제3번 D단조
(Sinfonie Nr.3 d-moll/Symphony no.3 in D minor)


귄터 반트 지휘, 북독일 방송 교향악단 1992년 10월 3일[1] 실황. 1889년 최종판을 사용했다.

1. 개요2. 곡의 형태3. 초연4. 판본
4.1. 1873년판
4.1.1. 1874년판4.1.2. 1876년판 (2악장)
4.2. 1877년판4.3. 1889년판
4.3.1. 1890년 개정판(Revised version)
4.4. 분석
5. 기타

1. 개요

안톤 브루크너의 다섯 번째 교향곡으로, 별칭은 '바그너' 혹은 '바그너 교향곡(Wagner-Sinfonie/Wagner Symphony)'. 하지만 브루크너 자신이 공식적으로 붙인 것은 아니었고, 당대에 오히려 브루크너까들이 곡을 비꼬기 위해 조롱조로 부른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브루크너의 교향곡 가운데서는 시기적으로 중기[2]를 여는 작품이며, 이 3번 교향곡부터 본격적으로 연주 빈도가 높아진다. 앞선 교향곡들은 완성도가 다소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기 때문에 브루크너 스페셜리스트라 불리는 지휘자들 가운데서도 이 곡부터 레퍼토리에 포함하는 지휘자들이 있다.[3]

1872년부터 작업을 시작하여 1873년 12월 31일에 완성했다. 작곡 도중에 그토록 염원하던 리하르트 바그너를 바이로이트에서 처음 만나게 되었다. 이때 브루크너는 이미 완성시킨 2번과 아직 작곡 중이었던 3번을 바그너에게 보여주고 바그너에게 헌정할 목적으로 선택을 부탁했다. 바그너는 3번을 택했고, 완성 뒤 브루크너는 3번 교향곡을 바그너에게 헌정했다.

이렇게 바그너에게 헌정된 교향곡 3번에는 바그너 음악에서 차용한 인용구가 여럿 있었다. 그러나 여러 차례에 개정을 거치면서 바그너 인용구는 거의 사라졌다.

작곡을 완료한 이듬해부터 빈 필과 여러 차례 리허설을 가졌으나 초연은 계속 연기되었다. 그때마다 브루크너는 작품을 개정했고, 그 결과 이 작품은 브루크너 교향곡 가운데서도 가장 복잡한 판본 문제를 가진 작품이 되었다. 초판에 포함되었던 바그너 인용구는 이 과정에서 거의 삭제되어 초연 시점에는 사실상 하나를 제외하고 바그너로부터 직접 인용한 부분은 모두 제거되었다.

1877년 대대적인 개정을 거친 끝에 마침내 빈 필을 통해 초연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대놓고 바그너빠를 인증한 결과 빈에서 초연은 전작인 1번과 2번의 그것을 능가하는 크나큰 실패를 기록했다. 특히 브람스파의 거두 에두아르트 한슬릭은 브루크너가 자살 충동을 느낄 정도로 가혹한 비판을 가했다.

2. 곡의 형태

마찬가지로 4악장 구성이고, 소나타 형식(1, 4악장)과 3부 형식(2, 3악장)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위에 잠깐 쓴 것처럼 여러 차례의 대폭 개정을 통해 곡의 구조까지 계속 바뀌었고, 최종적으로 개정을 완료한 1889년에 이르러서는 상당 부분 삭제되고 긴축된 형태로 다이어트가 이뤄졌다.

처음 완료했을 때는 바그너에게 바친다는 동기 때문이었는지 '트리스탄과 이졸데' 나 '발퀴레' 등 바그너 오페라에서 인용한 악상들이 곳곳에 사용되었다. 하지만 하도 이걸 가지고 갈구는 바그너까들이 많아서, 여러 차례 개정을 거치면서 결국 바그너 인용 구절을 거의 다 지워버렸다.[4]

다만 바그너 인용으로 곡이 더 바그너스러워졌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브루크너 교향곡으로서 더 전형적인 모습이 많이 나타나는데, 1악장 첫머리에선 희미한 현의 트레몰로 위에서 트럼펫 솔로가 조용히 주제를 부는 등 금관악기를 당시 관점에서 꽤 파격적으로 쓰고 있다.[5]

브루크너 특유의 파이프오르간 스타일 사운드도 이 곡을 기점으로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고, 4악장에서는 선행 세 개 악장의 중심 주제를 가져와 총결산하는 기법도 쓰고 있다. 또한 같은 악장의 후반에 등장하는 반음계적 모티브는 다음 교향곡인 4번 1악장에 거의 비슷한 형태로 등장하기도 한다. 여러 모로 봤을 때 브루크너 교향곡의 중기를 장식하는 걸작인데, 실제로 00번0번을 위시해 초기 교향곡을 듣보잡으로 여기는 지휘자들도 이 3번에서부터 레퍼토리를 구축한 경우가 많다.[6]

관현악 편성은 플루트 2/오보에 2/클라리넷 2/바순 2/호른 4/트럼펫 3/트롬본 3/팀파니/현 5부(제1바이올린-제2바이올린-비올라-첼로-콘트라베이스)라는 확대된 2관 편성 스펙. 다만 2번까지는 두 대였던 트럼펫이 이 곡에서부터 세 대로 늘어난다.

3. 초연

교향곡 2번의 초연이 실패했지만, 1873년 이 곡이 완성되자 지휘자 요한 헤르베크는 다시 한 번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설득해서 마침내 1874년부터 초연 준비를 시작했다. 그러나 연습을 한 차례 했지만 단원들이 곡의 규모와 연주 기술을 가지고 개기는 바람에 초연은 취소(연기)되었다. 이후 실제로 초연되기까지 수년간 '리허설 → 초연 취소→ 작품 개작 → 리허설 재개 → 초연 취소 → 다시 개작' 싸이클이 몇차례나 반복되었다.

거의 매년 리허설 재개와 개작이 반복된 끝에 브루크너는 1877년에 곡을 대폭 개정했다. 특히 바그너 인용구를 대폭 삭제했고, 곡의 규모를 줄여 연주시간도 상당히 단축되었다. 특히 2악장과 4악장이 대폭 삭제되었을 뿐만 아니라 2악장은 후반부가 거의 새롭게 쓰였다. 개정 완료 후 브루크너는 헤르베크와 교섭을 재개했고, 헤르베크는 지휘가 서투른[7] 브루크너 대신 자신이 직접 빈 필을 지휘해 초연하기로 했다.

하지만 공연 준비 단계까지 간 상태에서 헤르베크가 갑작스레 황천길 테크트리를 타는 바람에, 결국 지휘에 서툰 브루크너 본인이 무대에 서야만 했다.

전곡 최초 공연: 1877년 12월 16일에 브루크너 자신의 지휘로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빈에서 초연.

결과는 참담한 대실패였다. 그 실패의 규모는 그때까지의 브루크너 작품 초연 무대 중 최악의 것이었다. 1700명 가량 수용할 수 있던 공연장에서는 각 악장이 끝날 때마다 청중들이 자리를 떴고, 연주가 끝나고 객석에 있던 청중은 불과 20여 명뿐이었다. 게다가 악단 단원들마저 연주 종료 직후 브루크너와 청중들에게 답례도 안하고 그냥 나가버렸다. 결국 이 공연 이후 브루크너는 두 번 다시 자작 교향곡의 초연을 지휘하지 않았다. 스트라이크 아웃 인증인 셈이었으니.

상황이 이 지경이다 보니 브루크너는 한동한 좌절에 빠져 한동안 창작에 손을 대지 않았고, 특히 교향곡은 1879년까지 버로우했다. 그나마 최소한의 위안이 된 것은 이렇게 철저히 망한 곡을 출판해주겠다는 대인배가 나타났다는 것이었는데, 음악출판업자인 테오도어 레티히가 자신의 출판사에서 곡을 출판해주겠다고 제의를 해왔다.

브루크너는 그 제의에 응했는데, 다만 관현악용 악보는 아니었고 피아노 두 대를 위한 편곡보의 형태로 1878년에 출판되었다. 편곡을 담당한 이들은 바로 구스타프 말러와 루돌프 크시차노프스키였는데, 당시 브루크너가 교수로 재직하고 있던 빈 음악원에서 음악을 공부하던 10대 학생들이었다. 이들은 끔찍하게 끝난 초연 때도 청중으로 끝까지 남아서 브루크너를 응원한 용자들이기도 했다. 관현악용 악보로 출판된 것은 최종 개정을 마친 뒤였고, 출판과 함께 곡에 대한 긍정적인 재평가도 진행되었다.

4. 판본

브루크너 교향곡 가운데서도 판본 문제가 가장 복잡하다. 다른 교향곡들은 판본 문제가 복잡한 4번, 8번 등도 단순화하면 크게 두 가지 범주로 압축되지만, 3번은 단순화해도 세 가지 범주로 대별된다. 클팬들을 더욱 힘들게 하는 것은 이 세 가지 범주의 판본이 모두 장단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결정판을 찾기 힘들다는 점이다.

4.1. 1873년판

엘리아후 인발, 프랑크푸르트 방송 교향악단, 1982년 9월 녹음[8]

브루크너가 1873년 12월 완성한 이 곡의 첫 형태이다. 1874년 봄 브루크너는 완성된 악보를 2벌 필사하여 한 부는 자신이 보관하고 다른 한부는 바그너에게 헌정되었다. 바그너에게 헌정된 필사본은 바이로이트에 보관되어 있다가 이후 1873년판 복원 작업에 결정적인 자료가 되었다. 1873년 초고[9]는 1874년 6월~7월 경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 의해 리허설이 이루어졌으나 공연이 성사되지는 못했다. 이후 브루크너는 이 작품을 몇차례 더 개정했고, 결국 1873년판은 100년 이상 묻혀졌다가 1977년에 브루크너 전문 연구가인 음악학자 레오폴트 노바크의 편집으로 출판되었다. 사실 이 초판본은 로베르트 하스가 출판할 계획을 가지고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으나 실현되지 못했고 노바크는 하스의 자료를 참고하여 작업했다. 브루크너 자신이 보관한 나머지 한 부에는 1874년에 추가적인 수정이 가해졌다. 그런데 노바크가 편집한 1873년판은 실제로는 1874년에 개정된 내용도 살짝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 윌리엄 캐러건이 1874년판을 따로 편집하여 발표하였기 때문에, 추후에 언젠가는 순수한 1873년판이 새로 편찬될 가능성도 있다. 브루크너가 바그너에게 헌정한 초고가 바이로이트에 소장되어 있기 때문에 복원은 손쉽게 가능하다.

초연은 1978년 한스 휴버트 쇤젤러(Hans-Hubert Schönzeler, 1925~1997)[10]의 지휘로 오스트레일리아의 애들레이드 페스티벌에서 성사되었다.

어마어마하게 긴 규모로도 유명하다. 1악장은 무려 25분에 달하고, 2악장도 20분에 육박하다. 다만 3악장은 6분 가량으로 비교적 짧고, 4악장도 15분으로 무난(?)하다. 도합 연주시간은 1시간 5분으로, 이 곡이 완성될 당시까지만 해도 이 교향곡만큼 긴 교향곡은 베토벤 교향곡 9번을 제외하면 없었다.

4.1.1. 1874년판

작곡 후 첫 번째 개정 작업이 반영된 판본이다. 1873년 12월 완성된 1873년판을 가지고 1874년 6월~7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리허설을 진행했으나 실제 초연이 이루지는데는 실패했다. 이 리허설 경험을 바탕으로 브루크너는 개정을 진행했고 그 결과물이 1874년판이다. 이 1874년의 개정은 기존의 1873년 초고 위에 가필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1873년판과 구조상 큰 차이점은 없다. 당시 브루크너 자신은 이 개정으로 작품이 상당히 개선(a considerable improvement)되었다고 평했지만 이후에 엄청나게 개정된 판본들에 비하면 이 1874년판은 1873년판과 큰 차이는 없다. 몇몇 악구를 첨삭하고 대위법 진행 부분을 보완하고 오케스트레이션을 개선하는 등의 추가 작업을 확인할 수 있다. 1875년 가을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새로 개정된 1874년판을 가지고 다시 한번 리허설을 가졌지만 역시 초연은 성사되지 못했다. 훗날 음악학자 토마스 뢰더가 이 판본을 편집했지만, 1873년 판본과 큰 차이가 없어서인지 미발표로 남겼고 그 대신 복잡하기로 유명한 이 곡의 개정 과정을 서술한 '개정 보고(Revisionsbericht)' 라는 학술 문헌을 1997년에 발표했다. 뢰더의 작업과 별개로 동료 음악학자 윌리엄 캐러건도 이 판본을 편집했고, 2011년에 발표했다. 다만 2024년 현재까지 공식 출판본은 없는 상태다.

4.1.2. 1876년판 (2악장)

1875년 가을 빈 필과의 두번째 초연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후 1876년 브루크너는 다시 이 교향곡을 개정했다. 이 개정 작업은 1876년 11월에 완료되었고 12월경에 전 악장의 필사가 이루어졌다.[11] 전 악장을 다 손대었으나, 특히 2악장이 가장 집중적으로 개정되었다. 이 2악장은 전체적인 구조로 볼 때 1877년판보다 1873년판에 훨씬 가깝다. 1873년판의 2악장과 비교해 보면 오케스트레이션이 제법 바뀌었지만 전체적인 구조 자체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반면 1877년판에서는 아예 곡의 구조를 바꿀 만큼의 대대적인 삭제가 가해졌을 뿐만 아니라 후반부는 상당부분이 거의 새롭게 쓰였기 때문에 1876판과 1877년판 사이에는 큰 차이가 존재한다. 1980년에 노바크의 편집으로 2악장만 출판되었다. 나머지 악장들은 아직까지 출판되지 않은 상태다.

4.2. 1877년판

1876년 11월 개정을 완료했던 악보를 다시 꺼내어 1877년 1월부터 4월까지 다시 개정을 진행했다. 특히 4악장을 집중적으로 개정했다. 이후 1877년 9월 27일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이 악보를 가지고 다시 한 차례 리허설을 했으나 역시 초연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브루크너는 1877년 10월 2악장을 집중적으로 개정했다. 1877년 개정 작업에서는 이전까지 개정 작업에 비해 매우 대대적인 변화가 이루어졌다. 바그너 작품의 인용구가 대부분 삭제되었고, 다소 장황하다고 판단한 부분도 대폭 삭제되어 곡의 길이가 상당히 단축되었다. 특히 2악장은 대폭적인 삭제가 이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후반부의 상당부분은 이전과는 다른 분위기의 곡으로 다시 쓰였다. 이 악보를 바탕으로 1877년 12월 16일 초연이 이루어졌다. 초연 직후 1878년 1월 브루크너는 3악장에 41마디의 코다를 추가했다.

1977년판의 원전판(original version)은 두 가지가 있는데, 1950년에 로베르트 하스의 동료 음악학자 프리츠 외저가 편집하여 출판한 외저판과 1981년 노바크가 출판한 노바크판이 있다. 두 판본은 세 군데 정도의 차이가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차이점은 3악장 코다의 유무다. 이 코다는 1877년의 개정 작업 기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초연 직후인 1878년 1월에 자필고에 추가한 것이다. 그랬다가 1879년에 브루크너는 이 교향곡을 출판하기 위해 새로운 자필고를 만들었고 이것이 그가 승인한 최종결정고(Stichvorlage)이다. 이 최종결정고에는 3악장 코다가 다시 빠져 있다. 실제 자필 악보에는 3악장 코다에 "not to be printed"라는 의미의 독일어가 쓰여 있다. 외저판은 최종결정고(Stichvorlage)에 기반하여 편집되었고 이에 따라 스케르초의 코다를 제외하고 있다. 반면 노바크판은 1877년 초연 직후 스케르초가 추가된 자필고에 기반하여 편집되었고 스케르초의 코다도 포함하고 있다. 노바크판은 비록 1878년에 추가된 코다를 반영하고 있지만 전체적인 개정은 1877년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1877년판으로 분류된다.[12] 하지만 코다가 뒤늦게 추가된 것이기 때문에 외저판과의 구별하기 위해 노바크판을 1877/78년판이라고 하는 경우도 간혹 있고 요즘은 노바크판을 '코다가 딸린 1877년판'과 같은 식으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1877년판을 바탕한 제자들에 의한 개정판(Revised version)은 브루크너 생전인 1880년 래티히(Rättig)에 의해 처음 출판되었다. 이 Rättig판 출판을 위해 브루크너가 만든 자필고가 앞서말한 최종결정고(Stichvorlage)이다. 그러나 래티히판 역시 다른 교향곡의 첫 출판 악보와 마찬가지로 제자들의 무단 개정이 포함된 판본으로 간주되어 현재는 거의 연주되지 않는 판본이다. 다만 제자들이 실제로 손댄 부분은 많지 않기 때문에 외저판과 큰 차이는 없다.

4.3. 1889년판

1887년부터 1890년에 걸친 대규모 개정 작업(2차 개정파동)의 일환으로 개정되었다. 이 개정 파동은 8번 교향곡의 초연을 레비가 거절하면서 시작된 것으로 교향곡 1번, 3번, 4번, 8번 등이 이 시기에 대규모 개정을 겪었다. 같은 시기에 개정된 4번 등과 마찬가지로 제자인 샬크 등의 도움을 받아 진행되었다. 1877년판에서 추가로 대대적인 첨삭이 가해졌다. 특히 3, 4악장에서 삭제된 부분이 있어 곡의 길이는 더욱 짧아졌다. 현재 1889년판의 원전판(Original Version)은 노바크판이 유일하다.

4.3.1. 1890년 개정판(Revised version)

890년 레티히(Rättig)의 제안으로 출판된 첫 관현악용 악보. 브루크너도 편집에 관여했으나, 주된 편집은 브루크너의 제자들인 요제프와 프란츠 샬크 형제가 맡았다. 다른 교향곡에서 처음 출판된 개정판(Revised version)들과 마찬가지로 이 판본은 제자들에 의한 무단적인 개정이 추가된 것으로 간주되어 지금은 거의 연주되지 않는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1889년 노바크판과 큰 차이는 없다.

이해의 편의를 돕기 위해 단순화하자면 크게 세 가지 범주로 묶을 수 있다. 1873년판(1873년 노바크판, 1874년판, 1876년판), 1877년판(1877년판(외저판, 노바크판), 1880년 개정판(Rättig판)), 1889년판(1889년 노바크판, 1890년 개정판(Rättig판))으로 구분할 수 있다.

4.4. 분석

혼란을 가중시키는 것은 결정판이 없다는 점이다. 다른 교향곡은 복수의 판본이 있더라도 대세인 결정판이 있기 마련인데[13], 이 작품은 판본의 우열을 가리기 힘든 편이다. 그래서 세 가지 판본이 모두 자주 연주되는 편이며 지휘자들이 어느 판본을 선택해야 하는지 가장 고민하는 곡이기도 하다.
일단 1889년판이 작곡가가 가장 마지막에 손 뗀 판본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대세로 여겨져 왔다. 1950년 외저판이 나오기 전까지는 1889년 개정을 바탕으로한 래티히판이 유일하게 출판된 판본이었다. 그래서 과거 녹음일수록 1889년판의 채택 빈도가 높은 편이다. 이 판본으로 연주한 지휘자로는 칼 뵘,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세르주 첼리비다케, 오이겐 요훔, 귄터 반트, 클라우스 텐슈테트, 조지 셀, 리카르도 샤이, 로린 마젤, 스타니슬라프 스크로바체프스키, 쿠르트 잔덜링, 데니스 러셀 데이비스(젊은 시절), 마렉 야노프스키, 안드리스 넬슨스 등이 있다.

그러나 1877년판이 초연에 사용된 판본이기도 하고 좀 더 젊은 시절 브루크너의 순수성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판본을 선택하여 지휘한 지휘자들도 적지 않다. 1877년판은 노바크판과 외저판이 있는데, 이 두 판본은 3악장 코다를 제외하면 사실상 양자간 큰 차이는 없다. 외저판이 나온 후 31년 후에야 노바크판이 나왔기 때문에 1981년 이전에는 외저판으로 연주되었다. 이후 노바크판이 나왔지만 3악장 코다의 유무에 대한 선택의 차이 때문에 외저판도 계속 꾸준히 사용될 것으로 보인다. 다니엘 바렌보임(외저판), 라파엘 쿠벨릭(외저판), 크리스토프 폰 도흐나니(외저판), 야샤 호렌슈타인(외저판), 로브로 폰 마타치치(외저판), 베르나르드 하이팅크(1960~70년대에는 외저판, 1980년대 이후에는 노바크판), 게오르그 솔티(노바크판), 주세페 시노폴리(노바크판),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노바크판), 미하엘 길렌(노바크판), 유카 페카 사라스테(노바크판), 이동호(외저판) 등 많은 지휘자들이 1877년판을 채택하여 지휘했다.

최근에는 1873년판을 채택하는 이들도 늘고 있다. 특히 손상되지 않은 2악장의 아름다움이 뛰어난데, 나중에 길이를 줄이기 위해 엄청난 삭제와 변형이 가해진 모습과는 차이가 크다. 1977년에서야 이 판본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에 구세대 지휘자들은 이 판본을 연주할 기회가 없었다. 엘리야후 인발에 의해 최초로 이 작품의 레코딩이 나온 후 1873년판본 만의 진가가 널리 알려면서 이 판본을 찾는 연주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엘리야후 인발, 헤르베르트 블롬슈테트(최신녹음), 게오르크 틴트너, 시모네 영, 요나탄 노트, 켄트 나가노, 야닉 네제-세갱(Yannick Nézet-Séguin), 데니스 러셀 데이비스, 마르쿠스 보슈, 로저 노링턴, Remy Ballot, 노리치카 이모리 등 신진 지휘자들을 중심으로 이 판본을 채택하는 지휘자들이 늘고 있다. 다만 다른 판본에 비해 연주 시간이 상당히 길다는 점, 노바크가 독점적으로 악보의 저작권을 가지고 있다는 점 등이 이 판본을 채택하는 데 약간의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2011년에야 초연된 1874년판은 앞으로 채택 빈도가 어떻게 될 지 주목된다. 일부 오케스트레이션이 소소하게 변화한 것 말고는 1873년판과 큰 차이가 없다. 1873년이 초판본으로서의 프리미엄까지 갖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1874년이 다른 판본과 차별화 요소를 갖고 점유율을 높이는 것이 쉽지는 않아 보인다.[14] 일단은 1874년판본의 정식 출판부터 이루어져할 것이다.

이외에 브루크너 협회에서 공인된 판본을 조합한 '비공인 개정판' 도 있다. 학술적인 자세로 봤을 때는 초판의 무단 개정이라는 악행을 현대에 와서 재현한다며 비판을 받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지휘자가 본인의 예술적인 감수성 및 상상력으로 자신만의 판본을 재구성하는 것은 오히려 애호가들에게 더 많은 선택지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다. 브루크너 교향곡 중 가장 인기가 있는 8번은 이런 경우가 종종 있었다. 우선 하스판 자체가 1890년판에 1887년판에서 삭제된 부분을 섞은 판본이라 할 수 있고, 지금처럼 판본에 대한 학술적 비판이 심하지 않은 시절에는 푸르트벵글러, 슈리히트, 뵘 등이 두 가지 이상의 판본을 결합한 자신만의 독자적인 판본을 가지고 연주하기도 했다. 다른 곡이긴 하지만 아바도는 모차르트의 레퀴엠을 여러 판본을 섞은 자신만의 판본으로 녹음한 경우도 있다.

''최종 연주회용판: 음악학자 요제프 칸츠가 2005년에 그 동안 나온 개정판들을 바탕으로 형식과 관현악 어법을 교정해 내놓은 짬뽕식 판본.''
''신판(Neufassung): 지휘자 페터 얀 마르테가 1873년부터 1889년까지 나온 판본 네 가지를 뒤섞어 2005년에 만든 짬뽕식 판본.''
''신판: 마찬가지로 마르테가 2006년에 내놓은 짬뽕 판본. 달라진 것은 2악장과 3악장의 순서를 뒤바꾼 것 뿐임.''

5. 기타

참고로 이 곡의 1악장 첫머리는 나치 독일의 정치 집회장에서 개회를 알리는 팡파르로 줄기차게 사용되었는데, 사유는 바그너가 골라준 주제라는 점이었다.


[1] 영상 설명에 독일 통일의 날에 연주된 거라 적혀 있다.[2] 3번~6번을 중기작품으로 분류할 수 있다.[3] 첼리비다케가 대표적이다. 전곡 녹음을 남긴 지휘자라 하더라도 실연에서의 레퍼토리는 3번부터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4] 2악장 마지막 부분에 발퀴레에서 인용한 부분은 끝내 지우지 않았는데, 이 부분은 워낙 곡의 흐름과 잘 맞아 떨어져서 발퀴레의 원곡보다 여기에 쓰인 것이 훨씬 감동적일 정도다. 다만 개정을 거치면서 마지막 1889년판에서는 원작인 발퀴레와는 다소 다른 형태로 변형되었다.[5] 실제로 바그너가 이 아이디어를 극찬했다고 하는데, 무조건적인 찬사는 아니었던 것 같고 그 아이디어를 지독한 오스트리아 사투리로 설명하는 브루크너의 모습을 풍자하는 의도도 있었다고 한다.[6] 예로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칼 뵘, 존 바비롤리, 세르주 첼리비다케가 있다.[7] 정확히는 합창단 지휘는 잘했지만 오케스트라 지휘는 정말 젬병이었다.[8] 브루크너 3번 초고의 최초 전곡 녹음이다. 인발은 그 외에도 4번과 8번의 초고도 최초로 녹음해 음반으로 발매했다.[9] 브루크너 본인이 소장한 초고[10] 그로부터 5년 전인 1973년 브루크너 8번 초고의 세계 초연을 성사시켰다.[11] 필사가 이루어졌다는 것은 브루크너가 그 시점에서 개정 작업을 완성했음을 의미한다.[12] 노바크판이나 하스판은 다른 교향곡에서도 가장 집중적인 개정이 이루어진 해를 기준으로 판본명을 정했다.[13] 4번 교향곡의 1878/80년판, 8번의 1890년판[14] 사실 더욱 골치아픈 문제는 현재 출판되어 있는 1873년 노바크판이 순수한 1873년판이 아니라 1874년의 개정 내용도 일부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다.